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10까지 사랑의 편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
수지 모건스턴 지음, 이정임 옮김 / 비룡소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어네스트는 잘생긴 우등생이다.  주변에는 어네스트에게 어떻게 해서든 호감을 사보려는 여자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인기남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나가는 남자 아이의 실제의 일상은 정말 딱하기만 하다.

어네스트는 할머니 두 분과 함께 산다.  한 분은 집안일을 맡아주시는 원리원칙주의자 제르멘 할머니이고, 다른 한 분은 말씀도 없고 1차세계대전에서 죽은 아버지와 2차세계대전으로 죽은 남편을 기억하며 그저 조용히 사는 친할머니다.  엄마는 어네스트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빠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어네스트가 태어난지 사흘만에 집을 나갔다.

어네스트는 그렇게 잿빛 침묵이 안개처럼 서려있는, TV도 전화도 없는 단절된 공간에서 주어진 메뉴대로의 식사를 하고 언제나 똑같은 길로 학교와 집을 오가고, 군말없이 매일 파란 사과 하나를 간식으로 먹고, 쇼핑몰도 레스토랑도 가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승강기조차도 타 본 적이 없는 고독하고 무능력한 아이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승리"란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빅투와르라는 여자아이가 전학을 온다.  빅투와르는 거침없이 앞으로 12년 후엔 어네스트랑 결혼 할 거라고 씩씩하게 선언하고 어네스트의 잿빛공간을 침범해 들어와서는 어네스트가 얼마나 형편없는 열등생이었던가를 깨닫게 한다.  빅투와르의 밝고 경쾌함에, 그 씩씩함과 억척스러움에 어네스트와 어네스트와 집이 변하기 시작한다.

어네스트의 "과묵하기만 했던 마음이 농담을 하지 않나, 소리 하나 없던 마음이 온갖 신기한 소리들을 전해 오질 않나, 질문을 받기만 하던 마음이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할머니들의 눈엔  '호기심이, 눈에 불을 켜게 만드는 바로 그 삶의 활기'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네스트 집에 몰아친 변화의 바람은 그것으로 끝나질 않았다.  열혈여아 빅투와르에게는 열 세명의 남자 형제들이 있었고 열 일곱명이 북적거리는 빅투와르네 집의 시끌벅적한 삶의 활기는 어네스트네 집으로 그대로 전염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네스트는

"인생이란 게 이렇게 놀라운 일들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루하루가 제각각 이렇게 놀라운 일들을 토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빅투와르라는 초대형(XL) 놀라움이 뛰어들고 나서부터, 그 뒤를 이어 스몰(S), 미디움(M), 라지(L) 사이즈의 놀라움들이 무더기로 정신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어네스트는 왕성하게 솟구치는 식욕과 함께,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상황들에 대해 새록새록 호기심이 더해져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고 말한다.  그 뿐 아니라 자기는 그동안 "잠자는 숲 속의 왕자"였고 "오로지 공주가 나타나 자기에게 제 2의 탄생을 가져다 줄 날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살아왔노라고 고백한다.

재밌다.  늘 연약하고 아리따운 공주가 항상 용감하고 잘생긴 왕자에게 구원받아야 했던 동화가 멋지게 비틀어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밝고 경쾌한,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청소년판 로맨틱 코메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정겨운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지!  이렇게 따뜻한 이웃들과 마음을 맞대고 살아가는 행복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빅투와르네 엄마 아빠를 비롯한 열 일곱명의 식구들도 그렇지만 어네스트네 집안일을 맡아 해주시던 제르멘 할머니 대신 집안 일을 해주려고 온 앙리에트 누나와 그 엄마 자네트 아줌마까지도 어찌나 정겹고 활력이 넘치는지.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같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그저 줄거리를 따라 아무 생각없이 흘러가게 놔두지도 않는다.  공부 잘 하고 잘생긴 우등생이지만 실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선 무능한 어네스트를 통해서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우리네 교육풍토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게 했고, 용기있게 삶과 부딪쳐 나가는 것, 다른 사람의 불행한 삶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우리에게 삶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유머와 익살과 재치에 버무려 들려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이 가진 밝고 환한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번역을 맡은 이정임님의 실력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아니었다면 작가의 이 재치있고 유머스러운 작품이 내게 이리도 잘 와닿지는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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