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집필실에 앉았노라면 내가 채웠다가 비운 집필실들이 떠오른다. 진해와 논산과 대전과 파주와 서울의 그 방들은 잘 있을까. 작품에 따라 책상을 비롯한 가구 배치가 바뀌었고, 책장에 꽂힌 책들도 물론 달랐으며, 벽에 붙인 지도와 사진도 새롭게 얽혀들었다.

내 몸의 일부처럼 만든 집필실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곳을 비울 땐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몸통이 빠져나간 뱀 껍질 같다고나 할까.


(48)

올해는 책을 두 배 적게 읽으려 한다. 예년의 절반만 읽겠다고 답하기보다 두 배 적게 읽겠다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양적인 팽창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질적인 변화를 동반하듯이, 양적인 수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는 것만큼이나 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간단한 걷어냄이 아니라 간신히 줄임을 감당하는! 인생에서 모처럼 두 배에게 가 닿았다. 나는 아직 이렇게 어리석다.


(72)

장편 작가는 미래를 사는 사람이다. 단편이라면 올해 쓰고 올해 발표할 수도 있지만 장편은 불가능하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최소한 3년은 걸리고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5년이나 10년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장편은 이 계절의 유행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치명적인 매력이자 기꺼이 감수하는 한계다.


(84)

농부는 흙을 믿기에 시금치를 솎는다. 시금치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상의 쾌감을 열 배는 더 독자에게 주고 싶다. 그 상상이 엷어지고 저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엔 선입견과 오만이 깔려 있다.

솎아낸 시금치와 봄나물로 점심을 먹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시금치 중에서 맛과 향이 가장 진했다.


(108)

나무와 하늘이 반반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117)

도돌이표처럼 들려온다. 평생 듣고 또 들어야 한다.

쉰 살 이쪽저쪽이니 어디에서든 폼 잡고 행세할 나이지. 1987년의 민주주의와 2002년 노무현 현상을 만든 자부심으로 가득한 이도 적지 않아. 하지만 2014년 우린 우리들의 흉측한 민낯을 봤어. 우린 자식들을 수장시킨 세대로 역사에 기록될 거야. 이 끔찍한 잘못을 등에 진 채 어떻게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까 고민해야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158)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하면 절망하거나 꿈꾼다고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살짝 바꾸고 싶다. 절망과 꿈꾸기는 양분하여 택일되기도 하지만, 절망의 두께만큼 꿈을 꾸며 도약하는 이도 있다고. 도약과 성공은 절망이란 거름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171)

물고기를 물살이로 바꿔 부르자고 내게 처음 제안한 이는 김한민 작가다. 그 제안은 나를 엉뚱한 상상으로 이끌었다. 인류가 육상에 살지 않고 강이든 바다든 수중생활을 한다면, ‘물고기란 이름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육상 생물들을 통칭하여 육지고기혹은 땅고기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수중생활들은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이지만, 단체행동과 함께 사생활도 즐기지만, 땅고기들은 수십 마리의 들소든 수백 마리의 갈매기든 외모도 똑같고 개성 따윈 있지도 않다면서! 용궁에 모여 이런 주장을 펼치는 장면을 판소리로 만들어볼까.


(252)

사체 곁에서, 이 도로에서 목숨이 끊긴 동물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을 생각한다. 그들이 이 길을 건너려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이를 찾아서일 수도 있고 목이 말라서일 수도 있고 어미나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예전에 무사히 지나갔던 길일 수도 있고 처음 가던 길일 수도 있다. 확실한 사실은 죽으려고 그 길을 건넌 동물은 한 마리도 없다.


(291)

농부는 빛이 그리울 땐 고개를 숙인다. 벼도 빛나고 보리도 빛나고 상추도 빛나므로. 햇볕에 반사된 빛이라고 간주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햇볕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물들의 빛이 모두 해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자라며 뿜어낸 빛이 농부에게 닿은 것이다. 점점 넓어지고 밝아지는 식물들의 그 빛을 한 번이라도 쐰 사람은, 해와 달과 별을 찾아 고개를 들기보다, 아무리 희미하고 작은 빛의 기미라도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땅에 댄 채 고개 숙인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만든 빛과 어둠의 이야기를 품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그런 사람이다.


(359)

쓴다는 것은 물러선다는 것이다. 책상에 바짝 다가앉으려고만 들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뒤로 한참을 가 보곤 한다. 퇴보자처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도 말했다. ‘퇴보자는 자신의 캔버스를 바라보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작업하는 동료들과 부딪치는 사람이라고.


(403)

이곳 섬진강 들녘은 사람이 매우 적은 대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생물들이 아주 많다. 소멸하고 있는 곳은 사람만 득실대는 서울이다. 만인에서 만물로 시선을 돌리면, 곡성을 비롯한 소위 소멸예정지역들이 달리 보인다.

인가 증가 대책만 세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외한 생물들을 어떻게 잘 지켜낼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들지 말고, 만물을 위해 무엇도 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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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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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작년에 충격을 받을 만큼 재미있게 읽은 우리나라 SF 소설이 하나 있었으니, 박지리 님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라는 소설이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소설을 마지막으로 박지리 님께서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박지리문학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제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품도 읽어보겠다고 구입을 해 두었는데, 이제서야 읽었단다.

현호정이라는 처음 보는 분의 소설로 <단명소녀 투쟁기>라는 독특한 제목이란다. 소설 길이도 그리 길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단다. 박지리 님의 소설의 강렬함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대한 기대치가 컸던 탓이었는지, 그 기대만큼은 아니었단다. 소설이라는 것은 작가의 텍스트를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릿속으로 그 세상을 그려내면서 읽어 나가야 하는데, 아빠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고 복잡하고 혼란스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뒷부분에서 왜 그랬는지 알겠더구나. 그래도 그것 치고도 너무 어지러운 구성이었단다.


1.

주인공 구수정은 수능 때문에 찾아간 점쟁이 백두로부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단다. 아니, 아직 젊음도 꽃피우지 못했는데, 스무 살도 안되어 죽는다니 이게 말이 될 법인가. 수정은 이것은 필사적으로 그 죽음으로부터 피해서 달아가기로 마음먹는단다. 그래서 소설 제목이 <단명소녀 투쟁기>로구나. 단명으로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소녀가 죽지 않기 위한 투쟁의 기록.

수정은 죽음을 피해 남으로 계속 가다가 죽음을 향해 북으로 가는 이안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단다. 그렇게 알게 된 이안과 함께 하는데, 그들이 있는 세상은 비현실적인 세계였단다. 소 만한 개가 점점 작아 들어 죽지를 않나, 작은 일곱 아이들이 빨리 늙어가질 않나현실 세계의 질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란 말인가. 하기야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남으로 간다는 것 또한 현실세계와 질서는 맞지 않았단다. 심지어 저승신을 만나기도 한단다. 그러면서 수정의 소원과 이안의 소원을 들어주는 조건을 내건단다. 수정의 소원은 죽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이안의 소원은 죽게 해달라는 것

저승신이 내놓은 조건은 명부에 적힌 사람을 열명을 죽이면 된다는 것이야. 이쯤 되면 누군가의 꿈 속 세계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는데, 책에서도 힌트가 나왔단다. 그 힌트는 수정이 꿈을 꾸었는데, 이안이 병실에 있는 꿈이었어. 그러니까 그 꿈이 실제는 현실이고, 수정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세상이 꿈인 것이겠지. 아무튼, 저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수정과 이안은 명부에 적인 이들을 하나씩 처단하게 된단다.

….

그리고 구수정은 마침내 죽음에 이르지 않게 되고 눈을 뜨게 된단다. 눈을 뜬 구수정은 자신이 병실에 혼수상태로 있었음을 알게 되었단다. 병실에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자살시도를 했었기 때문이야. 현실에서는 자살 시도를 했지만, 죽음을 앞둔 긴 꿈에서는 살고자 했던 것이지. 운명이 구수정에게 주었던 기회가 아니었나 싶구나.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말이야.

깨어난 구수정은 옆 자리 침대를 보았어. 비어 있었어. 그 침대에는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다고 했어. 이안은 구수정이 꿈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이지. 소설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생각하기에 혹시 옆 침대에 이안이 있었는데 결국 죽게 되었고, 구수정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충격 받아 위험에 빠지게 될까 봐 사람들이 수정에게 거짓말은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단다. 또는 이안은 다른 병원의 다른 침대에서 혼수상태였는데, 그들이 꿈 속에서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어.

아무튼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읽는 내내 안개 낀 곳을 거니는 느낌이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걷히는 그런 기분이었단다.


PS:

책의 첫 문장: 구수정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의 이름은 북두(北斗).

책의 끝 문장: 칼은 나를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살리거나 죽이지만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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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4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둘째가 다윈영의 악의기원을 진짜 좋아하는데 저는 아직 못읽어봤네요. 딸은 딸 저는 저의 독서를 이러는데 북홀릭님 항상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책을 같이 읽어주시는 모습 존경스럽습니다.

bookholic 2022-11-16 08:19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도 아이들과 늘 소통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도 저랑 잘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욕심이겠죠? ㅎㅎ

파이버 2022-11-14 2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은 얇은데 가름끈이 흑과 백 두개나 있어 특이했던 책이었습니다. 저도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구성이 어지러웠다는 것에 백번 동감합니다.

bookholic 2022-11-16 08:2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어지러워요 ㅎㅎ
지은이의 다음 작품은 좀더 나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 - 국선변호사 사건 일지
신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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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우리가 함께 재미있게 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대해 극찬을 했는데, 아빠도 정말 재미있게 잘 봤단다. 너희들도 이 드라마를 무척 좋아했잖아. 그 드라마에 나오는 노래도 무한반복으로 듣기도 하고그 드라마는 법정드라마라서 에피소드마다 재판이 나오는데, 그 재판들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참고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그 재판들이 실린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읽게 된 것이 신민영 변호사님이 쓴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라는 책이란다.

신민영 님은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시고, 자신의 겪은 재판들과 변호사로써 갖고 있는 생각들이 책에 담겨 있단다. 재판을 다룬 영화나 소설을 읽다 보면 변호사와 검사의 논리적인 논쟁에 푹 빠져드는데, 실제 사건을 다른 에세이도 마찬가지로 푹 빠져들게 되는구나. 지은이 신민영 변호사님의 글솜씨가 좋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지은이 신민영 변호사님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선전담변호사시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법에 관련된 것은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국선변호사는 전담하는 줄도 처음 알았단다. 변호사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줄 알았는데, 2004년부터는 국선전담변호사가 생겼다고 하더구나.


1.

이 책을 읽다 보면 각 사건의 이야기들도 재미있지만, 법조계에 일어나는 일들과 법정 용어들도 새롭게 알게 되어 좋았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당방위가 정말 드물다는 이야기도 처음 알게 되었단다. 어떤 사건의 경우 정당방위가 안 된 경우도 있어 안타까운 적이 있지만, 정당방위의 범위를 좁게 가져가는 이유를 읽어보니 그 또한 나름 일리가 있어 보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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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초기 소지가 불법이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경찰서가 비교적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의 범위를 좁게 가져가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주어 보복성 폭력 행위로 이어지게 하는 것보다, 팔을 잡는 등의 현상 유지만 하게 하고 공권력을 빌어 사건을 처리하는 편이 폭력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물론 몇몇 아쉬운 사건이 있긴 하지만 더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현행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

드라마나 실제 뉴스에서도 보면 집행유예를 받게 되면 좋아하는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단다. 집행유예를 받으면 거의 무죄나 마찬가지로 생각들을 하는 편이고.. 그런데 집행유예를 만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의아해했는데 집행유예를 받더라도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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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9)

현행법상 집행유예 이상 전과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 벌금형이 가능한 젊은 피고인들의 집행유예형 요청을 만류하는 이유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 뒤늦게 공무원 시험 응시를 마음먹었다가 집행유예 전과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 나이 많은 피고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취업할 때 전과 기록을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형 실효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집행유예 전과는 5년이 지나야 전과 조회 결과에서 사라지지만, 벌금 전과는 2년만 지나면 사라진다. 물론 둘 다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고 취업이나 기타 목적으로 조회할 때에만 보이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 크다. 나도 변호사지만 우리나라 법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한다. 집행유예 전과가 어디서 어떤 불이익을 가져올 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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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단다. 증거가 명백한 피고인이라고 하더라도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고한 사람, 그러니까 무죄로 간주한다는 원칙이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인권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유죄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얼굴도 가리고 그러는 것인데,  증거가 명명백백한 흉악범의 얼굴을 가리는 것을 두고, 그런 사람이 무슨 인권이 있냐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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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도대체 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야만 하는 걸까? 바로 인권 때문이다. 형사재판이라는 게 국가 대 개인의 싸움이라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이 과정에서 사수하려 애를 써도 보장하기 힘든 것이 개인의 인권이다. 하지만 요즘 인권을 얘기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는 듯하다. ‘흉악범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는데 무슨 놈의 인권이냐. 도리어 피해자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반론이 대번에 돌아온다. 사실 그 간의 형법이 피해자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피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 반대급부로 피해자의 인권이 지켜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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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책에 실린 재판들 중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각색된 사건들은 4편이 있었단다. 먼저 이 책에 실린 치매 남편을 폭행한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화에서 그려졌단다. 드라마 대사 중에도 나왔던 사람의 마음에 따라 죄명이 바뀐다는 내용도 책에 실려 있었단다. 드라마를 보면서 법이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이러면서 봤는데 이 책을 참고했던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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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같은 주장을 하곤 한다. A라는 사람 때문에 B가 죽었다 치자. 이때 A에게 적용되는 죄명은 살인죄만 있는 게 아니다. A가 무슨 마음을 먹고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죄명은 네 가지로 갈린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살인죄, 다치게 할 마음이었다면 상해치사죄, 그냥 좀 때려줄 마음이었다면 폭행치사죄,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실수로 죽게 했다면 과실치사죄. 똑같이 피해자가 사망했더라도 가해자의 마음속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에 따라 죄명을 갈린다. 이러다 보니 살인(미수)혐의를 받는 피고인들 십중팔구는 형을 줄여보려 죽일 의도는 없었고 그냥 좀 혼내주려고만 했다고 주장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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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0화에 보면 자폐 장애인과 성관계를 한 남자가 피고인으로 나오는데, 그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지만 자폐 장애인의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의 딸을 꼬셔서 겁탈한 것이라고 주장했지.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판결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피고인, 심지어 상대방인 자폐 장애인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 사건도 실제 있었던 사건을 각색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적 장애인의 권리를 부모님의 의지에 의해서 보장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단다.

======================

(170)

사실상 주변 정황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의 방식은 무죄추정의 원칙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이 과연 피고인만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지적장애인 역시 상대를 선택하고 성관계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 관계에 대해 국가가 광범위하게 개입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지적장애인과의 성적 접촉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같은 장애인이라고 해서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나 매한가지다. 눈앞의 불행을 막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 앞에서, 멀리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얘기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궁금한 건 지적장애인 본인들의 얘기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 모두 수사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여전히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

세 번째 에피소드는 지적 장애인이 형의 자살을 막으려다가 피고인이 된 3화로, 지적 장애인이 아버지의 자살을 막으려다 살인자로 재판을 받은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구나. 마지막 에피소드는 놀랍게도 6화란다.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쏟게 한 탈북민이 아이 때문에 5년간 도망 다니다가 뒤늦게 자수를 한 사건.. 실제 사건도 드라마에서처럼 변호사가 캐치하지 못한 피고인의 자수로 집행유예를 받았단다. 이 에피소드가 실제 있었던 일이다니

….

이번에 읽은 책 말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참고한 책이 또 있다고 하더구나. 그 책도 기회 되면 함 읽어봐야겠구나. 그나저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시즌 2를 하려나.


PS:

책의 첫 문장: 대검찰청은 종종 영화나 드라마 작가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한다.

책의 끝 문장: 하늘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안효숙 님께 이 책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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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겠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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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코로나 바이러스라 퉁쳐서 부르는 코비드-19가 어느덧 3년을 꽉 채워가는구나. 요즘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규제도 많이 풀려서,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있단다. 아빠는 그 마스크라는 것이 그렇게 오래 써도 적응이 안되어 여전히 답답하기 그지 없구나.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열풍에 휘청거리는 동안, 우리나라는 방역을 잘 한 나라로 손꼽혀 세계 여러 나라의 귀감이 되곤 했단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염병에 대해 방역을 제대로 못해서 국가 망신을 당하곤 했단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완벽한 방역으로 SAS라는 전염병 환자가 국내에 한 명도 발발하지 않게 해서 세계에서 극찬을 받았던 나라에서, 방역 때문에 망신을 당하게 되었으니 다른 나라에서 보면 참 이상하다고 하겠구나.

어떤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 방역 우수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방역 망신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단다. 국가 시스템이라는 것이 한번 만들어지면 집권 정당에 관계 없이 잘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더구나. 무능한 정권이 들어서면 국민들이 고생하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단다. 최근 들어 또 그런 일이 일어나서 가슴 아프구나.

아빠가 서두가 길었구나. 이번에 아빠가 읽은 김탁환 님의 <살아야겠다>라는 소설은 몇 년 전 방역 망신 국가를 만든 메르스 사태에 관한 소설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란다. 메르스가 처음 발발한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단다. 창피한 일이지사우디아라비아와 한참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니. 당시 대통령이 방문한 병원의 벽에 A4지에 적혀있던 살려야한다라는 문구가 아직도 생각나는구나. 그런 설정샷을 누가 생각했는지, 코미디가 따로 없었단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메르스 사태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메르스 마지막 환자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로 다시 태어났단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띠었지만, 소설 속의 이야기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단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먹먹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라고, 제발 국민들이 제발 선거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우리 국민들은 당시 그렇게 국가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이들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었단다.


1.

이 소설은 2015년 메르스 사태를 소설로 한 것으로 제목 살아야겠다는 앞서 이야기했던 병원의 벽에 A4지에 적어 두었던 살려야 한다를 풍자해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구나. 메르스 병원의 첫 번째 확진자가 다녀갔던 서울 삼성 병원을 소설 속에서는 F병원이라고 했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메르스 첫 확진자가 발생했던 F병원과 정부는 왜 모든 것을 숨기려고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전염병이 처음 생긴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이로 인해 초기 진압을 실패하고, F 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사람들이 연이어 메르스에 확진되면서 메르스는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단다.

이 소설은 2015 5 27일에서 29 F병원 응급실에 방문했던 세 사람의 중심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단다.

김석주. 다니던 회사도 그만 두고 치과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림프종이라는 암을 받아 한동안 항암 치료를 받고 일 년 전 완치 판정을 받음. 그리고 치과 의사로 첫 출근을 했는데, 한 달도 안되어 림프종 재발 증세로 F병원 응급실에 왔다가 그만 메르스에 확진 됨. 식구는 아내 남영아와 네 살 짜리 아들 우람이 있음.

이첫꽃송이. 직업 수습 기자. 아버지의 병환으로 F병원 응급실에 왔다가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F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름. 그 이후 메르스 증상이 발현되고 확진 판정 받음. 이첫꽃송이뿐만 아니라 친척분들도 줄줄이 메르스 확진됨. 퇴원 후에 막내이모부가 메르스로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됨.

길동화. 출판물 물류회사 베테랑 회사원. 막냇동생이 아파서 F병원 응급실에 같이 왔다가 메르스 확진됨. 아들 예석은 제주도에 왔다가 그곳에서 격리됨. 15일간 혼수 상태에 빠져 죽을 위기도 여러 번 겪음.

이첫꽃송이는 나이도 젊고 기저 질환도 없어서 그런지 그나마 건강한 몸으로 퇴원을 했지만, 길동화와 김석주는 그렇지 못했단다. 길동화는 음압 병동까지 이동했다가 퇴원을 하긴 했는데, 후유증이 심했단다. 숨쉬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았어. 그리고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는데, 그 이유는 메르스 환자라는 것이 소문나면서, 거래처에서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거야.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다른 직장으로 알아보려고 했지만, 메르스 환자였다고 하자 받아주지 않았어. 어렵게 얻은 일자리도 거래처에서 알게 되어 다시 해고되고 말았단다. 이 억울함을 어디에 하소연을 해야 하나? 그가 메르스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자살 결심까지 하게 되었단다. 두 번이나 자살 기도를 하다가 아들 예석에 의해 성공하지 못했단다.

예석은 예전에 F병원에서 만난 윤해선 변호사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했단다. 윤해선 변호사는 소송을 해보자고 했단다. 윤해선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로 세월호 변호도 맡고 있었는데, 이첫꽃송이의 돌아가신 엄마의 옛 제자였단다. 이첫꽃송이와도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이첫꽃송이의 부모님이 안 계시고, 친척분들도 메르스에 걸려서 보호자 역할을 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윤해선 변호사가 이첫꽃송이의 보호자로 병원에 왔었단다. 그때 같이 입원했던 김석주, 길동화, 그리고 가족들도 알게 된 거야.

이첫꽃송이는 메르스 완치 후 다행히 기자로 복귀했단다. 문화부 기자 소속이었지만, 메르스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 인터뷰를 하기도 했단다.


2.

그리고 또 한 사람 김석주. 그는 림프종이 재발하긴 했지만, 메르스 증세는 다른 사람들보다 좋았단다. 아직 젊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림프종 담당 의사도 메르스를 먼저 완치시키고 림프종을 치료하자고 했어. 메르스 증세는 많이 좋아졌으나 PCR 검사를 받으면 아직 양성이었어. 그래서 림프종 치료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어. 그런 와중에 국가방침이 바뀌면서 갑자기 국가지정병원으로 이동하라고 했어. 김석주의 림프종 담당 의사는 F병원에 있어서 병원을 옮기면 안 좋을 것이 눈에 뻔했거든. 김석주의 아내 남영아도 병원 옮기지 말아달라고 항의했지만 그 항의는 묵살되었고, 김석주는 국가지정병원으로 옮겨졌고, 문을 몇 개나 지나고, 방호복을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격리 병동에 입원했단다.

김석주의 메르스 양성 반응은 50일이 넘어도 계속되었고, 이제 국내 메르스 마지막 환자로 남게 되었단다. 림프종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항암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는데, 격리 시설에서 받을 수 있는 치료는 극히 제한적이었단다. 의료진들이 방호복을 입고 오는 것뿐만 아니라 림프종 치료에 필요한 장비들도 들고 오지 못하니까 말이야. 격리병동에 있으면서 가족들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어. 이것은 입원이 아니라 감금 수준이었단다. PCR 검사를 하면 계속 음성과 양성이 반복해서 나왔어. 그래서 격리병동에서 퇴원도 못하고, 림프종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상태는 악화되어 갔단다.

2015 10월 초 드디어 최종 음성 판정을 받고 퇴원을 하게 되었단다. 담당 의료진은 김석주가 특이한 케이스라고 하면서, PCR 검사에서도 다시 양성이 나올 수 있고, 그렇게 양성이 나와도 전염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격리병동에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4개월만에 집에 온 김석주는 림프종 항암 치료 전에 일주일 간 집에 머물렀단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식구들 친구들과 함께 퇴원파티도 했어.

그런데 며칠 뒤 기침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들렀는데 다시 메르스 양성 반응이 나왔단다. 일전에 이야기와 달리 병원에서는 김석주를 다시 격리 병동에 감금시켰어. 남영아는 병원에 항의를 했어. 격리 기준도 없이 무조건 격리를 한다고병원에서는 질병관리본부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어. 격리를 하고 나서 메르스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림프종 치료는 다시 미뤄지게 되었어. 메르스 치료도 안해, 림프종 치료도 안해, 격리 해제도 안해...

남영아의 항의가 묵살되자, 윤해선 변호사는 이 일을 세상에 알리자고 해서 남영아는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김석주의 사연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제서야 병원에서도 뭔가 하려고 했어. 그 뭔가라는 것은 격리병동에서 림프종 치료를 하는 것인데,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격리 병동에서 림프종 치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단다. 결국 김석주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11 25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단다. 그리고 국가는 메르스 종식 선언을 했다고 하는구나.

….

아빠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것이 실제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더구나. 그래도 마지막 확진자가 잘 치유가 되길 바라면서 읽었는데, 결국 절망으로 끝이 났구나. 이 소설을 읽는 아빠도 이렇게 억울한데,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김석주와 그의 가족들의 억울함은 얼마나 컸을까. 어떤 보상이라도 죽음 목숨을 되돌릴 수 없는 법. 아빠는 사실 메르스 마지막 확진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이 책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단다. 당시 메르스 마지막 확진자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봤더니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이름만 달랐지 완전히 실화더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전염병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국가시스템에 의해 국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질 않길이렇게 쓰려고 했는데, 얼마 전에 또 엄청난 비극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말았단다. 오래 전에 떠돌던 말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단다. “이게 나라냐?”


PS:

책의 첫 문장: 5 20일 오전 11, 역학 조사관 세 명이 경기도 W병원 8층 준비실을 나섰다.

책의 끝 문장: 할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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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는 고립을 지리와 상황의 결과로 여기곤 한다. 혼자가 된 과부,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다 자란 여자, 그는 고립된 사람이다. 늙고 쇠약한 사람, 아예 물리적으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은 고립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립은 또한 마음의 상태일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다. 칩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택을 결정짓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당신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내가 저지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19)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24-25)

혼자 있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캐럴린 하일브런이 그 쌍둥이 기술을 터득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40대 중반인 지금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2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는 이제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전보다 더 자주 달성할 줄 안다. 나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34-35)

해석. 물론 이것이 핵심이고, 착각에 이르는 문이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과묵함의 망토 뒤에 숨은 채 상대가 스스로 관계에 대해서 품는 두려움이나 편견이나 자기 인식을 투사하는 빈 화면으로 기능한다. 만약 그 상대가(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태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주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수줍음은 오해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줍음을 타는 내 친구 하나는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한다. “침묵은 로르샤흐 테스트야.”


(84)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작은 인간 발전기 같은 록산이라는 이름의 두 살 조카를 볼 때면 나는 모성애 덩어리가 된다. 아이를 붙잡아서 껴안고 싶고, 그 자그만 얼굴과 손에 뽀뽀하고 싶다. 두 살 아기들이 즐기는 무한 반복 게임을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이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나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특히나 아이답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할 때면-낮잠을 자려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거나, 잠시 낯가림하며 제 아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있을 때-심장이 녹아내린다. 홀딱 반하겠네, 나도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나는 생각한다.


(9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119)

최근에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이 전보다 더 늙고 약해지신 듯 보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있는가? 젠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이런 생각.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어쩌지? 아버지가 혼자 생활하실 줄이나 아나?

사람들이 흔히 부모님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러니까 당신이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나? 혹은 만약 부모님이 아프실 경우에 당신이 좋은 자식 노릇을 하지 못하리라는 걱정이?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고?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123)

이것이 삶임을 깨닫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더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그리고 이것은 진짜 신화일 뿐이다), 나이 드는 부모의 모습만큼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아니 들수록 잃은 것이 많아진다. 점점 더 크고 버거운 과제가 나타난다. 실수를 되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144-145)

화가였던 어머니의 화실을 비우는 일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던 듯싶다. 화실은 갑자기 끝난 어머니의 인생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물리적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탁자와 붓과 페인트는 늘 그랬던 모습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진행 중인 작은 작품들, 스케치와 메모, 콜라주 재료, 색칠된 종이 무더기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그 방이 텅 빈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부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겨우 일 분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150-151)

하지만 모녀 관계가 얽히고설킨 관계가 되기 쉬운 게 그 때문이라면, 역시 그 덕분에 모녀 관계는 유달리 풍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란 딸의 내년에 있는 로드맵 혹은 거울이다. 우리가 어머니와의 관계에는 우리가 평생 배워온 교훈들, 우리가 과거에 걸어오다가 계속 걷기로 결정했거나 포기하기로 결정한 길들이 반영되어 있다. 여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일이나 연해 문제든,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입고 어떤 친구들을 사귈까 하는 문제든,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문제든-다소나마 자신의 결정을 어머니의 결정에 견주어 평가해보기 마련이고, 어머니의 노력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형성하거나 제약했는지, 강화하거나 약화했는지 따져보기 마련이다.


(183-184)

외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말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파티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단절의 외로움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찾아드는 그리움의 외로움도 있고,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채 내리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면 생겨나는 고립의 외로움도 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잘 아는 외로움은 일요일 오전의 그리움이다. 이것은 종종 사전 경고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듯한 외로움이다. 일단 이 외로움이 들이닥치면, 이 크나큰 외로움을 극복하기란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기분이 든다. 만약 우리 가게에서 외로움을 살 수 있다면, 일요일의 외로움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을 테고 그 위에 이런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취급 주의-초강력


(186-187)

이런 것들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을 앞질러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이 질문들에 답할 기회를 회피해왔다. 물론 가끔씩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새 신발의 치유력을 열렬히 증언하는 바다. 하지만 더 큰 질문들을 피하기만 했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돈을 펑펑 쓰면서 종종거릴 때, 보통은 내가 평범한 일요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느낌이 강화될 뿐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일에 착수했다. 몇 달 동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 했던 커튼을 직접 만들어서 걸었다. 할 일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195)

나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나는 정말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내게 적합한 삶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격려받고, 무엇에 의욕을 얻고, 무엇에 만족하는 사람일까? 자아에 관한 이런 고민들은 대부분의 사람이(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20대에 묻기 시작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니 서른일곱에 문득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고사하고 제대로 물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심란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나는 주야장천 취한 상태가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훨씬 더 어려웠다.


(212)

술은 그토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술에 절어 있을 때는 술이 유일한 해결책인 듯, 술이 자신을 산산조각 나지 않게 붙잡아주는 접착제인 듯 느껴지죠. 하지만 사실은 술이 문제의 근원이죠. 술은 우리가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발바닥을 바닥에 붙여놓는 접착제죠. 그날 아침, 저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어쩌면 퍼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생각이 점차 자라서 결국 저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223)

술은 재미나 친밀감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줄 순 있을지라도 그런 감정들은 진짜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화학물질 덕분에 변한 나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김에 흉금을 터놓는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 하지만 술을 마셨을 때 진짜 나는-어떤 면에서는 자신감 있고 다른 면에서는 겁 많은 나, 강한 동시에 약한 나-마음속에서 뒷전으로 물러났고, 그래서 안전해졌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혼자였다. 술을 끊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는 것, 혹은 망가진 TV 안테나를 고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시야가 더 밝아졌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세상하고든 접촉이 더 또렷하고 확실해졌다.


(241)

나는 진심이다. 여자들이여, 궐기하라.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다. 분노와 공격성을 훈련하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연습하자! 우리는 오랫동안 푸대접에도 겁쟁이처럼 얼어버리는 버릇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버릇을 끝장낼 때가 되었다.


(295)

하지만 순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계절의 순환도, 감정의 순환도, 여름의 불안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올여름에 내 몫의 좋은 날을 누릴 것이다. 기분 좋고 낙천적이고 마음 가벼운 날, 내 내면의 풍경이 바깥 풍경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좀 더 비슷해지는 날, 내가 맨발에 밟히는 모래와 살결에 와닿는 더운 공기를 즐길 수 있는 날, 그런 것들이 모두 괜찮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나는 나쁜 날도 겪을 것이다. 밝고 가벼운 것들이 모두 미워지는 날, 어두운 고치를 그리워하는 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면서 그 향기 나는 작은 머리통들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날.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요령껏 대처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처방책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확신하는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신이 영화관을 발명하신 것이다.


(325)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 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 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 효과가 있으려면-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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