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사자 비룡소의 그림동화 135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멋진 갈기와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사자는 친척인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요. 고양이들은 사자의 멋진 모습을 보려고 매일 모여듭니다.  사자는 자기를 좋아하고 우러러봐주는 고양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어흥~!”하고 포효하며 날아오르듯 달려 나가 얼룩말을 잡아오지요.  그리곤 손수 맛있게 요리해서 고양이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대접합니다.  이제 고양이들에게 사자는 우상이자 스타이고 우두머리이자 초월적인 능력자이며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었어요. 사자는 고양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날마다 우렁차게 “어흥!”하고 달려 나가 얼룩말을 잡아와야 했지요.

 



어느 날 사자는 고양이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낮잠을 자는 게 취미야.”라고요. 사자는 너무나 피곤했던 거예요. 고양이들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만큼 따라가기가 너무 힘에 벅찼으니까요.  하지만 고양이들은 깔깔거리며 말합니다. “야, 사자는 요리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네.”

고양이들에게 사자는 낮잠 따위는 필요치 않은 완전무결한 존재였던 거예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그래서 얼룩말 한 마리쯤은 이쑤시개 부러뜨리듯 쉽게 잡을 수 있는, 스타거든요.  스타가 겨우 낮잠 자는 게 취미라니, 그건 스타의 이미지와 너무 맞지 않는 이야기였던 거지요. 더구나 이제 사자가 잡아와 손수 요리해주는 맛있는 얼룩말 고기는 ‘당연한’ 것이 되었을 테니까요.

사자는 고양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양이들을 따라 허탈하게 웃고 맙니다. 하지만 고양이들이 돌아가고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축 늘어져 잠이 들고, 결국엔 훌쩍훌쩍 울기까지 한답니다.  아, 정말 불쌍해요.

 



어느 날 사자는 고양이들을 위해 얼룩말 사냥을 나서다가 그만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곤 황금빛 돌이 되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죠.  그 때서야 고양이들은 말합니다. “참, 사자가 ‘낮잠 자는 게 취미’라고 농담했었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지요. 사자는 ‘게으름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계속 잠만 잡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아기 고양이가 사자가 왜 자고 있을까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리곤 말하죠. “많이 피곤했나 봐요.” 잠자고 있던 사자는 그 말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어흥!”하고 소리칩니다. 사자가 듣고 싶던 그 말, 자신의 힘겨움을, 피곤을, 노고를, 고충을 이해해주는 그 말이 아기 고양이의 입에서 나왔던 거예요.  여기에서 그림책이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작가는 삶을 너무 잘 알아서인지 사자를 행복한 그 상태로 가만히 두지 않아요.

 



 아기 고양이는 잠에서 깨어난 사자에게 묻습니다. “사자야, 얼룩말도 잡을 수 있니?”
사자는 아기 고양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 때 사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얼룩말을 잡으러 갔을까요?  아니면 고양이들이 없는 다른 곳으로 떠난 걸까요?

 

 

그림책의 주제치고는 참 독특하고도 깊은 주제를 섬세하고도 유머 있게 다룬 책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어른들의 마음에도 공명의 자국을 뚜렷하게 남기네요. 아마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읽으면 공감하는 부분이 더 크리라 생각합니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사자이거나 고양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누군가의 칭찬에 기운을 내고 앞으로 나갈 힘을 얻기도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삶을 너무 힘겹고 답답하고 지치게 만들죠.  혹시 어떤 사람을 내가 만든 틀에 정형화시키려고 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고양이들이 사자에게 낮잠을 허락하지 않았듯이 나도 누군가를 내 틀에 맞춰서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며 혼자 서운해 하고 혼자 노여워하지 않았는지 말이에요.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과감하게 내 쪽에서 상대방이 갖고 있는 틀을 깨뜨려 버리는 적극성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자기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틀의 경계를 점점 흐릿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너와 내가 자유로운 삼투압이 가능한 관계, 그러다 그 얇은 막마저도 툭 터져서 한데 섞이고 어울릴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오늘 누군가가 “난 낮잠 자는 게 취미야.”하거든 커튼도 쳐주고 이부자리도 펴주고 극성맞은 가을모기들 쫓아내는 모기향도 켜주고, “잘 자.”라는 인사까지 쿨하게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사소해 보이는 작은 노고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하지 않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림책 속 고양이나 사자가 되지 않는, 또 누군가를 고양이나 사자로 만들지 않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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