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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간 빨간 모자 ㅣ 산하작은아이들 16
조엘 포므라 지음, 백선희 옮김, 마르졸렌 르레이 그림 / 산하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난 아동극의 희곡을 읽어본 경험이 없다. (그게 뭔 자랑이라고..쯧쯧) 내가 읽어 본 희곡이라고는 셰익스피어 작품 몇 개, 그 다음엔 예전에 동문선에서 <현대영미희곡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 네 권, 그리고 입센의 <인형의 집>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러니 아동극의 희곡을 받아든 내가 잠시 당혹스러웠던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더구나 연극이란 게 희곡의 내용과 짜임새도 중요하겠지만, 연출가의 능력이나 배우의 역량에 따라서도 변화무쌍하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희곡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안목의 그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고전적인 <빨간 모자>와 가장 먼저 차별화 되는 점은 아이와 엄마와의 관계에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세하게 다루고자 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바빠서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도, 아이와 놀아주지도 못하는 엄마와 온갖 방법으로 엄마의 관심을 끌려는 아이 '빨간 모자'가 있다. 아이는 엄마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괴물 흉내를 내고 있을 때조차도. 어쩌면 아이가 혼자서 할머니 댁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엄마의 관심을 끌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엄마가 내준 과제를 해결하고 마침내 홀로 할머니 댁을 향해 집을 나선다. 산길을 가는 부분에서 혼자 길을 나서는 아이의 불안함과 설레임이 잘 드러난다. 너무 불안해서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다가 깜짝 놀랄 할머니 생각을 하고는 금세 마음을 다잡는 아이의 마음이 잘 묘사되었다. 그 다음엔 원래 빨간모자 이야기대로 늑대를 만나는데 이 부분에서 늑대는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음흉한 매력이라는 게 있다면 이 늑대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늑대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할머니를 잡아먹고는 아이를 기다린다. 마침내 아이가 할머니 집으로 들어서고, 할머니인 체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늑대와 아이는 이야기를 나눈다. 늑대는 어서 아이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아이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다. 원래의 빨간 모자 이야기보다 훨씬 섬뜩하고 긴장감 있는 분위기가 흐른다. 연극무대의 팽팽한 긴장, 어두운 무대 위에서 빨간 모자와 침대에 누운 늑대에게로만 뻗어나간 동그란 조명의 빛, 객석의 조용함, 겁에 질린 듯한 아이의 목소리와 아이를 얼른 잡아먹지 못해 짜증이 난 듯 점점 음흉함을 드러내는 늑대의 목소리, 그 긴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불현듯, 빨간 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려는 늑대에게서 성폭력의 위험도 느꼈다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이 세상의 모든 빨간모자들에게 늑대가 누워있는 침대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은 생각을 나만의 느낌으로 묻어두라고 한다면야 굳이 고집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새로운 장르의 글을 접하면 늘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꽤 오래된 예전이지만) 처음에 밝혔던 희곡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큰 희곡의 재미를 만끽하며 즐겁게 읽던 기억이 난다. 희곡에 대한 호기심은 비록 만화책 <캔디캔디>의 테리우스 때문이었지만, 흐흠... 요즘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편독'이라는 말이다. 음식물 섭취에서도 '편식'이 나쁘듯이 아이들에게 너무 한 장르, 한 주제에 국한된 책만 읽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에서 생긴 말일 것이다. 그런 의도에서 본다면 '희곡'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가장 관심받지 못하는 장르이고 유아나 어린이들을 위한 요즘 공연물들의 양적인 성장을 생각할 때 아이와 함께 재미있는 희곡작품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또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