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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그림의 미술사 - 바로크에서 현대까지 미술사를 바꾼 명화의 스캔들
조이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80년대 말이었을까? 현대미술관으로 뉴욕현대미술전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그 때 본 다른 작품들은 거의 다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데 앤디워홀의 작품 (마릴린 먼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과 신디셔먼이라는 사진작가의 작품만 기억난다. 신디셔먼의 사진은 작품집에서 보며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난 크기의 대작이었던 데서 오는 충격이었던 것 같다. 신디 셔먼이 나와 같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곱상한 사진이 아니라 꽤 실험적인 사진(내가 생각하기에)이어서 사진집에서 볼 때도 인상적이었는데 거대한 작품을 앞에 두고는 감탄에 감탄을 마지 않았다. 이래서 실제 작품을 봐야 하는 거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워홀의 작품은? 그 생경함 때문에 기억이 난다. 전시관을 보다가 난데없이 생뚱맞은 마릴린먼로. 그것도 갖가지 원색으로 똑같은 마릴린먼로를 여러 장 이어붙인 듯한... 실크스크린이라고? 그건 미대 다니던 오빠들이 포스터 작업 같은 거 할 때 쓰던 방법이었는데.. 오빠가 밀대로 실크스크린 물감을 밀어서 종이에 찍어내면 나는 그걸 한 장 한 장 잘 마르게 펼쳐 두곤 했었는데.. 이게 대체 뭐가 좋은 작품이라는 거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나 보수적인 부류에 속하는 인간형인가 보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시도, 새로운 모험 따위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걸 보면 말이다.
여기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라는 책에는 전통과 보수, 고전주의 정신, 기존의 사조흐름 따위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온갖 비방과 욕설을 뒤집어쓰고 스캔들에 시달리면서 새로움을 창조해나갔던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창조력이 부족한 단순 무식한 자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던 카르바조, 예술의 척도를 전통의 권위에서 개인의 주관성으로 옮겨온 낭만주의의 프리드리히, <올랭피아>, >풀밭위의 식사> <나나>같은 전통적인 누드화와 차별되는 작품때문에 또는 새로운 색의 시도로 구설수에 올라 괴로워했으나 종국엔 '인상주의를 가능하게 한, 미술사에서 기술적으로나 묘사방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여 20세기 회화를 전면적으로 바꿔놓은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마네, 얼치기에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나치의 예술정책에 희생되어야 했던 뭉크, 레디-메이드 대량복제예술의 시대를 여는 뒤샹과 워홀이 그들이다.
전통적인 흐름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뉴욕현대미술전을 본지 20 여 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나는 다다이즘이나 아방가르드 작품에는 약간 소화불량 증세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뒤샹이나 워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들의 예술관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때 작품은 작가의 지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관람자 또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지적인 탐구와 놀이를 해야 한다. 그의 예술론에 유희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라는 말은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대량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예술은 더이상 숭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 - 예술가 자신까지도 - 상품으로 존재하며 예술은 돈을 버는 사업이라는 말은 수긍을 하면서도 어쩐지 씁쓸해진다.
난 아직도 고흐나 르노와르, 샤갈, 모네 등의 작품에 더 끌린다. 사진작품도 솔직히 말하면 만레이나 신디셔먼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유진스미드의 인간가족같은 것들이 좋고,, (만레이의 <유리눈물>이란 작품은 인상적으로 남았지만) 물론 진품은 구경하기도 힘들고 기껏해야 인쇄된 종이조각을 보고 흐뭇해하는 수준이다. 결국 고상한 척 하면서도 대량복제시대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