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김명시의 말에 늦잠을 자던 알료샤가 슬그머니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세 여자의 대화 속에 레닌이나 스탈린이란 단어만 나오면 잔뜩 긴장하던 알료샤였다. 하지만 고리키라는 이름이 나오면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세 여자가 고리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했다. 알료사뿐만이 아니었다. 혁명 소설가 고리키에 대한 러시아인의 특별한 사랑은 석류 알갱이처럼 붉고 투명한 연어알절임과 당근 빛깔이 나는 묽은 야채수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것 같았다. 세 여자가 열차 식당칸에서 고리키 이야기를 하자 주변의 러시아인들도 알아듣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역시 레닌의 나라였다. 관공서 어디를 가도 1년 전에 사망한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150-151)

내가 보기엔 당신네 공산당도 오십보백보요. 나는 사서삼경도 못 읽는 촌부이지만 당신네들이 자유시에서 조선인 독립군을 수천 명이나 학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당신네들은 이번에 중국인 지주들을 때려죽이자는데, 아니 지금 우리가 못사는 게 정녕 그 사람들 때문이란 말이오? 오히려 반대가 아니오? 그 사람들 아니면 우리는 벌써 첫해에 굶어 죽었을 거요. 일본 놈들을 물리치자는 말까지는 알아듣겠지만 그 이상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소이다. 나는 자기네가 권력을 잡으면 다 될 것같이 떠드는 사람들 하나도 못 믿겠소이다. 어느 놈 할 것 없이 백성의 고통을 팔아서 권세를 누리려는 것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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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3-11-07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글귀가 인상적이네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bookholic 2023-11-07 20:54   좋아요 0 | URL
네.. 잘 모르고 있던 분을 새로 알게 된 점도 좋았습니다~~^^
 
















(8)

어째서 수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을까? 수학은 어떻게 동전과 유전자, 주사위와 주식, 책과 야구 등 서로 상관없는 영역을 연결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수학이 생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된다.


(35-36)

하지만 수학은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수학자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전략을 채용한다. 바로 심상 만들기다. 수학자들은 머리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 본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기술적 세부 사항들은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연결해 본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수학자들은 읽을거리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곳에서 즐거움, 유머, 결벽증 같은 불편함을 느낀다.


(68-69)

비안네가 드무아브르의 정리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비안네는 자신을 지식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던 만면 나의 통찰은 두꺼운 머리뼈 안에 갇혀 어눌한 혓바닥을 통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능력이 없는 수학자는 그날의 나처럼 자기 생각 속에 섬처럼 혼자 고립되어 남에게 닿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반면 자신이 아는 진리를 공유할 수 있는 수학자는 사람들에게서 감사의 마음과 영웅 대접을 받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121)

몸집이 큰 동물은 내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가 쉽다. 반면 작은 동물은 표면 비중이 높아서 체온을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다. 손가락, 발가락, 귀 등 표면 비중이 높은 사지 말단이 추위에 제일 약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추운 지역에 북극곰, 물개, 야크(티베트산 들소-옮긴이), 무스(북미산 큰 사슴-옮긴이), 전설 속 설인 새스쿼치 같은 대형 포유류만 사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표면 비중이 높은 생쥐가 북극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중위도 지역에 사는 생쥐도 열 손실을 감당하려면 하루에 자기 체중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어야 한다.


(219)

나는 뭔가 냉철하게 판단하고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야. 밀수업자에 제국의 반란군이지. 나는 총을 누가 먼저 뽑느냐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사람이야. 한 치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어야 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전쟁터의 참호에는 확률론 학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나는 평생 그런 참호 속에서 살아 왔고, 내 입장에서 보면 힘든 확률 계산은 마치 신경 쇠약에 걸린 황금색 로봇이 옆에서 계속 이렇게 떠드는 것만큼이나 거추장스러운 일이야. “맙소사! 선생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될까 모르겠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는 나와 비슷한 속성이 모두 조금씩은 있어. 아주 냉정하고 침착한 평가가 필요할 때는 확률론이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객관화된 수치로 정당화할 수 없는 자신감이 필요할 때가 있어. 본능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확률만 따지고 있다가는 때를 놓친다고. 가끔은 수치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냥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336)

과학은 결과 절대적 확실성이나 슈퍼맨 같은 완벽함으로 정의되었던 적이 없다. 과학에서는 언제나 건강한 회의주의 시각에서 모든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가능 중요했다. 이런 싸움에서 통계학은 없어서는 안 될 동맹이다. 통계학이 과학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데 한몫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한몫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459)

역사는 작은 규모에서는 단순하지만 큰 규모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인생 게임과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하루 단위의 작은 규모에서는 거칠게 요동치지만 장기적으로 평균하면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날씨와 비슷한 방식으로 카오스적일까? 아니면 역사는 코흐 곡선과 비슷해서 모든 수준에서 카오스가 등장하고 모든 규모에서 복잡성이 드러날까? 머릿속에서 이런 비유들이 서로 경쟁을 벌인다. 마치 한 화면에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파일 세 개가 동시에 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 세상은 어느새 파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양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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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렇죠. 로마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에 로마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합니다. 일례로 로마를 카푸트 문디라고도 부릅니다. 라틴어로 세계의 머리, 세계의 수도란 뜻이지요. 지금은 파리나 런던, 워싱턴 같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도시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세계 수도의 원조는 로마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였고,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그 수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라는 도시는 역사에 등장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도시를 손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터널 시티(eternal city), 즉 영원한 도시라는 별칭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요.


(32)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심장이자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죠. 건축은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수단이었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롭게 짓는 일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정점을 찍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79)

이 세상에 아름다움은 대칭(조화로운 비례), 그 자체보다는 그 대칭 위에서 빛나는 빛에 있다. 이것이 거기에 매력을 부과한다. 사실 살아있는 얼굴 위에는 아름다움의 광채가 더없이 빛나는 반면, 죽은 얼굴 위에는 비록 살과 그 대칭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해도 그 광채의 자취밖에 없는 것은 대체 왜인가?”

<플로티노스, 또는 시선의 단순성> p.86


(80-82)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생명을 끌어냈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회화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 중에 나는 대리석 안에 천사를 봤고 그 천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깎아 낸다.”라는 말이 유명한데요. 돌 안에 이미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 형상을 덮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각이라 생각했습니다.


(121)

완벽주의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를 프레스코 작업 기업으로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했어요.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르고 스케치를 한 후,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해야 했거든요.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석회 반죽이 마르기 전, 벽이 신선할 때 그려야 하는 일이라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미켈란젤로도 제작 초기에는 프레스코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합니다.


(143-144)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죽은 지 한참 후에도 라파엘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어요.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173)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교황의 주문인 만큼 교황의 의지가 분명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여기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담겼을 겁니다. 한 마디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는 교황의 취향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도 담겼다고 볼 수 있어요. 이는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을 이교도로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이들 역시 기독교의 영광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본다는 뜻이죠.


(195-196)

라파엘로의 묘비명에도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하노라라고 남겨져 있으니까요. 이건 교환청에서 일하던 당대의 인문주의자 피에트로 벰보가 쓴 글입니다. 자연이 라파엘로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좀 과장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화려했던 로마 르네상스의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365-366)

미켈란젤로는 1546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564년까지 1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매달리게 됩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간 중 미켈란젤로가 맡은 18년은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초에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했지만, 가장 중요한 뼤대를 만든 사람이 미켈란젤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크게 보면 이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성당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397-398)

당시 교황인 클레멘스 7세 역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거든요. 황제의 공격으로 로마가 쑥대밭이 되고 교황의 세력이 약해지자 교황의 지원을 받던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도 동시에 약화됐습니다. 이 틈을 노린 것이죠. 반대파들은 피렌체 시민을 선동해 메디치 가문을 또다시 내쫓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주문자였던 메디치 가문이 쫓겨났으니 헤라클레스 상도 제작이 멈췄지요.


(417)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아니었습니다. 우피치라는 단어가 이탈리아 말로 오피스란 뜻인데요. 코지모 1세는 사실 관공서를 지으려 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팔라초 베키오 옆에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새로운 오피스는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는 사무공간이, 3층에는 긴 화랑이 있습니다. 이 회랑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422)

확실히 그런 점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해요.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를 특징지을 때 적극적으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거든요. 소위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이 베네치아 등 다른 곳에서는 피렌체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매너리즘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양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학자고 많아요.


(442-443)

그런데 이 시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렌체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급속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독주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화제 체제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있었던 거죠. 그러너 16세기에는 피렌체의 지배권이 메디치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피렌체는 결국 공작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면서 1인 절대 지배 체제로 전환됐고 미술도 변화했죠.


(534)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등장해 다른 건축 양식과 경쟁하고, 한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는 데는 단순히 미적인 가치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작동하지요. 그렇기에 서양미술사에서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어떤 양식이 경쟁했고 채택됐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결구에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남을 보며 시작했던 이야기는 결국은 나를 보게 한다는 점이 바로 미술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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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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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한겨레문학상이 벌써 스물여덟 번째로구나. 얼마 전에 알라딘 홈페이지에 올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 보여서 클릭해보았단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읽은 책들은 나름 괜찮게 읽어서 클릭했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이 선정되었고, 먼저 읽은 이들의 평도 좋아서 읽어볼 만하겠구나, 하고 주문을 했단다. 지은이는 김희재라는 분으로 영화 음향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으로, 이번 소설이 첫 작품이라고 하더구나. 첫 작품부터 큰 상을 탄 것을 보니, 재능을 숨기고 살고 계셨나 보구나. 지은이 이력을 자세히 보니, 우리가 재미있게 봤던 영화 <리바운드>의 음향도 담당하셨다고 하더구나. 아무튼 이래저래 기대를 하고 책을 펼쳤단다.

아빠가 얼마 전에 읽었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누운 배>만큼의 재미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역시 책이라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있는 것 같구나. 기대를 좀 했는데, 아빠의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소설이었단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흡인력 있게 진격한다는 심사평을 받기도 했지만, 어느 부분에서 그런 심사평이 나왔는지 아빠는 찾을 수가 없었단다.


1.

기대보다 다소 실망한 만큼 빨리 짧게 이야기해야겠다. 주인공 황영경과 손부경은 아빠가 다르고 엄마만 같은 이부자매란다. 나이 차이도 11살이나 난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나 보니, 어렸을 때는 친하지 않았단다. 그러다가 둘의 연결점이었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자주 연락하곤 했어. 황영경은 외국계 중소회사에서 근무하던 중에 미국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시기였어. 그 곳에서 재미교포 루벤을 만났는데, 루벤은 영경에게 신비의 컨테이너를 소개해 주었어. 그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혹시나 그 컨테이너에서 소원을 빌어봤는데 진짜로 이루어진 거야. 그 컨테이너는 탱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단다. 영경은 루벤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나라에도 탱크를 설치할 수 있게 부탁했어.

그렇게 영경은 시골의 한 야산의 입구의 땅을 사서 컨테이너를 설치했단다. 그리고 탱크의 시대라는 커뮤니티를 만들러 예약제로 운영했어. 이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것을 이부동생 부경이 도와주었단다. 이 커뮤니티는 철저한 예약제로 이루어져 있고, 컨테이너에는 한 번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고, 예약한 사람과 시간을 넉넉히 두어 겹치기 않게 했단다.

….

그 탱크를 예약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희망이 간절한 사람들이겠지. 그렇다 보니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나와서 소설의 이야기가 좀 무거워지는 느낌이 있단다.

도선이라는 여자가 있었어. 대학 때 처음으로 써 본 시나리오가 크게 성공했단다. 그래서 얼른 대학을 졸업해서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려고 했어. 그런데 영어 성적이 대학 졸업을 발목을 잡아서, 영어 학원을 다니게 됐는데 그 학원에서 제임스라는 캐나다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자신의 성공은 잠시 미루고 사랑에 진심이었던 도선은 제임스와 결혼을 하고 캐나다에서 생활을 시작했어. 지금까지의 기간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틈틈이 시나리오를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사랑만 했나? 첫 시나리오 이후 더 이상 시나리오는 쓰지 않았단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얼마 안되어 아이가 생기다 보니 시나리오를 쓸 시간은 더욱 없었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임스에게 배신을 당해 이혼을 하게 되고, 수입이 없던 도선은 양육권도 잃어 아이와도 헤어져 쫓기듯 귀국하고 말았단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탱크를 알게 되고, 탱크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

양우와 둡둡이라는 퀴어 커플이 있단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에서 자주 보이는 퀴어 커플을 한겨레작품상 수상작에서도 보게 되는구나. 양우와 둡둡은 OTT 를 보면서 채팅 하다가 만나게 되었어. 둡둡은 닉네임이었어. 둡둡은 부모님과 무척 친했으나,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단다. 양우와 둡둡 다른 사람의 시선 등 쉽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어. 그렇다 보니 탱크에 의지하게 되었단다.


2.

어느날 도선은 컨테이너가 있는 산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단다. 그날 탱크에 예약도 해 둔 상태였어. 영경과 부경도 산불 소식을 듣고 알아봤는데, 산의 반대편이라고 해서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어. 영경과 부경은 안일했던 것 같구나. 그래도 상황이 어떤지 산불 소식을 듣자마자 갔어야 했는데

도선이 켄테이너에 도착하자 아직 이전 예약자가 있었어. 원래 이런 법이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었어. 산불이 이미 이쪽 컨테이너까지 번지고 있어 위험한 상태였는데 그들은 나올 생각을 하고 않았고 심지어 한 명은 울부짖고 있었어. 둘은 바로 양우와 둡둡 커플이었단다. 둡둡이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러 왔고, 뒤늦게 양우가 눈치채고 왔으나 늦었단다. 도선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어. 컨테이너를 오가는 길에 몇 번 마주쳐서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거든. 그 이야기에는 둡둡의 사랑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고, 도선은 둡둡에게 허락을 받고 둡둡의 사랑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기로 했단다.

도선은 그렇게 시나리오 작업을 다시 하게 해 준 이가 둡둡이었는데 컨테이너 안에 쓰러져 있었던 거란다. 도선은 대피하라고 소리쳤지만 양우는 이성을 잃고 있었어. 더 늦으면 도선도 위험할 것 같아서 혼자 도망쳤단다. 양우도 살아서 나오기는 했지만, 둡둡이 없는 세상에 양우는 모든 것을 잃은 듯했어. 회사도 결근을 많이 해서 결국 잘리고 말이야.

전소된 컨테이너에서 둡둡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영경과 부경은 조사를 받아야 했어. 영경은 사기죄로 감방까지 가게 되었단다. 하지만 영경은 그리 슬퍼하거나 억울해하지도 않았어. 영경은 탱크에 대한 믿음이 컸거든. 감옥에 있으면서 또 다른 탱크를 준비하고 있었단다. 아직 탱크라는 헛된 믿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영경과 달리, 부경은 탱크의 믿음은 부질 없는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래서 영경이 다시 탱크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일을 방해하기로 했단다. 또 다은 사람이 희생을 당할 수 있으니 말이야.

기어이 영경은 새로운 탱크를 설치했고, 부경은 라이터를 들고 가서 새로 설치된 탱크에 불을 질렀단다. 하지만, 이제 탱크는 영경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어. 여기저기 탱크가 생겨나기 시작했단다. 믿음과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 우리 사회에 믿음을 돈벌이로 하는 것은 수지 맞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소설은 끝을 맺었어. 이 소설의 평가를 다시 찾아보니, 재해, 퀴어, 종교, 청년 세태 등 오늘날 문제를 안고 있는 것들을 모두 다루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평가도 있더구나.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 하지만 아빠가 생각하기에 현시점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권력과 정부가 아닌가 싶구나.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배출을 누구보다 반대해야 할 사람들이 그것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계속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들이 어느 사람인가 싶구나. 이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구나.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 .


PS,

책의 첫 문장: 산불은 9 13분에 시작되었다.

책의 끝 문장: 인사를 하려고 든 오른손 위에서 작은 깃발이 조그맣게 팔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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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4권 -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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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어느덧 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야 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4권이고, 여섯 권 남았단다. 4권의 부제는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러일전쟁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일어났고, 우리나라 군대 해산이 1907년이니까 2~3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겠구나 하고 책을 폈는데 러일전쟁 이전인 1902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이 시기에는 너희들도 알고 있는 을사늑약 등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단다.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가슴 아픈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읽다 보면 답답함과 억울함과 분노가 심장을 때리더구나. 그럼, 4권에서 다룬 이야기를 짧게 전달해 볼게.


1.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를 만들려고 하는 외국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단다. 나라의 재정은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이었지. 그럼에도 1902년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자 태어난 지 50년은 기념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조정은 아주 성대하게 기념 잔치를 했단다. 이런 형식적인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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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라는 외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오늘내일 하는 지경인데, 엄청난 예산을 들여 잔치를 벌이고 외국 사신을 초청하고, 그 때문에 새로 영빈관을 짓고, 광화문 네거리에 비각을 세웠다. 광화문 비각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다. 신민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원구(圓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제위에 오른 뒤 천하를 소유할 칭호를 대한이라고 하고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이 얼마나 좋은 글귀인가. 대한이 천하를 소유하고 무()에 빛났다 하여 연호를 광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글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1897년에 조선왕조가 허울 좋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겉으로는 면모를 일신한 것처럼 보였으나 6년 만에 1902(광무 6) 마침내 외채 위기를 맞게 되고 2년 뒤 러일전쟁 발발,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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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인들이 간도로 많이 이전하게 되는데, 황무지 같은 곳을 개간하여 거주하게 되었단다. 국경이 불분명한지라 청과 간도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해서 1902년 이범윤이 간도관찰사로 파견되기도 했어.

나라 밖 사정도 좋지 않게 흘러갔어.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은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인정해 주고, 일본은 중국에서의 영국의 우위를 인정해 주었단다. 영일 동맹의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이 충격을 받고, 대한제국을 어느 나라에도 얽매이지 않게 하려는 중립화 노력을 했대. 하지만 중립국 선언을 하기에는 당시 대한제국은 힘이 너무 약했어.

1904 2월 일본이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어. 당시 러시아의 국방력이 일본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일본의 무모한 짓을 벌인 것으로 보였지만, 러시아 함대가 이곳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어.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뤼순을 점령하는 등 러시아 자신들이 밀리는 형세로 인해 충격을 받았어.

사실 미국이 뒤에서 몰래 일본을 도와주고 있었단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어. 1905 1월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피의 일요일이라는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러시아 군의 사기가 떨어졌단다.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 함대가 우리나라 근해까지 왔지만, 군비로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지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일본을 이길 수 없었단다. 이 이야기는 몇 달 전에 <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을 읽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기억 나지?

하지만 일본도 피해가 컸다고 하더구나. 25만여 명이 죽었다고 하니이 때 질병으로도 고생을 했는데, 새로 개발한 배탈설사약이 잘 들어서 러시아를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러시아를 정복시킨 약이라는 뜻의 정로환(征露丸)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되는데,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가쓰라와 태프트가 만나 밀약을 맺었는데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기로 한 밀약이란다.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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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2007 8월 한승동은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들먹이는 가쓰라, 태프트들이 주도권을 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망언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그는 한국 정부를 방치해둘 경우 또 다시 타국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말려들게 할 것이니,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다시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에 강요하는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사실 태프트는 가쓰라가 그런 주장을 읊조리기 전에 먼저 필리핀에서 일본의 유일한 이익은 자신의 견해로는 미국과 같은 강력하고도 우호적인 국가에 의해 필리핀이 통치되는 데 있으며, 이 군도가 자치에 부적합한 원주민의 잘못된 정치 아래 놓이거나 비우호적인 몇몇 열강의 수중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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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러일전쟁의 물자를 대기 위해서 일본은 1904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내에서 병참기지를 사용하고 자원을 징발해 갔단다. 1904 8월에는 한일협정서를 강제로 맺었는데, 대한제국이 외교 업무를 진행할 때 사전에 일본에 이야기하고 협의를 해야 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단다. 을사늑약 이전에 이미 국운은 다 저물었던 것 같구나. 이런 소식들은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피를 들끓게 했단다.

1904년 영국인 베텔 사장과 양기탁 총무가 함께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을 창간했어. 영자 신문으로 기획해서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단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국영문 혼용으로 바뀌었어. 박은식, 신채호 등이 이 신문을 통해서 활동을 했어.

1904년 고종은 정치범을 석방했는데 이때 이승만도 석방되었대. 이승만은 석방된 뒤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구나. 1902년 하와이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도 하와이 이민은 계속 늘어나서 1902년부터 1905년까지 7226명이 갔대. 그리고 19054월에는 1031명이 멕시코로도 이민을 갔대.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갔는데 가는 동안에 400여 명이 사망하고, 멕시코에 가서는 반노예 생활을 했다는구나. 정말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구나.


3.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조선 침략에 거칠 것이 없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했으니 말이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주도했는데, 고종을 협박하여 도장을 찍으라고 했으나, 고종은 마지막 자존심인지 책임을 떠 넘긴 것인지, 대신들에게 위임을 하겠다고 자리를 떴어. 그리고 을사5적으로 유명한 대신들이 도장을 찍음으로써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단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들이 을사 5적이란다. 잊지 말아야지. 이 중에 이근택의 집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주었단다. 이근택의 하인들의 온 백성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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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60)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 순간 부엌에서 식칼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라고 호통을 치고 나서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계집종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집을 나가버렸다. 조약체결 이듬해 2월 이근택은 취침 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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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열강들은 하나 둘 우리나라와 외교를 단절했단다. 일본을 인정해준다는 거지열 받는구나.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단다. 헐버트라는 사람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워싱턴에 가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었고, 민영환이 추가로 미국에 파견하여 우리나라 조정의 입장을 이야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단다. 프랑스의 프랑시스 레이라는 법학자도 한국 정부의 측의 동의 표시에 결함이 있고,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해 확약하였던 보장 의무의 위반이라는 이유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다고 하는구나.

국내에서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황성신문에 실어 부당함을 주장했고, 민영환은 자살로써 부당함을 주장하였단다. 민영환 이후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대. 이 일로 민영환은 전국적인 영웅이 되었는데, 민영환이 나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에 충성한 것 한뿐이라고 축소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는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 민영환을 영웅화한 것이라면서 말이야.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한성부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 총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을 했어.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1906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민 평화 회의에 고종의 밀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노력에 그치고 성과는 얻지 못했단다. 외교권을 빼앗겼으니 나라 전체를 빼앗기는 것도 시간 문제..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육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생각들을 가졌어. 그래서 사립 학교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고,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등 학회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하는구나.

한편 을사늑약 이후 의병의 활동들도 더 활발해졌는데,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유명하단다. 최익현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 단식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1907년에는 빼앗긴 나라를 돈으로 다시 얻어오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단다. 대구에 살고 계시던 갑부 서상돈이라는 사람이 시작했는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대. 을사늑약 이후 고종이 일본에 협조하지 않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하자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계속해서 넣게 되고, 1907 9월 결국 고종은 왕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이란다. 일본은 나라 빼앗기 절차를 하나씩 진행을 했는데 그 중에 군대로 해산시켜 버렸단다. 이제는 우리나라는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단다. 군대가 없는 나라를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4.

이 책에서는 서양인들이 바라본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주었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려 줄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중에 호기심이란 것이 있었다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많이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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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5)

런던은 1904 3 12일자 일기에서는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을 지적했다.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비능률적인 점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호기심이다. 그들은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말로는 구경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우리 서양 사람들에겐 일종의 연극관람이며 회의참석이며 강론경청이며 경마구경이며 동물원 나들이며 일종의 산책과도 같은, 그러니까 그 외에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의 아주 큰 이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아주 사소한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구경거리에 해당되므로 몇 시간이 걸려도 기웃거리느라고서 있거나 구부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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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학창시절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 <혈의 누>라고 배웠단다.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인직의 <혈의 누>는 논란이 많은 소설이라고 하더구나. 일본 군인을 미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말이야. 아빠도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 몰랐는데, 알고 나니 참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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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54)

저는 왜 자꾸 그런 소설이 시험에 나는지 모르겠어요. 참 부끄럽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혈의 누>를 보면 평양성 안에 살던 김옥련이라는 처녀의 어머니 최 씨 부인이 청일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시내를 헤매다가 어떤 남자한테 겁탈당하려는 찰나에 일본 헌병이 이 부인을 구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설을 그냥 읽으면 아, 참 재미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여자가 구해졌구나 하고 박수를 치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다 의도된 내용이에요. 왜 다른 사람도 많은데 하필 일본 헌병이 구해주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무장해제시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 딸 김옥련이 어머니, 아버지, 가족을 다 잃고 헤맬 때 이를 구출해주는 사람도 역시 일본 군의관입니다. 일본 군의관이 데려다 친딸처럼 잘 대해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 군의관이 데려갔으면 첩으로 두었겠지 친딸처럼 대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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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박에스더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이름은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어떤 일을 했는지 말 모르는 분이었어. 본명은 김점동이고, 선교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노동자 박씨와 결혼을 해서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었대. 남편은 막노동을 하면서 외조를 했지만, 그만 일찍 돌아가시고 박에스더는 의사가 되어 국내로 돌아오셨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셨지. 박 에스더는 귀국해서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는데 10달 동안 3000명의 환자를 진료하셨대. 그렇게 과로를 하셔서 그만 병에 생겨서 34살의 젊은 나이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대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구나.

….

,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의 이야기란다. 아빠가 중간중간 많이 빼먹고 이야기를 해서 역사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이해해 주길 바라고… 5권을 읽게 되면 또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점점 더 가중되는 외세의 지배하에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은 있으나마나 한 자리였다.

책의 끝 문장: 먼 훗날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경쟁체제를 갖게 되는 한국의 대학입시 전쟁은 바로 그런 교육구국론을 외쳐야 했던 세월이 너무도 길었단 탓에 한()으로 유전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김옥균)는 우선 조선의 불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차마 들을 말인가? 우리나라는 관청에서부터 민가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물이 번지고 도랑이 막혀서,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여 코를 막아도 견디기 어려움의 탄식이 있으니, 실로 외국의 조소를 받을 일이다."
- P81

을사늑약의 부당성은 조약 체결 즉시 제기됐다. ‘을사늑약이 완전히 무효’라는 첫 번째 주장은 1906년 프랑스 파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며 국제법학자인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의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이었다. 레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한국 정부 측의 동의 표시의 결함, 다른 하나는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해서 확약하였던 보장 의무의 위반이었다. 레이의 주장은 1927년 미국 국제법학회가 하버드대학교에 국제법 법전화작업을 의뢰하여 1935년에 조약법을 정리, 공포하게 되었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 P165

1907년 1월 29일, 대구지역의 갑부 서상돈(1851~1913)이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에서 "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즉석에서 800원을 내놨다. 이에 인쇄소인 광문사 김광제 사장도 석달치 담백값 60전과 의연금 10원(당시 80kg들이 쌀 한 가마 6원)을 선뜻 내놨으며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회원들도 동참해 이날 하루 만에 2000원이 모였다. 그해 2월 21일, 대구 시내 북후정(현 시민회관)에서 수천 명이 모인 군민대회가 열렸다. - P283

이와 관련해 노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워 러일 비밀협상이 진행 중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의 변함없는 우정만 믿고 3인의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결국 밀사들은 황제접견은커녕 외무장관도 만나보지 못했다. ……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 P303

이승원은 "’피’를 통해야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였다. 피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느냐 마느냐가 중요했고, 그 흘린 피를 머금고 세상은 격변하기 시작한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피바람의 회오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선생들이 학생들 앞에서 솔선하여 단지를 하고, 그 피로 혈서를 썼다. 학생들은 선생의 뒤를 따라 단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헌병들은 학교를 예의 주시하며 감시했고, 단지를 한 학생을 의병 관련과 내란선동죄로 잡아들였다. 그러나 한 번 흩뿌려진 피는 그칠 줄 몰랐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단지동맹을 결성했고, 그들이 흘린 피가 전국을 붉게 물들였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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