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세상은 좋은 곳이지요. 마릴라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는 세상엔 별로 좋은 일이 없다고 하셨어요. 기분 좋은 일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실망만 하게 된다고, 기대와 다르다고 말이에요. 맞는 말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거기에는 좋은 점도 있어요. 나쁜 일도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훨씬 좋게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224)

난 네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구나. . 하지만 못 간다고 해도 속상해하지는 마라. 어디에 있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니까. 대학은 그걸 좀 더 쉽게 해줄 뿐이지. 무엇을 얻는지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서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지. 인생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에 온 마음을 여는 법만 배운다면 인생은 풍요롭고 충만할 거야. 여기에서…. 그 어디에서도.


(255)

제가 그런 면이 좀 지나치다는 건 알아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면 기대감에 차올라서 하늘로 훨훨 날아가거든요. 하지만 그러다 쿵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져 버려요.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하늘을 나는 동안만큼은 정말로 멋진걸요. 저녁노을 위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쿵 떨어져도 괜찮을 정도예요.


(277)

가장 즐거운 날은 굉장하거나 근사하거나 신나는 일이 생기는 날이 아니라 목걸이를 만들 듯 소박하고 작은 즐거움들이 하나하나 조용히 이어지는 날이라고 생각해요.


(461)

그 순간 앤은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고 처음으로 길버트의 시선에 흔들려 창백한 얼굴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 드리워져 있던 베일이 걷히고 뜻밖의 감정과 진실이 드러난 것 같았다. 어쩌면 낭만적인 사랑은 백마 탄 기사님처럼 화려하고 조용하게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랑은 예상치 못했을 때 빛처럼 나타나 시와 음악이 있는 책장을 넘겨 버리고 평범한 산문처럼 나타날지도 모른다. 마치 초록색 꽃망울이 황금빛을 띠는 장미꽃으로 바뀌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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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나중에 알아볼 것들을 생각하는 일도 근사하지 않나요? 살아 있다는 게 기쁘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아요. 우리가 모든 걸 다 안다면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일도 없겠죠? 그런데 제가 말이 너무 많나요?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제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으세요? 아저씨가 그렇다면 조용히 할게요. 전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만둘 수 있거든요.


(62)

이런 아침에는 세상이 온통 사랑스럽지 않나요? 시냇물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와요. 시냇물이 얼마나 유쾌한지 아세요? 언제나 웃고 있어요. 겨울철에도 얼음 밑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요. 초록 지붕 집 근처에 시내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차피 여기서 살지도 못할 건데 무슨 상관이냐 싶으시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다시는 보지 못한다 해도 전 초록 지붕 집에 시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거예요. 만약 없었다면 그곳에 시내가 꼭 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늘 따라다닐지 모르거든요. 전 오늘 아침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 않아요. 아침엔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아침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무척 슬퍼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머니가 바라시던 아이는 바로 저이고, 여기서 언제까지나 살게 되었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에는 큰 위로가 됐어요. 하지만 상상의 가장 나쁜 점은 깨어날 때 마음이 아프다는 거예요.


(168)

어머, 어떤 일이든 기대하는 데 그 즐거움의 반이 있는 걸요. 혹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기쁨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실망할 일도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397)

전 초록 지붕 집에 온 뒤부터 실수를 많이 저질렀는데, 그 실수들은 하나같이 저의 큰 단점들을 고치게 해줬어요. 자수정 브로치 사건으로 제 것이 아닌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됐고요. 유령의 숲 일은 상상에 너무 빠져 드는 버릇을 고치게 해줬어요. 진통제 케이크 사건으로, 요리할 때 신중하지 못한 습관을 버리게 됐고요. 염색 사건을 겪으면서는 허영심이 없어졌어요. 이젠 더 이상 머리나 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오늘 실수는 지나치게 낭만을 찾는 습관을 고쳐 줄 거예요.


(428)

지난 한 해 동안 다들 열심히 잘해 주었어요. 여러분은 즐겁고 신나게 방학을 보낼 자격이 있어요. 밖에서 마음껏 뛰어 놀면서 다음 학년을 위한 건강과 활기와 포부를 가득 채우도록 하세요.


(472)

글쎄, 난 다이아몬드가 없어 평생 위안받지 못하더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긴 싫어. 난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충분히 만족해. 분홍 드레스를 입은 부인의 보석 못지않게 이 목걸이에 담긴 매슈 아저씨의 소중한 사랑을 난 알고 있으니까.


(475)

전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그저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 내고 새 가지를 뻗었을 뿐이에요. 초록 지붕 집에 있는 진짜 제 모습은 한결같아요. 제가 어디를 가든 겉모습이 어떻게 변하든 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요. 마음속엔 항상 어린 앤이 있어서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와 정겨운 초록 지붕 집을 날마다 더욱더 사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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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무관생도들 소설로 읽는 역사 1
이원규 지음 / 푸른사상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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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원규님의 책을 읽었단다. 이원규님이 쓰신 역사 소설과 평전을 몇 권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너무 좋아서 그의 다른 책들은 뭐가 있나, 이렇게 찾아보고 알게 된 책이 바로 이번에 읽은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란 책이란다. 이원규님이 쓰신 책들은 주로 일제 시대 독립 운동을 무대로 책들이라서, 책 제목을 보고 이번에도 그 시대를 쓰셨구나, 생각했단다. 그리고 늘 그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어 알려준 그런 책이었단다.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고 하면 언제를 이야기하는 걸까. 바로 1908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 받던 생도들의 이야기란다. 그럼,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꾸나. 소설의 형식을 띠었지만, 고증을 통해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구나.

 

1.

1908년 대한제국무관학교. 북악산 삼청동에 위치하고 있었단다. 당시 남아 있는 생도들은 고작 24명이었고, 교장은 노백린이라는 분으로 나중에 임시정부 국무총리도 하셨단다. 1908년이면 을사늑약은 이미 맺어진 다음이라서, 무관학교에서 일본인 파견 고관이 있었는데, 오구라 대위였어.

이응준. 이 소설의 첫 번째 중요 인물이란다. 평안도 농부의 아들로 어렸을 때 가출해서 무작정 한성에 왔다가 우연히 노백린이 그를 알게 되었고, 똘똘한 이응준을 무관학교의 이갑 참령에게 소개시켜 주어 이갑 참령이 자기의 집에 기거하게 하며 학교 공부를 시켜 주었단다. 보성 중학에 다니던 중에 무관학교로 편입하게 되었어. 그는 무관학교에서 지석규, 홍사익과 친해져서, 셋은 단짝 친구가 된단다. 지석규. 이 분의 당숙이 한글학자이자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이란다.

1908년 나라가 위태위태한 시기얼마 후 교장 노백린과 이갑 참령 모두 잘리고, 일본과 친분이 있는 이희두 장군이 교장이 되었단다. 그리고 1909년 학교는 폐교되었단다. 그렇게 생도들은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되었단다.

 

2.

학교가 폐간되고, 그들은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로 편입하게 된단다. 이때 애국심에 불타는 생도들은 고민들을 했단다. 편입하는 것은 나라에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일본을 배워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면서 편입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선배들도 그렇고, 주위의 어르신들도 그렇고, 마음에 늘 애국심을 품고 일본을 가서 일본을 배워 나중에 조선을 위한 일을 하면 된다고 했단다. 그렇게 몇몇 이들을 빼고 대부분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단다. 그렇게 도착한 도쿄. 5년제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 편입했고, 그 학교를 졸업하면 1년동안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단다.

대한제국의 생도들은 한국학생반이라고 따로 수업을 받았단다. 하지만 모든 수업이 일본말로 진행되어 쉽지 않았어. 육군중앙유년학교에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의 선배도 있었어. 김현충이라는 분인데 나중에 이름은 김광서로 바꿨어. 김광서의 도움으로 일본 생활을 적응하는데 생도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단다. 특히 주말에 외박할 수 있는 거처인 일요하숙을 알아봐 주어, 주말마다 한국에서 온 생도 동기들과 회포를 풀 수도 있었어.

1909 10월 학교의 분위기가 안 좋았단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소식이 전해진 거야. 한국 생도들은 겉으로는 표정 관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모두들 쾌재를 불렀단다. 하지만, 1910년은 암울한 소식도 전해졌단다. 한일 합병 소식. 이제 더 이상 조선이라는 나라는 대학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졌단다.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다음, 육군중앙유년학교는 더 이상 한국학생반을 두지 않았단다.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졌으니 말이야. 한국에서 온 생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일본생도들이 있는 반들에 배정받았어. 이젠 일본 생도들과 경쟁을 해야 했어. 일본어로 배우는데 일본 생도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었단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홍사익으로 전교에서 3등을 했다는구나.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이끌었던 이들 소식을 좀 이야기해주어야겠구나. 이갑 참령은 식구들 모두 데리고 독립운동을 마음 먹고, 북간도로 망명을 했단다. 이응준이 방학 때 한성 이갑 참령의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망명을 하고 난 뒤였어.

 

3.

세월은 빠르게 흘러, 과락이나 퇴교 조치된 생도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임관을 해서 소위가 되었단다. 지석규는 소대장으로 중국 땅에서 독일군과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단다.

연해주에 있던 이갑 참령으로부터 이응준에게 연락이 왔단다. 이갑은 자신의 딸 정희와 이응준이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사실 이응준이 이갑 참령 댁에서 지내면서, 이갑 참령의 딸을 동생처럼 여겼지만, 언젠가부터 다른 감정이 생겼었어. 정희도 이응준을 따르고 좋아했었단다. 그런 둘의 마음을 알았던 이갑 참령이 둘의 결혼을 먼저 주선한 거야. 이응준은 좋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단다. 왜냐하면 얼마 전 술기운에 유학생 김명순을 겁탈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신문에도 났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이응준은 속으로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정희와 혼인을 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갑 참령이 연해주 땅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이응준도 전쟁터에 참전하게 되었어.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연합국으로 이루어진 국제간섭군 소속으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연해주였단다. 그곳에 가서 여러 독립 운동가들도 만났고, 수소문 끝에 이갑 참령 댁에 들렀지만, 정희는 한성에 가 있어서 만나지 못하고, 장모님이 되실 이갑 참령의 부인만 만나고 발길을 돌렸단다. 그는 연해주에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는데, 러시아 공산주의 진영에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도 있어서 몹시 갈등했단다. 나중에는 자신도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적을 알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인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으니 말이야. 그것으로 마음 고생을 많이 해서 위장병까지 앓게 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단다.

조선 독립 운동은 국내외 여기저기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단다. 그런 와중에 1919 2 8일 일본 도쿄 한바닥에서 유학생 중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이 일어났단다. 그리고 곧이어 3 1일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단다. 이때가 조선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고 독립운동가들도 생각했어.

한성에 있던 김광서는 일본에 있는 지석규, 이응준, 홍사익에게 조선으로 오라고 했단다.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이라고 말이야. 지석규는 스스로 위장을 망가뜨려 병가를 내고 조선으로 돌아왔단다. 이응준은 이미 전쟁에서 위장병을 얻어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쉽게 국내로 돌아왔단다. 그때 정희는 3.1 운동으로 몸이 안 좋아져서 어머니의 고향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응준도 정희를 만나서 평양으로 갔단다. 하지만 홍사익은 심한 갈등을 했단다. 일본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 받고 조선인 최초로 육군대학 입학 후보가 되어 있었거든. 그는 결국 육군대학 입학을 위해 일본 잔류를 결정한단다. , 그 육군대학은 일본의 육군대학이 아니더냐.

 

4.

김광서와 지석규는 경의선을 타고 곧바로 망명길에 올랐단다. 그 기차에 이응준도 타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았단다. 다음 열차를 기다렸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단다. 이응준은 자신의 위장병이 아직 낫지 않고, 정희와 결혼한 지도 얼마 안되어 나중에 합류하기로 마음 먹었단다. 합류하면 되지, 시기가 중요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구나. 스멀스멀 일어나는 자기합리화. 이응준은 평양에 있으면 권총 분실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고, 김광서와 지석규의 망명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측근이었던 그도 헌병 조사를 받았단다. 그가 난처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조선군 사령관으로 파견 나온 일본인 우쓰노미야의 도움으로 쉽게 풀려났단다. 우쓰노미야는 계속 이응준을 도와주고 회유를 했단다. 이응준은 그 고마움을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대로 조선군 사령부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어린 시절 대한 제국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가 배신할 수 없다고 하는 우쓰노미야가 어떤 놈인지 모른단 말인가. 뻔히 알면서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자기합리화밖에 안 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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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88)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대표적 존재인 이응준과 김석원은 우쓰노미야의 회유책에 그렇게 발목을 잡혀버렸다.

두 장교는 그렇게 우쓰노미야의 선한 면만 바라보았지만 그 자는 제암리 학살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그 무렵 조선민족을 절망으로 몰고 갈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었다. 홍범도의 독립군을 도운 만주 조선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출병을 본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만주 출병은 그가 조선군사령관직을 떠난 직후 실현되었다. 일본은 훈춘사건을 조작해 대규모로 출병했다. 그러나 독립군을 뒤쫓다가 챵산리(청산리) 등지에서 대패해 오히려 3천여 명이 전사했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만주의 조선인 3만여 명을 보복적으로 학살했다. 그것이 경신참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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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망명을 한 김광서는 이름을 김경천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지석규는 지청천으로 하려다가 씨 성이 드물어서 이청천으로 활동을 했단다. , 지청천? 이 사람이 독립운동가 지청천이었던 것인가. 책을 잠시 두고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독립운동가 지청천이 맞더구나. 아빠가 그 분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거든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분을 알게 되어 다행이구나.

김광서와 지석규는 신흥무관학교에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많은 조선이 장교들을 배출하였단다. 그리고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어. 김광서는 간도 지방에서 백마 타고 달리는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단다. 지석규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연해주 고려혁명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많은 학생들을 배출했단다.

일본땅에 머물렀던 홍사익은 결국 육군대학에 입학을 했단다. 똑똑하긴 엄청 똑똑했나 보구나.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본사람과 경쟁해서 잡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독립 운동을 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은 모래성이었던 것이구나. 그 후로 홍사익은 국내와 만주와 일본을 오가면서 승승장구하였단다. 물론 일본 장교로써 말이야. 그는 나중에 그 어렵다는 별 두 개, 소장까지 진급했단다.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에 가장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지. 물론 일본 장교로써 말이야. 그는 만주국에서 관동군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독립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했단다. 양심은 완전히 갖다 버렸구나.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에 이종혁이라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후예였어. 그는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국제간섭군으로 연해주에 왔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탈출하여 독립군을 찾아왔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석규와 해후를 했고, 이후 줄곧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대. 출감 이후 후유증으로 병에 걸려 죽고 말았구나. 이렇게 의로운 사람들은 어찌 이리 쉽게 죽는가.

이응준은 여러 차례 독립 운동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단다. 지석규가 두어 차례 밀사를 보내 독립 운동을 하러 자신에게 오라고 했거든. 하지만 이응준은 거절했단다. 지석규는 이응준과 홍사익이 친일을 하며 일하고 있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단다.  그 옛날의 결의는 어디로 갔는가. 이응준은 일본인 장교가 되어 대좌라는 높은 계급까지 올라갔단다. 이응준뿐만 아니라, 일본을 배우고 일본에 맞서 싸우자고 했던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많은 이들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친일을 했단다. 또는 일본에 순응하면서 지냈단다. 그들의 마지막 양심은 고작 돈을 보아서 살림이 어려워진 지석규와 김광서의 집에 보내주는 것이었어.

 

5.

세월은 흘러 흘러 1940년대일본 장군으로 승승장구하던 홍사익은 필리핀포로수용소장으로 발령 받았단다. 가기 전에 이응준을 만났어. 둘은 홍사익이 필리핀포로수용소장으로 가는 것이 승진을 아니고, 좌천이라는 것을 알았을 거야. 1940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전세를 기울고 있었고, 언제 전쟁에서 질 지 모르는 상황에 외국 험지로 보낸다는 것은 책임을 다 떠넘기려는 의도인 것처럼도 보였단다. 결국 홍사익은 필리핀에서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었어. 그래도 돌아갈 줄 알았던 것 같아. 하지만 그는 전범 재판 후 그곳에서 사형을 당했단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준다고 적군에 충성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지막의 모습에 누가 슬퍼하겠는가. 홍사익의 후세들도 전쟁이 끝나도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일본에서 살았다고 하는구나.,

지석규는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어. 광복군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모은 단체로 국내 진공 작전 준비에 힘을 쓰고 있었어. 그런데 그 와중에 해방이 되었단다. 자신들의 손으로 해방이 되었어야 하는데, 외세의 힘으로 해방이 된 점을 아쉬워했어. 그들의 아쉬움은 곧 불행의 현실이 되었어. 한반도는 미군정과 소련에 의해 둘로 나뉘고, 미군정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어. 임시정부 요원과 독립군들은 귀국을 하루 이틀 미루다가 마지못해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미군정의 앞잡이가 권력을 잡고 있었어. 지석규는 1947년 개인자격으로 입국했고, 지청천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했으며, 국회의원 등도 했지만, 독립운동 때만큼 부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단다. 그리고 1957년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

조선 해방 후 이응준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조선 해방과 동시에 자신이 벌 받을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미군정에서 그에게 육군창립을 도와달라고 했어. 그래서 참여하면서, 그는 대한민국 군인으로 또 잘 나가게 되었지. 그뿐만 아니라 친일을 했던 그의 동기들도 많은 요직을 차지했단다. 해방이 아니라 침략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구나. 그는 뿐만 아니라 필리핀에서 죽은 홍사익 구명 운동도 했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구나. 이런 이들은 또 오래도 사는구나. 1985 9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친일을 하고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우리나라, 부끄럽구나.

김광서의 최후가 불행했단다. 연해주 극동사범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간첩죄로 누명을 썼다가 이후 감옥을 오가는 신세가 되어 1942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김광서와 이응준의 삶을 비교해 보면, 분명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없는 게 확실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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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

김광서는 최후가 불행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사범대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936년 간첩죄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2년 반의 금고형을 받고 복역했다. 1939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으나 그해 12월 다시 체포되어 8년의 강제수형령을 받고 카라간다 감옥으로 수용됐다가 거기서 북부 시베리아 코미 자치공화국으로 이송되었다. 철도 노역을 했고 1942 1 26일 철도수용소 부설병원에서 영양부족에 따른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1956년 유족의 탄원을 받은 소련 군사법원은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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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있단다. 자신의 몸을 다 받쳐 나라를 위해 일을 하신 분들은 꼭 잊지 말아야겠지만, 기회주의자로 적국에 아부하고 동기들과 나라를 배신한 이들의 이름도 잊지 말아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1908년 봄, 한성(漢城)

책의 끝 문장 : 모두 광복되고도 한참 늦어진 수훈(受勳)이었다.

이응준은 권총 분실 사건과 우쓰노미야에 접근한 일로 인생의 길을 180도 바꿀 수도 있었다. 우선 임시정부 밀사인 최성수와 더불어 만주로 탈출할 수 있었다. 3.1운동 무력탄압의 원흉 우쓰노미야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지석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를 저격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우쓰노미야에게 인간적 배신을 할 수 없었다면 그가 떠난 뒤 독립운동 전선으로 갈 수도 있었다. - P290

염창섭은 일본영사관에 소속되어,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대를 순회하며 동포들에게 만주국 건설을 찬성하게 지도하고 취약지구에 집단부락을 만드는 등 친일 행위를 하고 있었다. 원용국은 지린성 판스현에서 동포들을 회유해 항일무장세력이 발을 못 붙이도록 자위단을 조직하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배 학년 중 우등생이었던 윤상필은 관동군 참모부 조선반에 속해 있었다. 재만동포들을 만주국과 일본군 쪽으로 끌어당겨 항일세력을 와해시키는 온갖 공작을 기획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P338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이제 천명을 안다는 오십 줄 나이에 이르렀고 절반 이상이 퇴역했다. 현역장관들은 대부분 고국에 돌아와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뽑아내는 병사(兵事) 업무를 맡거나 전문학교와 중학교의 교련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퇴역한 사람들도 대개는 교련 교관 등 육사 출신에 걸맞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독립투쟁을 하고 민족혼 교육에 매달렸던 조철호가 세상을 떠나 그런 역할을 할 위인은 이제 없었다. 아오야마 묘지에서 뒷날 조국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던지자고 한 맹세는 대부분이 추억으로만 생각할 뿐 몸도 정신도 이제 일본의 통치에 젖어 있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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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책을 펼쳐 들면 순식간에 나만 남습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한낮의 카페 한가운데 좌석에서든, 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울리는 한밤의 방 한구석에 홀로 기대 앉아서든, 모두 그렇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경험이지만, 그 고독은 감미롭습니다.


(13)

저의 서재에는 물론 다 읽은 책도 상당하지만 끝까지 읽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서문만 읽은 책도 있고 구입 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는 것, 서문만 읽는 것, 부분부분만 찾아 읽는 것, 그 모든 것이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25-26)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중세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독일인의 사랑>을 썼던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말했어요.


(68)

독서를 즐기는 것과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려운 책을 통해 지적인 성취감을 얻는 동시에 독서력에도 도움을 받는다면 그다음에 다른 책을 훨씬 더 즐겁게 읽을 수 있거든요. 가끔은 생소하고 어려운 분야의 책에 도전해보세요. 일단 시작해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힘든 일은 아닐 겁니다.


(77)

왜 하필이면 3분의 2 지점을 보는 거냐면, 저자의 힘이 가장 떨어질 때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무슨 책이든 시작과 끝은 대부분 나쁘지 않습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렇습니다. 원고를 배열할 때 잘 쓴 걸 앞에 둡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앞쪽부터 읽어나갈 테니까요. 한편 맨 뒤부터 슬쩍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맨 뒤에 넣죠. 바로 그래서 3분의 2쯤을 읽으면 저자의 약한 급소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마저 훌륭하다면 그 책은 정말 훌륭하니까 그 책을 읽으시면 됩니다.


(98)

과학 분야 같은 것도, 중고등학교 때 기본적인 책을 재미있게 읽었더라면 나중에 책 읽기 훨씬 좋았을 텐데 싶어요. 지금은 독서에서 넓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대적으로 한창 책에 깊이 빠져든 중고등학교 때 저는 깊이를 더 중시했던 것 같아요. 그게 좋기도 했지만, 특히 십 대에서 이십 대는 책을 넓게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143)

낮 동안에 일하느라 힘들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간다거나 그런 게 우리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습관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오히려 쩔쩔매는 시간이에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죠. 그런데 패턴화되어 있는, 습관화된 부분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 인생은 너무 행복한 거죠. 시공간 속에서 매번 판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실존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갑옷을 두르는 게 최상의 행복 기술인데 그 습관 중에 독서가 있다면 너무 괜찮은 거죠. 예를 들어 매일매일이 습관으로 빼곡한데, 모처럼 이번 달 말일에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 책을 한번 읽어보자. 그러면 책 읽는 게 행복이 아니라 쾌락인 거예요. 그런데 습관화되어 매일 책 읽는 사람이 있다고 쳐보세요. 저녁 먹기 전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면 책을 자동적으로 펼치는 거예요. 그건 행복인 거예요. 똑같이 책을 읽어도 쾌락이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다만 쾌락은 지속 불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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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산행 2 - 제주에서 울릉도까지, 뭇 생명과 함께 걷는 남쪽 숲길 18곳 게으른 산행 2
우종영 지음 / 휴(休)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나무 의사 우종영님의 글은 참 담백하고 좋단다. 십여 년 전에 처음 그의 책을 읽고 좋았던 기억이 있다가, 한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고 있다가 작년에 신간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라는 책을 오랜만에 읽었어. 그리고 우종영님의 책을 검색해봤더니, 아빠가 읽지 않은 책들이 더 있더구나. 이번에 그 중에 하나 <게으른 산행 2>를 읽었단다. 전작 <게으른 산행>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2권을 읽는데 너무 오래 걸렸구나. 1권에서는 경기도와 강원도에 있는 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2권에서는 중남부 지역의 산들을 소개해준다고 하는구나.

작년부터 계속되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산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단다. 아빠도 산행을 좋아해서 가끔 산행을 간단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적은 이른 새벽이나 야간 산행을 가곤 하는데, 산은 어느 때 가도 참 좋은 것 같구나.

특히 요즘 같은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칼바람 자체만으로 좋지만, 눈 덮인 풍경이 감탄을 절로 나게 한단다. 추위의 고통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눈 덮인 겨울 산행의 장점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단다. 그것은 산과 나무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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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렇게 푹 쌓인 눈 위를 걸으니 옛날 산 친구 생각이 난다. 백두대간은 물론이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녀본 후 그가 던진 한마디.

앞으론 눈 쌓인 겨울산만 다니련다.”

연유를 물으니, 눈이 쌓이면 나무뿌리를 밟지 않아도 되고 흙이 패지 않으니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하다는 얘기다. 미안한 마음 없이 나무의 진면목을 바라본다는 것, 겨울산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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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시작은 제주도 한라산부터 시작한단다. 아빠도 예전에 눈 잔뜩 덮인 한라산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의 모습은 정말 잊을 수가 없더구나. 새파란 하늘과 눈 덮인 한라산의 조화, 멀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아빠의 영혼의 찌든 때를 날려버리는 기분이었어.

알면 보인다고, 산에 오르면서 나무들의 이름도 알면 더 멋진 산행이 되겠지만, 몰라도 좋단다. 곧게 뻗은 나무가 있으면 곧은 성품을 가진 나무겠거니 생각하고, 여기저기 가지를 친 나무가 있으면 푸근한 마음을 가진 나무겠거니 생각하고 말이야. 지은이 우종영님은 나무 의사답게 나무 이름들을 정말 많이 알고 있더구나. 이런 사람의 산행기에는 나무 이름 하나하나 불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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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협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탐스럽게 생긴 담팔수가 나그네를 반기고,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 황칠나무, 참식나무, 조록나무, 아왜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사이사이에는 예덕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멀구슬나무, 머귀나무, 때죽나무, 자귀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 굴피나무, 합다리나무, 꾸지나무, 곰의말채나무, 까마귀베개 같은 낙엽 지는 나무가 살고 있다. 숲 바닥에는 바람등취(후추등)이 바위를 뒤덮고, 맥문아재비가 보석같이 영롱한 열매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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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대표적인 것이 한라산이지만, 수많은 오름들도 있단다. 예전에 읽은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도 오름들에 대한 찬사가 있었는데, 우종영님도 오꼬메오름 등 여러 오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단다. 다음에 제주도를 가게 되면 여러 오름들도 계획에 넣어봐야겠구나.

울릉도도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으로 봉우리가 하나 있단다. 성인봉이라고 부르는데, 산이 아니고 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아빠는 그 성인봉의 해발고지가 그리 높지 않은 줄 알았단다. 그런데 성인봉의 높이가 웬만한 산보다 높은 984미터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왜 산이란 이름이 아니고, 봉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그 이유는 산괴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 잘 이해는 가지 않더구나. 그냥 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산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제주도 하면 한라산, 울릉도 하면 성인산. 이렇게 말이야. 성인봉이라고 하니, 아빠처럼 잘못 알고 있는 이가 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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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성인봉은 왜 산이 아니고 봉일까? 산의 격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이곳의 높이는 984미터이다. 1000미터에서 16미터 못 미치는 큰 산이다. 사방으로 갈래를 친 겹산인데다, 산이 험준하고 계곡도 깊다.

산과 봉()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말이 많지만, 일단 산이라고 하면 산괴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있어야 한다. 한라산은 한라산을 떠받치고 있는 넓은 대지가 있기에 산이며, 울릉도는 섬 자체가 산으로 떠받칠 땅이 없기에 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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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는 밤나무뿐만 아니라 너도밤나무도 많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고 하여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해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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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29)

옛날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라고 하면서 만약 100그루를 심지 못하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을 사람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하루 만에 전부 심었다. 심은 밤나무에서는 싹도 나고 잘 자랐다.

어느 날 산신령이 찾아와서 그동안 심어놓은 밤나무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아흔아홉 그루밖에 되지 않았다. 산신령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여러 번 세어도 아흔아홉 그루밖에는 안 되는 밤나무가 그사이에 한 그루 더 생길 수는 없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심기는 100그루를 심었지만 그사이 한 그루가 말라 죽은 것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옆에 서 있던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입니다.”하고 외쳤다. 산신령은 다시 그 나무에게 밤나무가 맞는지 확인했다. 그 나무는 자기도 밤나무라고 주장했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이름 붙여주고 잘 가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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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도와 울릉도를 지나서는 계룡산을 시작으로 선운산, 백암산, 조계산, 두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주흘산을 시작으로 주왕산, 비슬산, 금정산, 지리산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산들을 소개하고 있단다. 저 아랫동네에 있는 산들은 거리가 있다 보니, 아빠도 많이 다녀보지는 못한 것 같구나. 지리산을 좋아해서 지리산만 여러 번 가보고 말이야. 이 책에 나와 있는 산들의 사진을 보니, 다들 멋지구나. 꼭 가봐야 할 산들 목록에 적어두어야겠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쉽게 산에 갈 수가 있어서 좋구나. 작년에는 너희들과 두어 번 집 근처 산에 갔다 오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나라 산은 그렇게 많은데, 또 높은 산을 별로 없어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산들이 대부분이란다. 이런 조건을 갖춘 나라가 많지 않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많은 사람들인 것 같구나.

산 이야기를 하니 또 산에 가고 싶구나. 이제는 안 가본 산들을 한번 가봐야겠구나. 그리고 올해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산의 정기를 백 퍼센트 다 들이마시고 싶구나. 곧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PS:

책의 첫 문장 : 사람 이름이나 노래 제목, 책제목에 이르기까지 이름이란 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책의 끝 문장 : 계절은 어느 때고 좋으나 여름 집중호우 때는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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