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 뒷표지에 적힌 글 "캐나다를 향해 가던 화물선이 대양 한가운데서 침몰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열여섯 살 인도 소년 파이는 간신히 구명보트에 오르지만 보트에는 하이에나 한마리, 오랑우탄 한마리,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 그리고 200킬로그램이 넘는 뱅골 호랑이 한 마리가 올라타 있었다 오, 신이시여...."

이 부분을 보고 난 상상했다.  뭐, 이렇게 어이없고 황당한 설정이 다있어? 이것도 요즘 유행하는 환타지 동화 종류인가 보구나. 틀림없이 파이라는 어린 소년이 동물들과 텔레파시같은 게 지지직 하고 통하면서 보트위에 에덴동산같은 공간을 꾸며가는 모양이지..아니면 함께 작가의 상상력이 펼쳐 낸 섬같은 데에서 함께 모험을 하거나.  이렇게 생각했다. 

책의 앞부분 , 파이라는 소년은 동물원 집 아들이였다.  (동물원 집 아들이라.. 동물들과 교감을 주고 받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군..)  거기다 이 파이라는 소년은 힌두교 신자이자, 천주교 신자이며 이슬람교도이다.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은 무신론자다. 이런 상황을 어이없어하는 사람들에게 파이는 대답한다.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예요."라고,, 한 술 더떠서 '힌두교도들도 사랑의 용량에 있어서는 대머리 기독교도들과 같고, 이슬람교도들이 모든 사물에서 신을 보는 방식이 수염 남 힌두교도와 같으며, 기독교도들이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은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와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난 생각했다.  서너가지 종교를 한꺼번에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세계역사에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기심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저지른 만행이 한두가지던가.  사람들이 서너가지 종교를 한꺼번에 가진다면 세계역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목요일은 힌두사원에가고 금요일엔 이슬람사원에, 토요일은 유대회당에, 일요일엔 교회에가고, 월요일엔 절에 가고... 일주일이 정말 거룩하고 성스러울 것 같다.  파이는 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소년이다.  세상에 대한 경외감과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힘의 원천은 아마 그런 남다른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여기까지 읽을 땐  작가가 꽤 신선한 발상을 했군 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문제의 화물선 침몰 사고 이후 이야기는 웃을 수 없게 전개된다.  이건 환타지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벌이는 열여섯살 소년 파이의 227일간의 처절하고 잔인한 모험담이다.  아니 모험담이라는 말도 이 책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 낭만적이다.  채식주의자였던 파이는 생존을 위해 변한다.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파이를 생존하게끔 만드는 힘이 된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께. 약속한다구!"

또 하나의 힘을 이야기 하자면 그건 파이가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열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족을 잃고 홀로 조난을 당한 어린 소년이 극심한 공포와 절망 속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신 뿐이었을 것이다.  '신이 나와 함께 하는 한 난 죽지 않아'라고 외치면서 '끊임없는 고난 속에서 슬프고 절망적일 때, 신께로 마음을 돌려야 했다'고 고백한다.

삶이 질기고 든든한 등산용 베낭처럼 우리 등에 착 달라붙어 메고 다닐 수 있을 때라면 몰라도 여기엔 환타지가 끼어들 틈이 없다. 읽으면서 삶이라는 것이 서늘한 칼자루 같이 느껴졌다.  더없이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칼 한자루.

우리도 매일 보트에 오른다.  늘 누군가가 함께 타고 있다.  보트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삶이라는 게 늘 그랬으니까.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처럼 내 삶에 위협적이지만 그래서 더 긴장하고 열심히 살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하이에나처럼 탐욕스러운 사람도 있다.  때론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냉정하고 잔인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도 생기고, 비상식량처럼 소중한 것들을 함께 나누어야 할 때도 있다.  바다 위로 벼락이 떨어지고 상어 떼가 나타나고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칠 지도 모를 일이다.  넓은 태평양 작은 보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과 절망을 이겨낸 파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여가며 놓아버리지 않끝까지 싸우는 것,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 짓는 것, 그것이 파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삶의 비법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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