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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십대나 이십대 시절에 <데미안>이나 <나르시스와 골드문트><싯다르타>를 읽으며 헤르만 헤세를 알았다. 헤세 특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끌려, 혹은 헤르만 헤세라는 명성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읽으면서 꽤 마음을 설레었던 것 같다.
이제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헤세와 무릎을 마주했다. 노인이 된 헤세의 우울하고 약한 모습이 보인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내면의 울림이 강한 글을 썼던 헤세이니만큼 두 번에 걸치 세계대전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그가 정원 일을 하면서 느꼈다는 즐거움이 나에겐 참 쓸쓸하게 들린다. 꽃과 나무를 돌보면서 채소를 키우고 수확하면서 또는 폭풍에 뿌리를 드러내고 그 삶을 마감한 커다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는 나름대로 세상의 광풍에 찢어진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노인 헤세의 모습에서 나는 연민을 느낀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를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찌되었건 그는 전쟁의 광풍에 직접적인 희생을 당하진 않았으니까. 그저 정원을 가꾸고 작품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전쟁의 소용돌이 바깥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낸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왜 총을 잡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없다. 왜 독일인으로서 나치의 횡포에 더 강력하게 대항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사람이 다 강한 영혼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된다는 자괴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헤세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수백명의 이주자들을 받아'들이고 '집단적이고 파국적이 권력에 대항해서 헤세는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능력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썼다'고 하지 않는가.
자, 책 외적인 건 덮어두자. 그는 글을 통해서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물들에게까지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그 깊은 애정 때문에 광폭해진 세상을 못견뎌 한다.) 그는 정원 일을 통해서 자기의 내면에 가 닿기를 바랬고, 꽃과 나무들을 돌봄으로써 삶과 죽음을 맑게 들여다 보고자 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지친 자기의 몸과 영혼이 회복되기를 바랬다. 세상이 자기가 보내는 메세지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바랬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서두르며 난폭해지냐고 책망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내면에 간직한 심연을 찾아주길 바랬던 건 아닐까 싶다. 작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눈맞추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테니까. 그것이 헤세 나름의 문학적 저항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헤세가 낙엽을 태우거나 채소를 수확하고, 고양이와 마주보며 웃는 사진들은 그의 글들이 더 가슴에 와닿게 한다. 어쩐지 사진 속 그의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헤세가 그린 그림이 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한다. 책의 뒷편에 '꿈의 집'과 '아이리스'라는 제목의 단편이 두편을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도 있다.
현대의 복잡한 문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우리들에게 헤세의 글은 그 반향이 크다 할 수 있겠다. 예전에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듣고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정말 우리에겐 소박함이나 자발적 가난의 실천이 필요한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지금의 모습이 너무 어지럽고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려면 치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다. 아연실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