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
정희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에 걸친 시기에 나는,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프랑스와 케냐, 그리고 인도와 티베트를 꼽았었다.  왜냐고 이유를 물으면, 나는 프랑스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과 예술을 보고 아프리카의 케냐에서는 사바나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야생의 세계와 원시의 색을 만나고, 끝으로 인도나 티베트에서 인간의 내면, 정신과 영혼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고 대답하곤 했다.  아마 그 나이쯤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뻔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이제 젊음의 시기를 지나서 그 시절의 내 대답을 떠올리면, 난 그 때 여행을 꿈꾸었던 게 아니라 낭만이나 멋을 부리려 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꿈꾸었던 그 곳에 내가 발을 딛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질만큼, 그 시절 나의 대답들이 부끄럽고 민망할 따름이다.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어떤 특별한 장소에 대한 여행정보나 유적에 대한 느낌, 우리와 다른 문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저자가 "여행은 결국 사람과의 만남이다."라고 했듯이 책 속에는 나라를 잃은 티베트 사람들의 딱한 처지가 담겨 있기도 하고, 중국에 정복된 티베트의 실상들도 적혀 있다.  중국에 의해 변질되고 있는 티베트의 그 맑고 순정한 영혼의 세계가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티베트 현실의 끝이 너무 위태롭고 날카로워서 소파에 편히 앉아 책을 읽는 내 처지가 안온하다 못해 늘어진 엿가락처럼 느껴지곤 했다.  또 책 속에서, 중국의 거센 중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만의 순정한 영혼은 침범당하지 않으려 하고 자비와 헌신의 티베트 고유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티베트인들을 만나는 순간에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모든 여행은 자기를 찾아가는 순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고, 숭고한 자연 앞에 겸손을 배우고, 역사가 들려주는 가르침을 듣고, 현실의 회한을 가슴으로 싸안으면서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한 걸음을 옮기는 것. 

저자는 책에서 말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신성한 산이나 호숫가라고 다르지 않"(p.336)고, "풍경은 당신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p.335)한다고.  그러고보면 우리의 순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옳다. 여행과는 달리 순례에는 고통이 따른다.  저자는 고산병에 시달리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고, 입술에선 고름이 터지고 피가 맺히는 상황을 극복해야 했다. 그 뿐아니라 중국공안의 검문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야 했고 가슴 아픈 현실 깊숙한 곳까지 스스로 걸어들어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종국엔 "오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인간을 이해하듯 나는 스스로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나라고 불리는 존재임을."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나는 나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죽어갈 수도 있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 친구들의 목숨을 건 탈출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뜨거운 우정으로, 영혼의 성지인 티베트를 순례하고 싶다는 타는 갈망으로 순례의 길에 오른 저자는 그 곳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 이해하고 돌아온 것일까.  그래서 나를 향한 내 눈빛이 한없이 온유해질 수 있고, 나를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타인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된 걸까. 

나는 어떤 갈망과 뜨거움으로 순례의 길에 오를까.  어떤 열기로 내게 주어지는 고통들을 녹여내고 어떤 기도와 성찰로  담금질할까. 나태해지고 싶을 때, 한없이 늘어져 안온함이 주는 편안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 인생이 뭐 별거냐 싶게 심드렁해질 때, 내 앞에 놓인 여러가지 가치들의 선택을 두고 갈등하게 될 때, 그 갈등이 버거워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싶어질 때, 타인이 내두르는 편견과 아집의 잣대에 맞아 시퍼렇게 멍들 때, 미움이나 절망같은 감정에 기운을 모두 소모하고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세우고 옹크린 채 꼼짝하기 싫을 때, 내가 순례의 길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마음의 여유와 길고도 먼 시각을 가다듬게 해 줄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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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8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18 10:05   좋아요 0 | URL
제 글보다도 님의 결고운 감수성이 작용한 것 같네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마음을 담아 읽어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