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인도 순례기
정희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절판


행복은 스스로 깨우쳐 얻지 않으면 결코 제 발로 다가오지 않는 냉정한 연인과 같다.-10쪽

그 순간 나는 믿었다. 우리가 어딘가로 쏟아 부은 사랑은 결코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랑이 의미를 찾고 꽃을 피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이 우주 어딘가에는 우리가 쏘아 올린 사랑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것을. 이 믿음이야말로 춥고, 외롭고, 막막했던 내게는 구원이었다.-23쪽

우연히 똑같은 것을 보고 웃거나, 똑같은 것을 보고 무서워하거나, 아니면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것을 보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도록 하소서.

나도 아이를 향해 웃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서로 웃었을까. 그것이 무엇이건 아이와 함께 바라본 순간의 진실에 나는 감사한다.
우리를 천상으로 이끌고, 지옥으로 내팽개치는 지독한 체험들 가운데 몇 개나 사랑하는 이들과 절실히 나눌 수 있을까. 그래서 공감하게 해달라는 저 기도가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리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함께 바라보고 느끼는 그 작은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임을.-24쪽

"이생에서 아무런 원한 맺힌 것 없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것은 과거의 영향 때문입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즈음 나는 세금 고지서처럼 꼬박꼬박 찾아오는 인생의 크고 작은 고통들이 지긋지긋했다. 스승이 답하셨다.
"티베트 불교에는 통렌 수행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가진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귀한 것을 모두 다른 이들에게 주고, 중행의 아픔과 고통을 내가 대신 받는 상상을 하는 수행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이번 생에 극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럴 때면 다음 생에 받아야 할 것을 이번 생에 미리 받았다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내게 고통을 주는 이야말로 가르침을 주는 은인임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78쪽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의 몸이 완전히 타는 데 세 시간 정도가 걸리며, 마른 사람보다 뚱뚱한 사람이 더 쉽게 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사람 타는 냄새가 돼지고기 굽는 냄새와 닮았고, 좀 더 비릿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장이 팽창하다가 터질 때는 피융 하는 소리가 나고, 팔보다는 다리가 먼저 떨어져 나와 배 위에 얹힌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죽음에 관해 내가 시각과 후각, 청각으로 알아낸 사실이었다. 죽음은 우리의 감각을 벗어난 곳에 있지 않았다.-84쪽

나는 그 순간을 사랑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가 신성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삶이 나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어디에서 찾을까.-97쪽

세계가 내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 지옥이 있다.-103쪽

어느 하늘 아래, 어느 침대 위에서 혹은 방바닥에서 잠들건 이곳의 삶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기에 견딜 만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통인 것이다.-106쪽

인생의 서글픔을 아는 사람들, 넘어져서 크게 코가 깨져 본 사람들은 다른 이의 아픔에 등 돌리지 못한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물질적 환경이 불안정한 사람들일수록 인간의 고통에 더 섬세한 공감을 일으킨다. -108쪽

인생의 새벽이라는 아동기에 왜 어떤 아이들은 강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우는 물고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112쪽

인간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서로 소통한다는 건 고귀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115쪽

우리는 모두 자신의 존재 상황이 낯설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기가 어렵다.-126쪽

"이봐,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돼. 절망하고 상처받아 세상을 원망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안에는 희망의 씨앗이 담겨 있음을 잊어선 안 돼.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건 그 순간 너무 큰 기대와 분노가 우리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야. 되는 일이라곤 없고,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다고? 좋군, 좋아! 뭘 걱정하나? 이제 더 일을 것도 없는데. 붕괴 너머로 어떤 징후가 오는지, 어떤 기회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한번 봐. 이번 생에 이루지 못했다면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운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물고기는 원형의 반쪽을 이루며 이렇게 속삭였다.
희망이라니, 너무나 구태의연한 제도의 꼬드김이다. 이 세상이라는 시스템이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힘까지 끌어내려 고안해 낸 오래된 회유책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깊은 차원에서 진실임을 뼈아프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한 번의 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제를 인정하기만 하면 기회는 무궁무진해진다. 그것이 바로 희망 아닐까.-134쪽

많은 이들이 익숙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삶의 권태와 불안, 공포, 환멸을 보지 않으려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사전에서 빼버리고 싶은 불길한 단어들이 살고 있지 않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쫓길 바에는 차라리 모파상처럼 우리가 삶의 권태와 공포 속으로 들어가 한 몸으로 살아 버리는 편이 낫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운명을 향한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므로. 별들은 어둠 속에 떠 있으나 결코 제 길을 읽는 법이 없다. -137쪽

여행은 결국 사람과의 만남이다. 누구를 어떤 시점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의 내용도, 과점도 달라진다. -138쪽

사람이 산다는 것, 보살피고 헌신하고 마음 쓰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잠빠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양로원에서도 얼마나 따뜻하고 속 깊은 모두의 딸이었던가.
다른 사람을 삶의 첫자리에 놓고 산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 친구를 또 한 명 알게 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146쪽

켈상. 이 현실의 세계, 마야의 세계에 너무 깊게 빠지지 말자. 이곳은 우리가 일생을 걸쳐 뭔가를 배워야 하는 학교이지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니까.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인생이란 우리가 설계한 대로 펼쳐지는 홀로그래피라는 걸 놓치기 쉬워. 그렇게 되면 게임 속 승패나 아이템에 매몰돼 공격적인 에고만을 키우게 되지. 이 사실을 몰라서, 아니 알아도 몸으로 체득하지 못해 나는 지금껏 좌충우돌 살아왔단다. 세상 끝까지 가도 슬픔이 끝나지 않을 거라 슬퍼했단다.
우주는 꼭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들과 만나게 해주더라.
..........(중략)........
이건 삶을 방관하며 허술하게 살겠다는 태도는 결코 아니야. 오히려 더 치열해지는 거지.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힘에 집중하는 것, 그게 바로 우이의 자부심이 돼야 해.
...........(중략)........
어디선가 슬픔도 집착의 결과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슬픔과 같은 예민한 감정을 잘 느끼는 나에게, 그리고 네게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말 아니야? 슬픔이나 쓸쓸함, 고립감은 우리를 다리에 돌을 매단 새처럼 만들지. 땅바닥을 힘겹게 기어다닐 뿐,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게 만드는 새....
-148쪽

세상에는 멈출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길 자체가 모든 의문과 고통에 대한 해답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184쪽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부처님이 답했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얻지 않았다. 단지 그동안 찾아오던 것이 항상 내 안에 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단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각에 이르게 되었다. 나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완전했다."-193쪽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욕망이, 사로잡힘이, 두려움이 '나를 따르라'고 채찍질했는지. 따라가본들 거기에는 어떤 평화도, 자비도, 행복도 없었다. 그저 남들 하는 만큼 해봤다는 가냘픈 자기만족이 있었을 뿐. -196쪽

그 자리에서 나는 통렬하게 깨달았다. 고통을 치유할 영약을 찾아 세상 끝까지 헤매었지만 결국은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음을. 찾고, 구하고, 헤맨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으므로, 그토록 피곤하고 불행했음을. -198쪽

노스님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중략)... 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무엇인가를 얻고자 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구는 '활동에 대한 욕구'를 제어하면 보이는 세계. 단순한 생활 속에서 건지는 소박한 기쁨들. -233쪽

늦으면 깊은 법이지요.-240쪽

일체의 인연이 내게 닿기까지의 수고로움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에 필요한 진정한 초심이리라. -270쪽

전쟁과 여행은 서로 상관없을 것 같은 단어이지만, 삶에 굶주린 사람들이 벌이는 행위라는 점에서 닮았다. 군인은 타인을 파괴하과, 여행자는 자신을 무너뜨리고 새 신화를 쓰고자 떠난다. 에고가 비워지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여행자의 심장에 순결하게 담긴다. -287쪽

누구에게나 하나의 세계가 완벽하게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기억이 저장되고, 언제 상처의 실핏줄이 터지고, 언제 일그러진 웃음을 치유하기 시작하는지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과 도취가 구원으로 가는 첫 단추일 수도 있는 것이다. -307쪽

여행이 가르쳐 주는 가장 일상적인 진리는 행복도 지나가고 불행도 곧 지난간다는 사실이다.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와 무상함에 지쳐 길 위로 나선 이는 모든 것을 치우치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삶이라는 여행길에도 얼마나 자주 고갯길을 만나 주저앉게 되던가. -312쪽

인생에는 '이치에는 맞지만 순리에 맞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상식, 이치가 있다. 그러나 자기 논리가 모두 순리에 맞는 것은 아니다. -314쪽

우린 순간순간 매혹당하며 사랑하고, 떠나고, 환멸을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천천히 죽어 가고 있지. 오래전 누군가가 내 가슴에 들어와 살고 싶게 만들었고, 종종 가슴을 꿰뚫는 고독을 느낀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모든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세계에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난 이제 감각의 세계, 변화하고 죽는 세계에서 발을 빼고 싶다. 그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야. -332쪽

"당신은 욕심이 많군요. 깨달음은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을 때 오는 게 아닙니다. 더 이상 떨어져 나갈 것이 없을 때, 철저하게 벌거벗을 때 오지요."-334쪽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모든 것 같운데 인간의 마음이 가장 빨리 변한다. 그것에 반응하는 내 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340쪽

춥고 외로운 이 황야에서 시간을 건너뛰려면 무엇에든 사로잡혀야 했다. 인생에, 언어에, 황에의 벌판을 비추는 달빛에, 가슴속 묻어 두었던 사무친 기억들에.-350쪽

티베트를 떠나며 깨닫는다. 그림자를 없애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몸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을 버리는 것임을. 그림자와 싸우지 않고, 그림자를 만드는 몸의 실체를 고요히 바라봐야 하는 것임을. -36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