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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낮은 집 ㅣ 마음이 자라는 나무 1
임정진 지음 / 푸른숲주니어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시간을 거슬러 내 어린시절로 돌아간다. 좁은 골목길, 동네 꼬마들이 나와 팔방도 하고 빨간 벽돌 조각 갈아서 고추가루 만들고, 엄마 아빠가 피곤하실 때 마시던 박카스 뚜껑 모아서 소꿉장 삼고, 한발뛰기 각기팔방하며 뛰어놀고, 돌부로 길바닥에 낙서를 하던.. 아침 저녁으로 연탄 갈던 아빠의 젊을 적 모습도 보이고, 장판이 까맣게 타도록 뜨거웠던 아랫목에 비해 써늘했던 윗목, 아랫목 한켠에 식지말라고 이불덮어 묻어놓았던 밥주발들,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가족들의 조끼며 스웨터를 마련하려고 부지런히 뜨개질을 하던 엄마의 모습도 보인다.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덕에 단수가 되어도 물걱정이 없었던 것도 좋았지만 어린 나에게는 단수만 되었다하면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며 물지게 이고 우리집 마당으로 모여들었던 게 더 즐거웠었다. 그 때는 예쁜 상자 구하기가 쉽지 않았더래서 동네 단골 약국에 가서 약상자들을 얻어와 만들기를 하곤 했었는데...
양옥집이 드물었던 시절, 그래, 이 책대로 집들은 낮은 지붕을 옹기종기 맞대고 있었고, 골목 안 이웃들은 여름이면 돗자리 펴고 골목에 앉아 마늘도 까고 배추며 고구마 줄기도 다듬곤 했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고구마 줄기 하나씩 나눠들고 똑똑 꺾어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서로 뽐내고 즐거워했었지. 그 때 같이 놀던 이웃집 언니는 지금 어디서 뭘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집에 TV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결혼할 거라고 떠들고 다니던 옆집 오빠는 어떤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을까.. 날 귀여워 해주시던 목공소집 아저씨는 건강하게 살아계실까? 그래, 구멍가게 아저씨,, 라면땅이라도 사러 가면 늘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었지. 말도 안되는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해서 어린 내가 얼마나 당황했었던지.. 늘 콧물을 흘리고 다니던 동갑내기 그 녀석은 좀 의젓해졌을까? 딱지치기 하면 늘 나한테 졌었는데.. 교장선생님 댁 담너머로 들리던 고운 피아노 소리도 생각나네.. 결국 엄마한테 나도 피아노 배우게 해달라고 졸라서 교장선생님댁 대학생 언니한테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었지. 문구점 아줌마 다리는 정맥류 때문에 핏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었지. 어린 나는 그 정맥류가 의미하는 노동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징그럽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게 모두 까마득한 추억이 되어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낡은 필름을 영사기에 걸고 돌리는 것처럼 그리운 빛으로 떠오른다. 작가의 "추억의 갈피들을 약간의 상상과 더불어 이어" 써나갔다는 이 책은 1970년대 사람들의 풍경을 아는 이들에겐 더없는 그리움과 회상을 선물해줄 것이다. 그래서 책의 줄거리에만 빠져드는 게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가버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가슴 속에 따뜻함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런데 요즘의 십대들이 이 책을 읽으면 나와 같은 걸 느낄 수 있을까? 아직은 추억도 그리움도 충분히 쌓이지 않은 나이에, 인터넷 게임과 채팅에 더 익숙하고, 과도한 입시경쟁에 스트레스를 받고, 학교와 학원에서 바쁜시간을 보내야 하는 요즘의 십대들에겐 궁상맞은 옛날 이야기쯤으로 비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그래도 책의 주인공인 혜진이가 강희언니의 눈물을 나누고, 소년가장인 명철이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고, 남동생의 유산으로 아버지가 짊어진 무거운 삶의 무게를 느끼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삶의 부정적인 편린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같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 공감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그건 정이 부족하고 물신주의가 만연한 삭막한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좀더 깊은 시선으로 자기와 타인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