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래서 이들(10대)은 자신들의 출구 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한다.문화를 통해서 자신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부모한테 반항하는 패턴은 똑같다.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백인 중산층 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아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는 부모 세대들을 대표하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모든 종교적 교리를 넘어서는 비백인적 행동, 다시 말해서 음탕한 흑인의 밑바닥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바로 리듬앤블루스였다.


(77)

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과 '블루스'는 모두 음암과 관련된 말이었다. 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 롤(roll)은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다. 아, 제주도에서는 '빠구리'는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119)

서태지와 아이들이 강렬한 기타 연주에 전통 악기를 조합한 <하여가>를 발표할 때 머리를 꼬아서 레게파마를 하고 나온 것은 레게음악을 한다는 상징이었다. 레게파마는 한국식 영어였고, 정확한 단어는 '드레드록'(dreadlock)이다. 드레드록은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신종하는 자입니다."라는 뜻이다. 라스타파라아니즘은 흑인왕국주의라는 뜻으로, 흑인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드레드록은 전사의 표식이다. "더 이상 백인의 지배를 거부한다.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사, 라스타다"라는 표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패션에는 다 이유가 있다.


(179)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댄스뮤직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197)

여기까지가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208)

바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정말 바흐를 잘 설명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큼 쓸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바흐는 진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는 아니었다.



(226)

요제프 2세는 그 오페라의 초연을 보고는 이렇게 딱 한 줄로 표현했다.


"친애하는 모차르트여,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




(235)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252)

상황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창작의 동기도 달랐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 작품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작품은 630개가 넘는 그의 작품 중 몇 개 되지 않는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위촉받은 것이나 후원자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베토벤은 서양음악사 최초로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작품을 쓴 작곡아였다. 물론 베토벤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와는 달랐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곡을 써놓고 난 뒤에 누군가에게 떠맡기듯이 헌정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 마음대로 헌정을 해놓고는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작품을 헌정하고, 돈을 요구해서 받아낸 것이다.




(266)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 연극은 끝났다."


베토벤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말이다. 폼 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죽기 하루 전에 한 것이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런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아깝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베토벤은 대체 뭘 아까워했던 걸까. 베토벤은 병석에서 와인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배달이 조금 늦었다. 그는 마지막 와인을 먹지 못하고, 아니 따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와인 도착이 너무 늦었다고 한탄하면서 죽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을 규정하는 말 중에 나는 롤랑 마뉘엘의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기술에서 의식으로 만든 사람이다."



(270)

모차르트는 죽기 3개월 전 자신의 친구이자 최고의 동료였던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썼다.


"쉬는 것보다 작곡하는 것이 덜 힘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한다."


굉장히 짠한 마음이 드는 말이다.



(272)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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