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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나를 입은 어느 날 ㅣ 반올림 9
임태희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11월
평점 :
얼마 전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스타일북>이라는 책을 사달라고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외모나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그렇다고 책까지 사서 보겠다고 할 것 까지야.. 싶었다. 어쨌든 그만큼 사춘기 여자아이들에게 '옷빨'은 중요한 것이 되었나 보다.
그런 딸이 재미있게 여길 것 같아서 고른 책 <옷이 나를 입은 어느 날>. 십대소녀의 이야기라서 그럴까? 무척 경쾌하고 통통튀는 느낌의 책이다. 이야기의 전개 속도도 무척 빠른 편이라 지루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읽혀진다. 바쁘게 살고 있는 요즘의 십대들 입맛에 딱 들어맞는 책인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자면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옷'이라는 게 단지 신체를 보호한다거나 직업과 신분을 나타낸다거나 아니면 어떤 특정한 집단의 소속임을 드러내는 기능을 넘어선지 오래다. 오늘날의 옷은 자기표출의 수단이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튀지않는 무난한 것을 즐겨하던 세대라면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남들과는 다른 것, 나를 남들과는 다른 존재로 보이게끔 튀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개성표현의 세대다. 그런 세대의 아이들이 교복이라는 제복에 갇혀서 입시라는 숨막히는 제도에 눌려서 살아간다. 이 책 속의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독서실의 시간 체크기나 감시카메라보다도 더 끔찍한 것이 교복이라고 말한다. '교복만큼 확실한 족쇄는 없다.'고.
그러나 나는 '거짓말이 참말보다 쉬워지'고 '앞뒤 잴 것 없이 네-네-하면 인생이 몰라보게 편해진다'는 걸 알아버린 저항의 힘을 잃은 아이다. 그저 세일러문처럼 변신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상하면서 '옷'에 집착하는 아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세일러문은 변신하고 나면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몰라보지만 난 이렇게 기를 쓰며 변신한 뒤에도 아는 사람은 알아본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나'는 옷에서 자유와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을까? 변신을 해도 아는 사람은 다 나를 알아보는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책의 제목처럼 이미 주인공 '나'는 옷을 선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옷에게 선택당하는 입장이라는 걸 어느날 갑자기 깨닫게 된다.
한동안 44사이즈 옷에 몸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TV에서 흘러나왔었다. 그냥 보기에도 충분히 날씬한, 아니 말라 보이는 여자가 44사이즈 청바지를 방에 걸어놓고는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옷이 '나'를 입는다는 말이 무척 정확하고 예리한 사회비판적 발언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모유를 먹여 키우다 보니 나중에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셔츠들은 젖얼룩이 생겼거나 아이가 묻힌 얼룩자국이 묻어 있었고 체형이 바뀌어서 편한 바지가 없었다. 결심을 하고 옷가게를 찾아 들어갔는데 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유행이 바뀌어서 가게 안엔 쫄티들만 걸려 있는 것이었다. 결혼 전에는 아니, 첫 아이를 낳기 전에는 박스티가 유행이었는데... 결국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나온 경험이 있다. 옷에게 거부당한 꼴이었다. 지금도 옷을 사는 건 나에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유행에 맞추어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내 성격상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런 내가 책 뒷편에 실린 저자의 말을 읽고 씩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저자 임태희씨가 자기를 소개한 글엔 '일주일 넘게 입고 뒹군 헐랭이 바지(허리에 고무줄이 신나게 들어가 있다)와 슬슬 냄새가 나기 시작한 볼품없는 티셔츠(목부분이 즐겁게 늘어나 있다)를 걸친 시대착오적인 몸매의 소유자이자 골방패션의 선두주자'라고 되어 있었다. 어쩜 그렇게 나랑 닮았는지~!!!
또한 저자는 '날개옷'('나'의 친구)의 입을 통해 말한다. '핵심은 자신감이야. 자신감도 일종의 옷이거든. 그 옷은 사람의 결점을 커버해 줄 뿐 아니라 결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지. '자신감을 입은 사람에겐 결점이 없다. 개성이 있을 뿐이다.'라고.. 백번 공감하는 말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니메이션으로 보았을 때, 물론 원작과 내용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노인이 되어버린 주인공 소피가 열정과 자신감에 차 있을 때는 젊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딸의 책상위에 이 책을 슬그머니 올려놔 줘야겠다. 자신감을 먼저 입으라고, 그래야 네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내 대신 이 책이 말해 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