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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에게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란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깊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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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며,

기독교도들에게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수중에 많이 넣을수록 현대인의 마음에도

여유와 안정이 찾아들지요.

독실한 신자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 때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또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 투자로 주가가 오르면

우리는 돈이라는 신이 강림한 데 대해 엄청난 황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 지배력은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을 꿈꾸는 동안에만 작동합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이 순간은 마치 신이 떠나버린 듯한 무서운 효과를 낳습니다.

신의 은총을 찾아 다시 교회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돈이 떠나려는 순간,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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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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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드에게 파리는 악의 꽃, 다시 말해 '악'이며 동시에 '꽃'이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악'은 19세기 파리를 장악하던 산업자본의 힘,

다시 말해 '화페'의 신적 역량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상품'이나 '여성'을 상징합니다.

산업자본이란 '악'이 있기 때문에 상품이라는 '꽃'도 가능했겠지요.

보들레르가 파리에 대해 애정과 증오라는 이중 감정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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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리의 시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양 극단 사이에서 끝까지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념적으로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인의 숙명이 아니겠지요.

시인은 양 극단의 괴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철저히 응시하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표출하는 존재일 테니까요.

바로 이 점을 가장 잘 알던 인물이 다름 아닌 벤야민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보들레르에 집착하며 19세기 자본주의의 근저를 

보들레르와 그의 모순적 삶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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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알제리 농민들의 사유와 너무나도 흡사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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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류 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

파스칼만큼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철학자도 없지요.

...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사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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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가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노쇠함은 인간을 탐욕과 축재로부터 벗어나게 하지요.

물론 노쇠해져 죽음이 가까이 왔는데도 자본주의적 탐욕의 갈등이 꺼지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인 유하에게는 이 두 가지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그 빛을 발합니다.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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