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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12
에즈라 잭 키츠 글.그림, 김소희 옮김 / 비룡소 / 1995년 12월
평점 :
늦게 태어난 막내 아이가 아니었으면 난 아마 이 책을 다시 펴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빨간 옷을 입은 자그마한 흑인 꼬마, 피터, 이렇게 다시 만나 반갑다.
에즈라 잭 키츠, 소수민족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낸 폴란드계 유대인. 뉴욕 부르크린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흑인 꼬마를 주인공으로 그려진 그림책이 밝고 환하고 따스하다. 늘 색안경을 끼고 유색인종을 바라보는 미국 백인 사회에다 대고 "우리도 이렇게 밝고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그림책이다. 1950년대 반유대적 사회 분위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티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는 "Jacob Ezra Katz"라는 자기 이름을 버리고 "Ezra Jack Keats"로 바꿔야 했던 아픔이 이 그림책으로 승화된 듯.
하얀 눈이 내린 어느 날 아침, 꼬마 피터는 빨간 코트를 입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길조차도 눈에 파묻혀 사라진 아침. 피터는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이렇게 저렇게 남기며 걸어보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막대로 건드리다 쏟아지는 눈을 뒤집어 쓰기도 한다. 아직 어려서 형들의 눈싸움에 낄 수 없는 피터는 눈사람도 만들고 눈 위에 벌러덩 누워 눈천사를 만들고 눈더미 산 위로 올라가 미끄럼도 타며 혼자서 즐긴다. 에즈라 잭 키츠는 하늘을 마블링 기법을 써서 역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주목을 받는다는데 피터가 눈더미 산에서 미끄럼을 타는 그림에서의 하늘이 바로 그 기법인지 모르겠다. 마블링 기법이라기 보다 솜이나 한지 분위기가 나는 듯하기도 하고.. ( 아, 나의 이 짧은 미술 지식이 한탄스럽다. )
집에 돌아가기 전에 눈을 꼭꼭 뭉쳐서 주머니에 넣는 피터. 내일도 또 눈을 가지고 놀 생각에 즐겁기만 하다.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도 즐거웠던 이 눈 내린 오늘이 자꾸자꾸 생각난다. 잠 자기 전 꼭꼭 뭉쳐서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가지고 온 눈덩이를 찾아보니 다 녹아 버렸다. 피터의 슬픈 마음이 배경의 검은 점으로 내려 앉는 듯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분홍빛 벽을 배경으로 하얗고 고운 눈이 다시 펄펄 내리고 있다. 창문으로 두 손을 번쩍 들고 미소짓고 있는 피터의 표정이 사랑스럽다.
너댓살 아이의 고운 감성을 따뜻하고 밝은 색채로 담아 낸 (심지어 쌓인 눈 조차도 따뜻한 분홍빛을 품고 있다.) 작가의 마음이 포근포근하게 전해지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쩌다 흑인 꼬마와 마주칠 때 피터를 상상하고 미소를 보내게 되지 않을까.
프로스펙트 (우리나라 어느 스포츠 용품 브랜드 이름하고 비슷하군) 라는 공원의 놀이터에 피터와 윌리(<피터의 편지>에 나오는 피터의 개 이름) 청동상과 피터의 의자가 있다는데, 따뜻한 봄에 그림책 속이 아니라 놀이터의 왁자한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피터를 만나보는 정취가 상상만으로도 꽤 근사할 것 같다.
정답고 귀여운 피터를 만난 오늘 아침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