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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ㅣ 샘터 우리문화 톺아보기 1
류정월 지음 / 샘터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책첫머리에 김열규 교수의 추천의 말에 등장한 송강가사로 유명한 정철이 쓴 시를 보고는 "으악~~"했다. 세상에, 점잖은 분인 줄 알았는데 기생과 어울려 이런 노골적으로 19금스러운 시를 지으며 놀았다니 정말 의외였다.
유교적 가치관과 규범으로 똘똘 뭉쳐진 조선시대의 근엄한 사회에서 우스개는 점잖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마땅히 양반계급에선 발을 붙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당시에도 우스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서거정이나 강희맹같은 대가들이 친히 우스개책을 썼다는 걸 알게 되면서 처음 책을 펼쳤을 때와는 달리 서서히 책에 적응이 되고 오히려 조선사회의 다른 면을 보게 된 것 같아 즐거웠다.
조선시대의 우스개를 통해 웃음에 대한 논리와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이 책으로 인해 주로 역사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던 조선시대라는 한 시대를 좀 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같다.
저자가 여성이라서 그런지 우스개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되고 그릇된 시각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어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엄격한 유교의 잣대에 맞춰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의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도포자락 아래 숨겨두었던 욕망과 그 욕망이 불러낸 성적 환상들이 스며 있는 우스개들을 읽으며 현대의 남성들이 즐기는 음담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놀라기도 했다. 남성우월주의가 짙게 배어있는 조선시대 가부장사회의 전통을 벗어나기가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의 지나친 오버일까?
책이 단순히 음담에 해당되는 우스개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선적인 양반사회를 꼬집고 있기도 하고, 권력을 쥔 자의 횡포를 고발하기도 하고, 조선시대 주당들의 거나한 술자리가 펼쳐 보이기도 하고, 양반가의 남성들을 골탕먹이는 기생들의 지략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우스개보다 근대로 넘어와 잡지에 소개된 우스개들이 더 생뚱맞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근대의 신여성을 꼬집고 비틀어 웃음거리로 삼은 笑話들이 여전히 남성 우월의 여성 비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언제쯤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노리개로 삼는 습관이 없어질런지..
우스개 속에 여러가지 차별과 편견이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스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난 저자의 마무리 글에서 만족할 만한 답을 얻었다.
"웃는 순간, 나는 현재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진정 의미 있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바로 이 순간임을 새삼 깨달았다. 과거 공부에 지친 옛 선비들이 졸음을 쫓으려 잠시 우스개집을 열었을 때, 그들이 보낸 그 달콤한 순간은 세상을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스개는 단순한 재미를 제공하는 데에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그런 감각을 우리는 행복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중략...) 그러나 우스개의 존재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때로는 에둘러 가는 것이 지름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래된 웃음에서 배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