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집필실에 앉았노라면 내가 채웠다가 비운 집필실들이 떠오른다. 진해와 논산과 대전과 파주와 서울의 그 방들은 잘 있을까. 작품에 따라 책상을 비롯한 가구 배치가 바뀌었고, 책장에 꽂힌 책들도 물론 달랐으며, 벽에 붙인 지도와 사진도 새롭게 얽혀들었다.

내 몸의 일부처럼 만든 집필실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곳을 비울 땐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몸통이 빠져나간 뱀 껍질 같다고나 할까.


(48)

올해는 책을 두 배 적게 읽으려 한다. 예년의 절반만 읽겠다고 답하기보다 두 배 적게 읽겠다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양적인 팽창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질적인 변화를 동반하듯이, 양적인 수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는 것만큼이나 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간단한 걷어냄이 아니라 간신히 줄임을 감당하는! 인생에서 모처럼 두 배에게 가 닿았다. 나는 아직 이렇게 어리석다.


(72)

장편 작가는 미래를 사는 사람이다. 단편이라면 올해 쓰고 올해 발표할 수도 있지만 장편은 불가능하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최소한 3년은 걸리고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5년이나 10년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장편은 이 계절의 유행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치명적인 매력이자 기꺼이 감수하는 한계다.


(84)

농부는 흙을 믿기에 시금치를 솎는다. 시금치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상의 쾌감을 열 배는 더 독자에게 주고 싶다. 그 상상이 엷어지고 저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엔 선입견과 오만이 깔려 있다.

솎아낸 시금치와 봄나물로 점심을 먹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시금치 중에서 맛과 향이 가장 진했다.


(108)

나무와 하늘이 반반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117)

도돌이표처럼 들려온다. 평생 듣고 또 들어야 한다.

쉰 살 이쪽저쪽이니 어디에서든 폼 잡고 행세할 나이지. 1987년의 민주주의와 2002년 노무현 현상을 만든 자부심으로 가득한 이도 적지 않아. 하지만 2014년 우린 우리들의 흉측한 민낯을 봤어. 우린 자식들을 수장시킨 세대로 역사에 기록될 거야. 이 끔찍한 잘못을 등에 진 채 어떻게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까 고민해야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158)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하면 절망하거나 꿈꾼다고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살짝 바꾸고 싶다. 절망과 꿈꾸기는 양분하여 택일되기도 하지만, 절망의 두께만큼 꿈을 꾸며 도약하는 이도 있다고. 도약과 성공은 절망이란 거름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171)

물고기를 물살이로 바꿔 부르자고 내게 처음 제안한 이는 김한민 작가다. 그 제안은 나를 엉뚱한 상상으로 이끌었다. 인류가 육상에 살지 않고 강이든 바다든 수중생활을 한다면, ‘물고기란 이름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육상 생물들을 통칭하여 육지고기혹은 땅고기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수중생활들은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이지만, 단체행동과 함께 사생활도 즐기지만, 땅고기들은 수십 마리의 들소든 수백 마리의 갈매기든 외모도 똑같고 개성 따윈 있지도 않다면서! 용궁에 모여 이런 주장을 펼치는 장면을 판소리로 만들어볼까.


(252)

사체 곁에서, 이 도로에서 목숨이 끊긴 동물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을 생각한다. 그들이 이 길을 건너려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이를 찾아서일 수도 있고 목이 말라서일 수도 있고 어미나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예전에 무사히 지나갔던 길일 수도 있고 처음 가던 길일 수도 있다. 확실한 사실은 죽으려고 그 길을 건넌 동물은 한 마리도 없다.


(291)

농부는 빛이 그리울 땐 고개를 숙인다. 벼도 빛나고 보리도 빛나고 상추도 빛나므로. 햇볕에 반사된 빛이라고 간주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햇볕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물들의 빛이 모두 해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자라며 뿜어낸 빛이 농부에게 닿은 것이다. 점점 넓어지고 밝아지는 식물들의 그 빛을 한 번이라도 쐰 사람은, 해와 달과 별을 찾아 고개를 들기보다, 아무리 희미하고 작은 빛의 기미라도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땅에 댄 채 고개 숙인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만든 빛과 어둠의 이야기를 품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그런 사람이다.


(359)

쓴다는 것은 물러선다는 것이다. 책상에 바짝 다가앉으려고만 들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뒤로 한참을 가 보곤 한다. 퇴보자처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도 말했다. ‘퇴보자는 자신의 캔버스를 바라보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작업하는 동료들과 부딪치는 사람이라고.


(403)

이곳 섬진강 들녘은 사람이 매우 적은 대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생물들이 아주 많다. 소멸하고 있는 곳은 사람만 득실대는 서울이다. 만인에서 만물로 시선을 돌리면, 곡성을 비롯한 소위 소멸예정지역들이 달리 보인다.

인가 증가 대책만 세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외한 생물들을 어떻게 잘 지켜낼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들지 말고, 만물을 위해 무엇도 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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