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박사와 하이드 마카롱 에디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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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어렸을 때 책 읽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어떤 여름에 읽었던 책들이 기억이 나는구나.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였던 것 같아. 여름방학인데, 친구들과 노는 것도 지치고 딱히 할 것이 없을 때 외삼촌댁에 갔다가 사촌형들이 읽던 책들을 살펴보게 되었단다. 그 중에 세계문학 문고판들이 눈에 들어왔어. 좀 읽다가 어려워서 관두기 일쑤였는데, 셜록 홈즈 시리즈를 비롯하여 몇 편은 눈에 들어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단다. 그 중에 하나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였어. 여름날 방안에 선풍기 틀고 배 깔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 보던 기억이 생생하구나.

오늘날 <지킬박사와 하이드>라고 하면 원작 소설보다 각색된 뮤지컬로 더 유명하단다. 지금까지 본 뮤지컬을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아빠도, 그 한 손가락이 바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이니 말이야. 어떤 사람은 그 뮤지컬만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본 사람도 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유명해진 뮤지컬 덕에 원작 소설도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구나.

아빠도 어린 시절 읽어보긴 했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었어. 얼마 전에 <프랑켄슈타인>을 읽었잖아. 그런데 문득 이 소설이 연상되더구나. 그래서 읽고 싶은 마음을 좀 더 키워서 이번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을 읽게 된 것이란다. 예전에 아빠가 초등학교 때 읽었을 때 소설의 제목은 하이드가 아니고 하이드 씨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하이드더구나.

지은이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소설이 유명해서 지은이는 누구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이름이 낯익지? 책 뒤편의 작가 소개를 읽어봤는데, 아니, 이럴 수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바로 <보물섬>을 지은 그 사람이었던 거야. 얼마 전에 너희들도 <보물섬>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잖니오호, 신기하구나. 너희들에게 당장 이야기해주었잖아. 아빠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ㅎㅎ 바로 너희들이 얼마 전에 읽은 <보물섬>의 지은이야그 사실을 안 너희들도 덩달아 좋아하고.. 별 것 아니지만,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기쁨에 작은 행복감마저 느껴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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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그럼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해줄게. 이 책의 제목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이지만, <지킬박사와 하이드>만 있는 것은 아니고, 지은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중단편을 엮은 책이란다. 그래서 몇 편의 소설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개 이야기해줄게.

처음은 당연히 <지킬박사와 하이드> 변호사 어터슨은 사촌 엔필드로부터 경험담을 하나 들었어. 어떤 밤에 아이를 짓밟는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모습이 혐오스럽게 생긴 사람이라면서 그 사람의 이름이 하이드라고 했어. 어터슨은 하이드를 본 적은 없지만, 그 이름은 잘 알고 있어서 놀랐어. 왜냐하면 어터슨의 오랜 친구이자 고객인 헨리 지킬 박사의 유언장에 그 이름이 적혀 있었거든. 헨리 지킬의 유언장에 따르면 자신이 죽거나 실종이 되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하이드에게 주라고 했어.

사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터슨은 지킬의 유언장을 믿을 수 없었어. 더욱이 최근에 지킬의 행동이 좀 이상했거든.. 그리고 사람들과 만남을 피하고 은둔의 생활을 이어와서 더 이상했지. 어터슨은 또 다른 친구 래니언 박사를 찾아가 지킬에 대해 물어보니, 만난 지 오래되었다고 했어.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지킬이 활기를 되찾고 옛모습을 되찾은 듯 했어.

그런데 어떤 유명한 하원 의원이 죽은 사고가 일어났어. 그 범인은 바로 하이드였어.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 지킬은 또 다시 실험실에 은둔 생활을 시작했어. 어터슨은 다시 걱정을 했는데, 어느날 지킬의 하인 풀의 연락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갔어. 실험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약품들을 사오라고만 시킨다는 거야. 그리고 목소리가 지킬 박사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지. 어터슨이 와서 들어보니 목소리는 분명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하이드의 목소리였어. 하이드가 지킬을 죽였다고 확신했어. 무서웠지만 어터슨과 모여있던 사람들은 합심해서 문을 밀치고 지킬의 실험실에 들어갔어.

지킬은 없었어. 하이드만 쓰러져서 죽은 듯 했어. 지킬이 그 자리에 없다는 이야기를 아직 살아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어. 그런데 그 실험실에는 지킬이 쓴 장문의 편지가 있었단다. 편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어. 지킬 박사는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다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하는 약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어. 그래서 하이드로 변신을 한 것이지. 지킬 박사는 명망 있고, 존경 받는 사람이었어. 그만큼 어쩌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 점잖게 살아야 했지. 하지만, 하이드로 변신을 하면 악행도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는, 어떤 면에서 보면 자유를 누렸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다시 약을 먹고 지킬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되니까

그런데 어느날 잠에서 깨어났는데,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하이드로 변하게 된 자신을 보았지. 당황했을 거야. 다시 약을 먹고 지킬 박사의 모습으로 변신했어. 그리고 한 동안 지킬 박사는 하이드로 변신하지 않았어. 다시 지킬 박사로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욕망은 그를 움직였단다. 다시 하이드로 변신했어. 심지어 사람까지 죽였어. 그리고 이젠 약을 먹지 않고 있어도 툭하면 하이드로 변했어. 그래서 다시 지킬로 바꾸려고 약을 먹고, 하지만 또 얼마 안 있으면 또 하이드로 변했어. 그리고 이젠 약도 들지 않았어. 예전에 만들었던 약을 다시 만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지. 실험실에 하이드의 모습으로 숨어 지내던 지킬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뿐이었단다.

여기까지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란다. 인간은 누구나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그리고 이중성 중에 하나는 겉으로 잘 나타내지 않고 말이야. 겉으로 보여주지 않는 그 모습의 이름은 욕망인가? 그 욕망을 참으며 사는 것이 또 사람인 것 같구나. 가끔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이 터지는데, 그들에게 마약은 혹시 하이드로 변하게 했던 약물은 아니었나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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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 소개된 <시체도둑>은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는구나. 전직 의사였지만 지금은 시골에서 술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페츠. 그 시골에 온 옛 동료 맥팔레인을 만나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 페츠의 친구들은 그들의 관계를 추측해 보았어. 페츠와 맥팔레인은 의사 초년생일 때 그들의 스승(유명한 사람)의 심부름을 도맡았어. 해부 실험으로 쓸 시체를 몰래 거래하는 일이었어. 그런데 어느날 페츠가 알고 있던 사람이 시신을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 며칠 전만 해도 건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츠는 이 시신들이 어떻게 오는지 궁금했고, 이 일에 대해 신고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거야. 어떤 날은 맥팔레인을 괴롭혔던 사람이 시신으로 왔어. 페츠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지만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단다. 나중에는 그들의 스승이 묘지에 있는 시신까지 가져오라고 시켰단다. 페츠와 맥팔레인은 두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들은 비가 쏟아지는 짙은 밤에 찾아가서 이제 막 장례식장을 마친 묘지를 파내서 시신을 가지고 왔어. 그런데 시신을 확인해보니, 얼마 전에 이미 시신을 해부까지 했던 맥팔레인을 괴롭혔다가 죽은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야. 이 일인 있고 페츠는 의사를 그만두고 시골에 살게 된 것이고, 맥팔레인은 계속 의사일을 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였어. 아빠가 줄거리를 제대로 기억하고 쓴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이야기였단다.

….

또 하나 <오랄라>라는 소설도 괜찮았어.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소재가 조금 식상하긴 했지만, 당대에는 호기심 가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부상당한 장교가 의사의 조언으로 시골의 어떤 집에 요양을 가기로 했어. 그 집은 중년의 안주인과 아들 펠레페와 딸 오랄라가 있었어. 시골집의 안주인은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졸기나 하는 그런 사람이었고, 아들 펠리페는 약간 덜 떨어진 사람이었어. 그에 반에 딸 오랄라는 지성과 미모를 고루 갖춘 사람 이었단다. 장교도 딸 오랄라를 한 눈에 반했어. 그래서 딸 오랄라와 썸씽이 이루어지고, 오랄라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인지 피하게 되고...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란다. 이런 스토리는 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어. 그래서 아빠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소재가 조금 식상하다고 한 것이란다. 그래도 이 이야기도 나름 재미있었단다.

….

이렇게 세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아빠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책을 덮고 난 후 기억이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빨리지는 것 같구나. 메모를 해놓지 않으면 줄거리가 가물가물하구나. 앞으로 메모를 잘 해놓던지, 아니면 일고 바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하던지 해야겠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 어터슨 변호사는 무뚝뚝하게 생긴 사람으로 밝게 미소 짓는 법이 없었다.

책의 끝 문장 : 윤리적인 편협함 따위도 결코 없었고, 삶의 더 큰 제약들을 말하는 대신 그저 넌지시 알리거나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아라베스크에서 감지하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느낌을 전달했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외모를 보면 뭔가 정상이 아닙니다. 뭔가 불쾌하고 뭔가 아주 혐오스러워요. 이렇게 싫다는 느낌을 받은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는데 그 이유를 딱히 알 수가 없어요. 어딘가 기형인 게 분명해요. 어디라고 꼬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하여튼 기형의 분위기가 강하게 납니다. 정말 특이하게 생긴 사람인데 저로서는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네요. 그래요, 할 수가 없어요. 설명이 안 되네요.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눈 앞에 생생히 떠오르거든요." - P35

그 진실이란,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내가 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 지식이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기 대문이다. 같은 선상에서 혹자는 나를 뒤따를 것이고, 혹자는 나를 앞질러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감히 추측건대 인간은 결국 여러 개의 모순되면서도 각기 독립적인 인자들이 모인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내 경우, 내 삶의 본성이 한 방향으로만, 오직 한 방향으로만 절대적으로 전진했다. 그것은 도덕적 측면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나란 인간 속에서 철저하고 근본적인 인간의 이중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 의식 속에는 서로 갈등하고 있는 두 개의 본성이 있으며, 비록 내가 그중 어느 한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양쪽 모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찍이 애 과학적 발전의 경로를 통해 두 본성을 분리하는 기적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나는 그러한 몽상을 즐기곤 했었다. - P106

그러나 나는 지금 고백함에 있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런 과학적 부분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 인간은 인생의 불운과 고난을 영원히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 그 짐을 던져버리려고 시도하면 그것이 더욱 낯설고 더욱 끔찍한 무게로 되돌아와 우리를 짓누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행히도, 내 이야기를 들으면 자명해지겠지만, 그 발견이 결국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자연적 육체에서 정신을 구성하는 어떤 힘이 발산되어 빛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뿐 아니라 그 힘의 주도권을 빼앗은 후 제2의 형태와 모습으로 대체하는 약을 제조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제2의 형태라는 것 또한 내 영혼의 근저에 있는 요소들을 표현하고 그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기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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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면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학창시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때가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33, 34)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인입니다.

(81)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107)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 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차가 점차 풍화되어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내 경우는 그런 문제로 신경 쓰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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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남자들마다 끌리는 유형은 각기 다르다.

(144)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162)

그러나 시간이란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간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문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179-180)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비극까지도.

(210)

시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야. 쉰 살은 돼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거지. 예순은 새로운 마흔이야시간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시간도 있다. 가령 손목의 요골동맥 바로 옆에 시계의 앞면이 오도록 차는 경우, 이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며, 기억과 맺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기묘한 일이 일어났을 때 새로운 기억이 느닷없이 나를 엄습했을 때 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마치 강물이 역류한 것 같았다.

(242)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나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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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스탠은 이야기 시작부터 독자들과 은밀하게비밀을 공유한다. 만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슈퍼히어로들을 내복 입은 캐릭터들이라고 부프며 그런 캐릭터는 흔해 빠졌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캐릭터는 조금은다르다!:라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길고 긴 설명을 하는 동안 스탠은 이미 독자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구별되는 스파이더맨의 분위기와 배경이 형성되었다. 그의 익살스러운 말투는 의도적으로 느긋한 분위기를 만들며 이 히어로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강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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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225)

편집자이자 아트 디렉터인 스탠은 신뢰하는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과 일하며 마블의 목소리와 스타일을 이끌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면, 그는 일부러 그 작가 또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마블 특유의 작업 방식을 밀어붙였다. 예를 들어, 스탠은 만화책 산업에서 가장 독특한 그림 실력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스타일리스트 조지 투스카의 유려한 작품들을 일찍이 알아보았고, 곧 투스카의 그림을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데어데블>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진 콜런은 이렇게 말했다. “스탬은 항상 (투스카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만화가들도 그렇게 그리기를 바랐습니다.” 스탬은 이러한 관리 방식으로 마블의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반면, 일러스트레이터들로 하여금 그가 원하는 그림 스타일을 알려주어 작업을 빠르게 끝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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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훗날 DC의 대표 제넷 칸은 1950년대 이후의 만화 세계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스탠을 언급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만화 속 캐릭터들은 저도 모르게 그 시대의 특색을 띠게 되고 그런 특색들의 대변인이 됩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이 어떤 캐릭터가 신화의 일부가 될지 그토록 확실히 구분해내는 이유예요. 스탠 리의 캐릭터들은 1960년대를 대표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의 반체제적인 감정과 소회감, 자기를 비하하는 모습을 잡아냈지요. … 입 냄새와 여드름, 거친 생각, 어린 나이 등 당시 청년들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자신들의 아픔을 대신해줄 상징물을 원했고, 스탠은 그걸 캐릭터들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마블의 최대 적수이자 경쟁자가 보내는 나쁘지 않은 찬사였으며, 만화 산업이 극복해야 할 저급문화 인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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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이 특별한 <스파이더맨>을 출판함으로써 스탠은 코믹스 코드를 현대문제로 끌어왔을 뿐만 아니라 같은 주제의 만화를 작업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던 DC 코믹스를 마블이 앞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DC의 편집장 카민 인판티노는 마약에 관한 내용을 다룬 마블을 매도하면서 그런 이야기가 만화책을 읽을 아이들에게 특히 유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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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그는 직원들이 새로운 일에 아주 열성적으로 도전하도록 만들었어요.” 스탠과 커비 모두와 함께 일했던 작가 마크 에바니어가 말했다. “직원들은 간혹 편집자들을 대할 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만, 스탠에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토머스도 스탠에 이어서 직원들에게 지지를 얻었지만, 한 달에 4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대량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출판 일정은 여전히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었다. “스탠이 편집장으로 있었을 때 발휘하던 힘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토머스가 회상하며 말했다. “하지만 난 누구에게도 겁먹지 않았어요. 어느 누가 나보다 더 스탠과 가까이 지내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아주 편안했고, 그렇게 불안해했던 적은 거의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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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스탠의 독특한 목소리가 만화계를 장악했다.

그는 대중문화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극성스러운 유명인 문화(유명인들의 이름이 과도하게 거론되고 사생활까지 관심을 받는 현상)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일 청소년과 대학생 연령대의 독자들이 스탠에게 그들의 리더가 되어주길 원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 역할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든든한 왕이 되어야 했다. 마블 만화책 속 문장들을 통해서나 미국 전역의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며 형성된 이미지로나, 스탠은 자신의 출판사와 직원들보다 더 큰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스탠 리는 만화 산업을 바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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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 개인적인 확신을 유지하며 글을 쓴다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 대화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그는 캐릭터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정말로 내 모습이었다. … 그들 하나하나가 나와 같았다. … (하지만) 특히 스파이더맨의 삶은 내 자서전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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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SLM이 실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탠의 경력이 끝나기 일보 직전 같다고 생각했다. 만일 정말 그랬다면, 그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스탠은 자기만의 슈퍼히어로 체인점을 갖기 위해 창작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기반을 다지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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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스탠을 만나보니, 10대 시절부터 배우가 되기를 꿈꾸었던 열망으로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성장했으며, 그것이 훗날 유명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탠은 어릴 적에 주변에서 보아왔던 뉴욕 특유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가면은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도중에 벗겨졌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신중했고, 사려 깊었으며, 마치 그 모든 세월 동안 그가 얻은 행운을 믿지 못하겠으며 어째서 수백, 수천 명이나 되는 팬들이 자신을 보려고 줄을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질문에 대답했다. 스탠의 젊고 긍정적인 가치관은 허풍을 떨며 과장스럽게 보이던 대중적 이미지를 상쇄시켰다. 9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이제 귀도 잘 들리지 않았고 2012년에 삽입한 심박 조율기가 그의 심박 속도를 조절해주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대중들 앞에 나왔고 마블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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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5-25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벤져스 엔드 게임 2번이나 봤습니다.ㅎㅎ

bookholic 2019-05-25 20:55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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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유홍준님의 책을 읽었단다. 아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유명한 시리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이후 그가 쓴 책들을 읽곤 했단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읽었어. 이 책에 아빠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절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란다.

언젠가부터 절이 좋아졌단다. 절이 주로 한적한 산 속에 있고, 절에 가면 평온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런가아무튼 절이 좋아졌어. 그래서 너희들과 여행을 가게 되면, 주변에 괜찮은 절이 있나 알아보고, 절을 찾게 된단다. 요즘에는 가끔씩 108배도 하곤 하는데, 그러면 몸과 마음에 잠시 안정을 찾는 것 같았어. 예전에 심인보님의 <곱게 늙은 절집>이라는 책도 괜찮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유홍준님은 절 여행기를 어떻게 맛깔나게 쓰셨나? 궁금하더구나. 그래서 주문을 해서 읽었단다.

이번에 읽은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순례>는 작년에 우리나라 산사 일곱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출간한 책이란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에서 절에 관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고 일부 내용들을 수정해서 출간한 것이라고 했어. 이런 것을 사실 아빠가 책을 사기 전에는 몰랐어. 책에 대한 내용이나 차례 같은 안보고 그냥 샀거든대부분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일 텐데, 처음 읽는 것처럼 읽었단다. 아빠의 기억력이 그렇지 뭐아주 간혹, ‘맞다, 이런 내용이 있었지…”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적도 있긴 했었지만, 대부분은 기억이 안 났어. ㅠㅠ.

그래도 조금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단다. 집에 모셔둔 책들을 뒤져보면 다 있는 내용일 텐데 말이야. 예전의 책들을 짜깁기하고 일부 내용 편집해서 엮은 책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책 사는 것을 고민했을 거야. 뭐 이미 산 것, 어쩌겠니. 즐겁게 다시 읽어야겠다며 책을 읽었단다.

아참, 우리나라 산사 일곱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고 했잖아. 그 일곱 곳이 절은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이렇게 일곱 곳이라고 하는구나. 그렇다고 이 책에 위 일곱 곳이 모두 소개된 것은 아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된 절들만 소개된 것은 아니야. 북한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표훈사에 있는 절까지 포함해서 모두 스무 개의 절을 소개하고 있단다.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처음으로 나왔던 것이 1993년이었다고 하니, 어느덧 시간이 25년이나 흘렀구나. 그때 답사했던 그곳들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 절이나 문화유산은 장소를 정하는 곳도 신중히 하고, 주변 환경과도 잘 어울리게 지은 것이 장점인데, 최근에 증축이다 복원이다 하면서 지은 건물들은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어. 공감 가더구나.

아빠도 어떤 절의 경우는 십여 년 만에 가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 예전에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다른 모습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변한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 왠지 어색하게 변해서 기분을 살짝 상하게 했어. 증축이나 복원을 할 때 어떤 것을 고려하고 할까? 아빠 같은 보통 사람들도 어색함을 느낀다면, 그들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 알고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냥 지은 것일까? 안타깝더구나. 문화유산을 보존하겠다 마음을 먹었다면, 처음 만들거나 지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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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그러나 좋은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건축적으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서 건축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이다. 조용한 산세에는 소박하게, 화려한 산세에는 다채롭게, 호방한 산세에는 기세 좋게 건물을 세운 것이 우리 산사 건축의 미학이다. 전국 각 산사의 건축이 비슷한 것 같지만 자연과의 어울림은 모두가 저마다의 여건에 따라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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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빠가 여행을 하면서 주변의 절을 간다고 했는데, 이 책에 소개된 절들 중에 많은 절들을 아직 가보질 못했구나. 배흘림기둥의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 차 밭으로도 유명한 순천 선암사 등등 벌써 점 찍어 놓은 절들이 있구나. 아빠가 가 본 절들도 많이 소개가 되었어. 절이 좋다고 하지만, 그 절에 대한 많은 느낌은 없었는데, 유홍준님은 절을 다녀오면서도 참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우시는 것 같구나. 미학 전공이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문화유산을 대하는 자세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

아빠도 여행을 다녀오면 여행기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실천이 참 어렵더구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은 아니고 여행을 하는 순간의 아빠의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기고 나중에 보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추억의 아주 작은 조각으로만 남겨두게 되는구나. 아빠가 제대로 여행기를 안 쓰면서, 너희들에게 한번 써보라고 권유하는 게 옳지 않다고 알지만, 그래도 여행기는 짧게라도 써보는 게 어떨까 하는 게 아빠의 생각이란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에 나오는 절들을 모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소위 도장깨기라고 했던가. 물론 북한에 있는 절들은 어렵겠지우리나라에 있는 절들이라도 우리 같이 한번 가볼까?

PS:

책의 첫 문장 : 우리나라의 산사(山寺) 7곳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책의 끝 문장 : 금강의 맥박은 지금도 그렇게 울리고 있는 것이다.


비탈길은 사람의 발길을 느긋하게 잡아놓는다. 제아무리 잰걸음의 성급한 현대인이라도 이 비탈길에 와서는 발목이 잡힌다. 사람은 걸어다닐 때 머릿속이 가장 맑다고 한다. 여러분 생각해봐라. 직장에서 집까지,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머릿속에서 무엇을 했나. 돌아오는 길은 어떠했나. 최소 하루 두 시간 자기만의 명상 시간을 갖고 있는 셈인데 대부분은 그 시간을 소비해버리고 있다.
그러나 비탈길은 그런 경박과 멍청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아무리 완만해도 비탈인지라 하체는 긴장하고 있다. 꾹꾹 누르는 발걸음의 무게가 순례자의 마음속에 기여하는 바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은 걷는 발뒤꿈치에서 시작한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 P28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 끝에 안양류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안양루에 오르면 발아래는 부석사 당우들이 낮게 내려앉아 마치도 저마다 독경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인데, 저 멀리 산은 멀어지면서 소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이 웅대한 스케일, 소백산맥 전체를 무량수전의 앞마당인 것처럼 끌어안은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극락의 장엄인지도 모른다. 9품 계단의 정연한 질서를 관통하여 오른 때문일까. 안양루의 전망은 홀연히 심신 모두가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지루한 장마 끝의 햇살인들 이처럼 밝고 맑을 수 있겠는가. - P35

수덕사 대웅전 건축은 그 구조와 외형이 아주 단순하다. 화려하고 장식이 많아야 눈이 휘둥그레지는 현대인에게 이 단순성이 보여주는 간결한 것의 아름다움,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수식이 가해지지 않은 필요미(必要美)는 얼른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안정된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덕사 대웅전의 저 간결미와 필요미가 연출한 정숙한 아름다움에 깊은 마음의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도 가벼운 밑화장만 한 중년의 미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 P179

조선의 소나무는 그래도 죽지 않고 여기 이렇게 사철 푸르게 살아 있지 않은가. 웬만한 소나무는 그 칼부림, 도끼날에 생명을 다했을 거이련만 조선의 소나무는 그 아픔의 상처를 드러내놓고도 아리따운 자태로 늠름히 살아 있지 않은가.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우리가 극복해낸 역사적 시련의 상처일 뿐이다. 아무리 모진 시련도 우리는 그렇게 꿋꿋이 이겨왔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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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렇게 보면 추상적인 개념적 도구를 사용해 세상을 체계적으로, 또 정밀하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바로 수학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77)

공리라는 단어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증명하지 않고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때, 이를 기초로 다른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 공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전개될 내용도 전혀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며, 이 공리가 맞다고 상정하면 앞으로 나올 결론들도 맞다고 여길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공리적인 사고체계입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이라는 책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5개 공리를 만들고, 그다음에 그 공리만 이용해서 여러 가지 증명을 전개했습니다. 가정과 공리만 사용해서 결론을 이끌어낸 이 책은 당시 서구세계에 굉장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7)

수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하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해결점을 원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에 필요한 정확한 프레임워크와 개념적 도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9)

수학적인 사고가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질문에 답할 때, 수라는 개념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굉장히 제한적인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건전한 과학적 시각이란 근사(approximation)’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기 보다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중에 뒤집어지더라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이해해나가는 것이죠. 애로의 경우도, 뉴턴의 경우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근사해가는 과정, 항상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섬세하게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학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265-266)

수학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인간이 답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명료한 과정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했던 질문이 기억나나요? ‘수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질문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겁니다. 여전히 답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학에 대해, 수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에 대해 느끼고 있습니다. 더 탐구하게 되고, 생각게 되겠지요. 무엇보다 수학이 이제 특정한 논리학이나 기호학과 같은 학문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겁니다.

(291)

알파벳 다섯 글자로 만들 수 있는 단어는 과연 몇 개일까요? 아무 제약 조건도 주지 않고 의미를 고려하지 않으면 26^5, 1200만 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면 의미 있는 다섯 글자 영어 단어는 희한한 것들까지 포함해서 약 1 5,000개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알파벳 3개 글자를 효율적으로 써서 26^3=17,576개의 단어를 만들면 될 것을, 5개의 글자로 왜 1 5,000개 단어밖에 만들지 않은 것일까요? 다섯 글자 영어 단어에 들어 있는 정보율은 약 5분의 3입니다. 의미 있는 단어는 1 5,000개밖에 안 되는데, 다섯 글자나 쓰는 낭비를 정보율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단어의 길이를 늘려서 쓰게 된 데는 인간의 언어가 자연적으로 정보 처리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한 것이 중요한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언어 자체도 방금 이야기한 오류의 관측과 정정이 가능하게 만들어졌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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