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 자체의 틀 바깥에 나서서 이 모든 규칙, 질서, 원리 등을 깡그리 부수고 묵살하고 위반하라고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그 바깥이 있음을 깨우쳐주려는 것이며, 그 바깥으로 나서려는 의지와 안의 것들에 맞서려는 위반의 정열을 부추기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해방된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의 삶을 풍요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전략일지 모른다. -37쪽
도시든 시골이든 결국 아이들은 이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일하고, 쉬고, 타인과 만나고 헤어지고, 상승하고 몰락하는 곳은 모니터 속의 '바깥'이 아니라 목숨을 안고 뒹구는 바로 이 바깥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뛰어다니며 넘어져서 상처도 입어보고,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버티는 법을 익혀야 한다. 미뤄봐야 소용없다. 손 안의 마우스처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는 저 냉엄한 바깥 세계와 마침내 화해할 때가 오고야 만다. -40쪽
우리가 바깥에 나섰을 때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길을 묻는 것'이다. 오래 헤매다가 지쳐버리는 것은 바깥에서의 현명한 처신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길을 물을 때, 언제나 원하는 답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답을 얻지 못할 때조차 그런 실패를 통해 얻는 게 있다. 그러니 우리가 바깥에 나설 때는 겸손하게 길을 묻는 태도부터 배워야 한다. (중략) 바깥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우리를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때로 "여긴 당신이 찾는 게 없다"는 말을 듣고 힘없이 발길을 돌려야 할 때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이제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기를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하다. -44쪽
사람이 나이 든다는 것은 바깥들과 만나는 기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고, 철이 든다는 것은 그렇게 만나게 되는 바깥의 낯선 것들을 점점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성숙은 익은 감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시간이 가면 저절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싸워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다. 그러니 먼저 바깥으로 나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을로 가서 이웃을 살피고, 또래들을 만나 자신을 돌아보고, 바깥 자체와 대화하고 소통하려 애써야 하는 것이다. (중략) 소통의 변함없는 비결은 배려, 사랑, 헌신이다. 얘들아, 바깥은 아주 가까이 있다. 컴퓨터 스위치를 끄로 창문만이라도 활짝 열어보렴. 창 밖에 서 있는 그 멋진 손님, 그게 바깥이다. -50쪽
어쨌든 진정으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판단중지' 상태를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60쪽
근본적인 불행은 변신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61쪽
무엇인가 되고자 할 때 오직 하나 가능한 길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략) 내가 여기서 '자신이 되라'고 한 것은 자기 존재를 긍정하라는 말 이외의 다른 게 아니다. (중략)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외면한 채, 타자와의 불가능한 동화만을 꿈꾸며 시간과 기력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존재의 가능성을 충분히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으로 당당히 남아 있는가. -70쪽
내가 이 세상과 진정으로 화해하기 위해 지금 멈춰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제 시작해야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105쪽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소유 앞에서 주저한다. -114쪽
시선이 비켜서면 마음도 비켜서게 마련이다. -124쪽
사람들은 '놓쳐버린 열차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쏠려 있거나 '새로 도착하게 될 열차에 대한 상상'으로 들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서 있는 현재라는 시간의 플랫폼을 바라보지 못하고, 역사 뒤로 늘어선 나무, 그곳에 불어오는 바람, 쏟아지는 햇살,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벌레들을 보지 못한다. '이미 없는 열차'와 '아직 없는 열차' 때문에 현재 있는 플랫폼과 역사의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없는 것 때문에 있는 것을 놓치는 셈이다. -135쪽
기술은 살아남는 방편에 불과하다. 예술은 전혀 다른 것으로서, 그것은 살아가는 삶 자체다. (중략) 삶의 예술에 눈 뜨는 것 혹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정직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172쪽
춤은 고통과 권태와 피로로 부대끼는 삶이 생동하는 육체로써 다시금 싱그러운 긴장과 탄력을 회복하는 몸놀림이고, 대지와 하늘과 바람 속에서 내가 아직은 이토록 건강한 몸으로 살아있음을 자축하는 신명에 찬 몸동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228쪽
조너선 리빙스턴만은 오직 나는 것 자체를 한없이 사랑해서 날았다. 낢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자신이 갈매기임을 긍정했고 자신의 날개를 신뢰했으며 또한 그러한 날개로 날아다닐 저 무한한 공간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너선 갈매기의 낢이 어찌 단순한 날개짓이겠는가. 그것은 그대로 니체가 말하는 삶의 거룩한 긍정으로서의 춤이다. -233쪽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중략) 본능적이고 단순하고 직접적인 의식이 섬세해지고 복잡한 성숙된 의식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 깃들어 있을 뿐이다. -276쪽
인생에는 모험 끝에 얻게 되는 보물 같은 것은 없다. 그 편력의 험난한 과정에서 다채롭고 풍요해지며 아름다워지는 삶밖에는. -288쪽
'글은 생각 없이 써야 한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글은 손으로 써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손이다. 이 때 손은 단순히 글쓰기를 수행하는 신체의 일부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머리를 굴리느라 휘어져버리기 전에 솟구쳐오르는 언어들을 다침 없이 드러내주는 글쓰기의 진정한 주체다. 손이 머리에 복종하고 만다면 글에는 반드시 어떤 억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머리가 손에 복종하면 가슴에서 솟구치는 언어를 지킬 수 있다. 결국 머리 안에 손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손 안에서 머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생각 없이 쓰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298쪽
이해 불가능한 것은 해석 불가능한 것이고 해석 불가능한 것은 허용 불가능한 것이다. -322쪽
사랑은 휴대전화를 눌러대거나 기도하거나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다. 상대를 위해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이다. -329쪽
결국 인식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 나와 상대가 함께 얽힌 종횡의 맥락을 아는 것이다. 반성은 특히 그것을 흘러간 시간의 지평 위에 되려 놓고 보는 것이다. 인식과 반성이 결여될 때 우리의 사랑은 도구적 사랑, 쾌락적 사랑으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시나브로 내몰린다.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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