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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ㅣ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본 적은 없었다. 고작해야 열하일기에 대해 정민 님과 고미숙 님이 쓰신 책을 서너 권 읽어 본 것 밖에 없다. 그렇게 한 다리 건너 만나 본 연암의 열하일기인데도 시대의 틀을 깨어버리는 장쾌한 맛이 풍겨오는 듯해서 좋았었다. 김탁환 님의 소설 <열하광인> 소식을 접하고 읽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도, 열하일기를 직접 맞댈 용기가 없는 내가 소설을 통해서라도 연암의 열하일기가 가진 그 장쾌한 향을 다시 맡고 싶다는 무모함이 나를 독촉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권의 금서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p.11)는 열하일기에 대한 찬미의 글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의금부도사 이명방이 작중화자인 까닭에 소설의 문장 자체가 꽤 예스럽다. 그것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동시에 역사소설의 맛을 더 풍부하게 해주기도 했다. 511까지 번호가 붙은 각주들 또한 이 소설의 특이한 점 중 하나다. 모르고 있던 국어 낱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작가의 풍부한 어휘능력을 감탄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모였던 백탑파들에 대한 정조의 문체반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그린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이 작품을 읽으며 좀 애매한 곳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내가 추리소설 영역에 워낙 낯선 탓도 있겠지만 어쩐지 ‘추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자꾸 거치적거렸다. 오히려 ‘추리’부분을 거둬내고 ‘역사소설’ 부분만 말끔하게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재미는 있었다. 이 <열하광인> 전에 나온 <방각본 살인사건>과 <열녀문의 비밀>을 읽어보지 못했는데도 작중화자인 이명방의 존재에 익숙해지자 속도에 탄력이 붙으면서 소설의 재미에 밤새워 빠져들었다. 청정관 이덕무가 규장각 검서관 일을 하게 되면서 “빛을 보지 않아도 좋다. 버려진 물건처럼 이리저리 구르던 우리들의 삶도 이제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규장각 서고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좀벌레로 늙어 간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책만 보는 바보, 210쪽, 안소영, 보림)며 행복해하던 글이 떠오르기도 했고, 안의 현감으로 머무는 연암이 등장할 때에는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비슷한 것은 가짜다, 295쪽, 정민, 태학사)던 이서구의 글이 떠올라 연암의 가난하고 쓸쓸한 말년이 겹쳐지기도 했다.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실감나게 잘 짜여진 사건전개와 사건의 미궁 속에서 집요하고 정확하게 실마리를 찾아가는 긴박감은 추리소설로서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지만, 조선시대 제 2의 르네상스라고 불려지는 정조시대를 살았던 백탑파 인물들에 대한 성격묘사나 문체반정에 대한 백탑파들의 고민은 세심하게 그려낸 것 같다.
요즘의 역사소설에 대한 인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좀 더 손쉬운 방법으로 지적 자극을 받고 싶다는 독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역사는 오늘의 삶과 자기 정체성을 되비쳐 볼 수 있는 유력한 준거들이다. 소설가들이 역사를 빌려오는 것은 얼크러진 현실의 복잡한 정황 때문에 그것을 전체로서 그러쥐고 통찰하기 어려울 때다.”는 한 기사의 글이 떠오르기도 한다. 역사소설이 독자들의 손쉬운 지적 자극의 수단이 되거나 또는 작가들의 복잡한 현실문제에서의 도피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천자로서 서인까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 시문을 짓는 자라면 누구나 선비”(상권 211쪽)라는 글처럼 책 속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진솔한 삶을 만나는 것이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연암이 문체반정에 굴하지 않고 열하일기를 통해 자기의 생각과 삶을 온통 드러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백탑 아래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