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룬과 이야기 바다
살만 루시디 지음, 김석희 옮김 / 달리 / 2005년 1월
구판절판


아, 필요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에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성을 잃어버리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는 않습니다. -43쪽

어떤 사물에 이름을 주고, 명찰을 붙이고, 명칭을 부여하는 것, 이름 없는 무명 상태에서 구해 내는 것, 요컨대 사물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사물을 존재시키는 방법이야. 이 경우에는 새나 '상상 속의 비행 유기체'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방법이지. -80쪽

지구의 어떤 도구로도 이바구를 탐지할 수 없어. 게다가 이바구는 지구를 한 바퀴 돌 때마다 궤도가 1도씩 바뀌기 때문에, 360개의 궤도로 지구의 모든 지점을 가득 채우지. 이렇게 궤도가 달라지는 것도 지금까지 이바구가 발견되지 않은 이유의 하나야. 하지만 궤도가 바뀌는 데에는 중대한 목적이 있어. '이야기 물'은 지구 전체에 골고루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이지. 부릉! 부르릉! 이바구는 고속으로 돌아야만 그 일을 해낼 수 있어. -87쪽

그 많은 흐름이 저마다 다른 색깔이었고, 놀랄 만큼 복잡한 태피스트리처럼 서로 얼기설기 엮여 있었습니다. 만약은 그것이 '이야기 흐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흐름 한 가닥이 이야기 하나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부류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이야기와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이곳에서 전부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 바다'는 사실상 우주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야기가 액체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궁무진하게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자신을 새롭게 변형시키고, 다른 이야기와 결합하여 또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과는 달리 '이야기 바다'는 단순한 이야기 저장실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 바다'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94쪽

만약은 다구어들이 '배고픔의 예술가'라고 대답했습니다.
"다구어들은 배가 고프면 모든 입으로 이야기를 삼키기 때문이지. 그러면 그들의 내장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 한 이야기의 갈래가 다른 이야기의 착상과 결합하는 거야. 이윽고 다구어들이 야잇!하고 이야기를 뱉어내면, 그건 이미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로 바뀌어 있지. 이봐, 꼬마 도둑. 어떤 것도 무에서 생겨날 수는 없어. 어떤 이야기도 무에서 생겨나지는 않아. 새로운 이야기는 낡은 이야기에서 태어나지. 새로운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새로운 결합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술적인 다구어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소화기관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는 거야. -111~112쪽

이바구의 남쪽에 있는 '고전 구역'은 최근 들어 아무도 가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을 흐르는 옛날 이야기들은 이제 수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수다족이 어떤지는 너도 알겠지. 새로운 것, 늘 새로운 것만 찾아. 옛날 이야기에는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아."
그래서 '고전 구역'은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 흐름'은 '이야기의 원천'인 샘에서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흐르는 해류에서 오래전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112~113쪽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 돌리기 곡예와 비슷하다고 나는 늘 생각했지." 하룬은 마침내 소리내어 말했습니다. "허공에 수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띄워 놓고 빙글빙글 돌리는 거야. 솜씨가 좋으면 어떤 이야기도 떨어뜨리지 않아. 그러니까 공돌리기도 이야기하기의 일종이야."-143쪽

독은 '이야기 흐름'의 색깔을 죽이는 효과가 있어서, 다채로운 색깔들이 모두 칙칙한 잿빛으로 흐려져 있었습니다. '이야기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 박진감, 경쾌함, 생생함 - 은 색깔 속에 암호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색깔을 잃는 것은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의 바다가 온기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바닷물에는 사람을 환상적인 꿈으로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그 부드럽고 미묘한 수증기가 더 이상 피어오르지 않았습니다. -158쪽

'그림자-전사'의 칼춤을 구경하면서 하룬은 자신이 말려든 이 이상한 모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수다 나라와 잠잠 나라의 이 전투에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룬은 경탄했습니다. '수다는 밝고 잠잠은 어두워. 수다는 따뜻하고 잠잠은 얼어붙을 듯이 추워. 수다는 온통 시끄러운데 잠잠은 그림자처럼 조용해. 수다족은 바다를 사랑하지만 잠잠족은 바다를 오염시키려고 애쓰지. 수다족은 이야기와 말을 사랑하는데 잠잠족은 그런 것들을 증오하는 것 같아.' 이 전쟁은 사랑과 죽음의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하룬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림자-전사의 춤은 침묵도 나름대로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것, 몸짓도 말만큼 고상할 수 있다는 것, 어둠의 생물도 빛의 자식들만큼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하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수다족과 잠잠족이 서로 그렇게 미워하지 않는 다면 상대가 아주 흥미로운 존재라는 것을 실제로 깨달을 수 있을 텐데.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잖아.'-163쪽

게다가 잠잠 나라에서는 그림자가 제 주인이나 자아나 실체보다 더 강한 개성을 갖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림자가 앞에서 이끌고, 주인이나 자아나 실체가 뒤에서 따라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그림자와 실체나 자아나 주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요. (중략) 하지만 그림자와 실체가 진정으로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잠잠족의 평화는 곧 그림자들의 평화를 의미합니다.-170~171쪽

"하지만 세계는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카탐슈드가 대답했습니다. "세계는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어떤 세계요?" 하룬은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습니다.
"너의 세계, 나의 세계, 모든 세계." 카탐슈드가 대답했습니다. "그 세계들은 모두 지배받기 위해 존재하지. 모든 이야기 속에는, 바다의 모든 흐름 속에는, 내가 절대로 지배할 수 없는 세계가 하나 있어. 이야기 세계가 말이야. 내가 이야기를 증오하는 건 그 때문이야."-210쪽

수다군 쪽들은 이제 모든 것을 충분히 토론했기 때문에 열심히 싸웠고, 단결을 유지하면서 필요하면 서로 도와주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공통된 목표를 가진 군대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든 논쟁과 토론, 그 모든 개방성은 그들 사이에 같은 동지라는 강력한 유대감을 낳았습니다. 반면에 잠잠족 군대는 분열된 오합지졸로 드러났습니다. 그림자-전사 무드라가 예언했듯이, 그들 대부분은 실제로 반항적인 자기 그림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의 맹세와 비밀주의의 습관 때문에 서로 의심하고 불신했습니다. 그결과 잠잠족은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신했고, 서로 등을 찔렀습니다. -243쪽

"이것은 위대한 승리입니다." 늙은 떠버리 왕이 군중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바다가 바다를 망치는 적에 대해 거둔 승리일 뿐만 아니라, 잠잠 나라와 수다 왕국 사이의 새로운 우정과 개방이 우리 사이의 해묵은 적개심과 불신감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이기도 합니다. 이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255쪽

"해피엔딩은 이야기에서도 현실에서도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드물어. 해피엔딩은 규칙이 아니라 예외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지."-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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