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아이들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4년 5월
구판절판


"...... 야스코, 잘 생각해 봐.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는 건 도둑질을 한 사실이 아니라 도둑질을 한 뒤의 마음이야. 사람은 나쁜 짓을 하고 나면 반드시 뭔가에 기대려는 마음을 품게 돼. 실컷 야단맞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지지. 그게 바로 인간이 기대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증거야. 아이들도 나쁜 짓을 했을 때 야단을 맞고 나면 훨씬 즐겁게 놀지 않니? 어른들도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깊이 반성했나 보다 하고 안심하지.
하지만 양쪽 다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한 번 저지른 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선생님은 생각해. 그 죄를 평생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해. -52쪽

인간의 상냥함이나 낙천성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인간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다른 사람의 상냥함이나 낙천성을 흙발로 짓밟는 일일 것이다. -69쪽

러시아의 시인이자 아동 문학가였던 코르네이 추코프스키는 어린이 영혼의 뛰어난 특징, 곧 낙천주의를 이렇게 말한다.
" 낙천주의는 어린이에게 공기와 같은 것이다. 흔히들 죽음의 관념은 이 낙천주의에 큰 타격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이러한 비탄으로부터 자신을 꿋꿋이 지킨다. 어린이 영혼의 무기고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낙천주의를 지킬 수 있는 무기가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 어린이는 다섯 살쯤이면 생명이 있는 존재는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지만, 그 순간 자신만은 죽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려 한다. "-71쪽

사사오 스스무는 반항이라는 행동으로 자신의 내면 깊이 간직한 인간성과 상냥함을 끝까지 지켜 냈다. 그 아이의 상냥함을 보려 하지 않았던 교사들, 그 아이의 상냥함에 상처를 준 나, 그로 인해 우리는 지옥에 떨어졌다.
나는 그 아이를 통해 저항의 의미를 배웠다. "절망과 맞부딪쳐 이겨내지 않고서는 진정한 상냥함을 지닐 수 없다."는 노(老)철학자 하야시 다케지 씨의 말이 지금 이순간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새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나를 길러 준 상냥한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을 먹으며 살아왔다고.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은 아이들이었다. -93~94쪽

"아름다운 것은 말이지, 참고 참고 또 참았을 때 만들어지는 거야."-130쪽

이들은 하나의 생명은 다른 무수한 생명에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리라.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생각한다. 그런 세계를 삶 속에서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라고. 그 증거는 아이들의 표현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144쪽

아이들은 생명이란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평등하다고 여기고, 순식간에 그 생명과 우정을 쌓을 수 있다. 개나 고양이와도, 나비나 새와도, 풀이나 나무나 바람이나 눈과도, 온갖 자연물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아이들은, 그리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런 세계를 갖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에서 멀어졌을 때 인간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다. -146쪽

어린이는 작은 거인이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스스로 성장하려는 한없는 에너지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내가 어린이를 이런 존재로 보게 된 바탕에 오키나와가 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어린이가 어떻게 낙천적일 수 있는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어린이의 내면이 어떻게 상냥함으로 가득할 수 있는가. (중략)
진정한 거인은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며 그러기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인간이리라. -154쪽

어느날 마코토는 황당한 일을 벌인다. 갖가지 형태의 상자를 갖가지 끈으로 자유롭게 묶는 조형 놀이의 일종인 '묶기 그림' 시간이었다.
"뭐든지 묶어도 돼요?"
"응"
내가 대답하자, 마코토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코토가 하려던 일은 학교를 묶는 것이었다. 어이없어하는 우리를 곁눈으로 보면서, 마코토는 의기양양하게 학교를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나는 마코토의 행동에서 한없이 뻗어나가는 힘을 본다. 마코토의 생명력이 힘차게 약동할 때,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획득했을 때 연소되는 생명의 불꽃이다. 고통스러운 말이지만, 교육은 마코토를 짓누름으로써 그것이 비교육적 행위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159쪽

"<태양의 아이>를 완성했을 때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작품 속에서 내가 살고, 살아내고, 그리해서 생명이 끝난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글 쓰는 이에게 행복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162쪽

어린이, 그들은 당신에게는 단순히 미숙한 존재가 아닙니다. 가장 완벽한 창조물이며, 손상되어서는 안되는 인류의 원형이었습니다.
어린이는 결코 쓸모없는 존재이거나, 귀여운 애완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의미깊은 노동을 하는 지적 노동자이자 인류의 창조성을 보장하는 원동력입니다. 어린이는 낙천적이고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며,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 마음에 평화를 깃들게 하는 사상가입니다. 이런 어린이들에게는 가르칠 것보다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을 당신은 항상 지적했습니다. -103쪽

명령으로 아이들을 변화시킬 것이냐,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 자기 개혁을 일으키도록 아이들을 이끌 것이냐. 둘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교사에게 묻는 말이기도 한다. -193쪽

"아이들의 불행은 교사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아이들의 생활과 교사들의 생활이 분리된 지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게 문제예요."
"교사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차별에는 민감하지만, 교사 자신이 일상 생활 속에서 만들어 내는 차별에는 너무나 둔감해요."
"참된 상냥함은 절망을 헤치고 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습니다."-195쪽

창의성 없는 교사의 빈약한 수업이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아이를 공부하기 싫은 아이로 만들고 있다. -198쪽

하야시 선생님 수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로 하여금 빌려 온 지식을 버리게 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온전히 어린이가 주체가 돼 수업이 이루어졌을 때 성적의 좋고 나쁨은 사라진다는 하야시 선생님의 지론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208쪽

나는 오키나와에서,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생명의 의미를 배웠다.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무수한 생명이 그 생명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 내 생명 또한 다른 생명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이 인간의 성실함을 낳고 상냥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의 '생명' 속에는 수많은 '죽음'이 살아 있으며 온갖 고통과 번민이 깃들여 있다. 그것이 흙 속의 양분처럼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고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 생명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이제야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228쪽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까닭은 타인의 불행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르는 곳에
갖가지 인생이 있다.
너희 인생이
둘도 없이 소중하듯
너희가 모르는 인생도
둘도 없이 소중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모르는 인생을 사랑하는 일이다.

-<외톨이 동물원> 중에서-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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