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최태성)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한 게 4년 정도인데, 교과서에 나오는 흥성대원군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가 바로 그 4년이거든요. 수렴청정 기간에 신정왕후가 내놓았던 정책들을 보면 경복궁 중건, 과제의 폐단 시정, 서얼의 허통(許通) 등이 있습니다. 효명세자가 시행하려고 했던 개혁들을 다 실행에 옮기는 거죠. 다시 말해 세도정치 이후에 추진된 개혁을 흥선대원군의 개혁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 출발점이 효명세자에게 있다는 얘기입니다.


(110)

(주진오) 확실히 흥선대원군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어요. 흥선대원군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세도정치의 여러 가지 폐해를 정리하고 왕실 중심의 국가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거든요. 고종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신병주) 흥선대원군에게 그런 공은 분명히 있지만, 외교적으로 대응하는 문제라든가 국제 정세를 보는 시각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있죠. 반면에 명성황후는 상당히 국제적 안목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두 사람이 가지는 긍정적인 면이 잘 조화를 이루어서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면 가장 좋았을 텐데, 결국 서로 화합하지 못함으로써 근대사 부정적으로 흘러간 것은 매우 아쉬운 측면이죠.


(137)

(박은숙) 갑신정변이라는 계획에 고종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은 급진 개화파가 반청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고종으로서는 청나라의 개입을 막으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서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진행되는 걸 보니까 왕권과 왕실 제정을 제약하고 입헌군주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오히려 왕권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위기를 느끼면서 당연히 뒤도 안 돌아보고 태도를 바꾼 것이죠.


(184)

(신영우) 동학은 갑오년에 패배하고 난 뒤에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에서 탄압받았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탄압받았고요. 광복 이후에는 교과서에서 반란으로 규정해서 오랫동안 매도당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큰 원인으로 보면 일본 사람들이 교묘하게 만든 것도 있지만, 양반 지주층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동학농민군을 과거에 나쁜 짓을 했던 사람들로 매도한 경향이 있었죠. 그런 인식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다가 100주년이 될 때 명예를 회복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에야 비로소 특별법에 의해서 명예회복을 위한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259)

(그날) 근데 고종의 밀명을 받았던 헐버트라는 사람이 왠지 익숙하기는 한데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거든요.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신병주) 고종에게 크게 신뢰받았던 대표적인 미국인입니다. 1905년에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도 대한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미국에 전하고자 상당히 애썼던 인물이죠. 헐버트의 삶이 대단히 극적이었던 게, 이후 40여 년간 사라진 비자금의 행방을 계속 찾으려고 합니다. 해방 이후인 1949년에도 방한해서 비자금을 꼭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안타깝게도 1949년의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러 왔다가 8 5일에 사망했어요. 지금은 본인이 원했던 대로 대한민국에 묻혀 있죠.


(267)

(신병주) 큰 한이라는 뜻이지요.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에서 역사가 시작되는데, 고조선에서 남하한 이주민 일부가 한을 세웠다고 국사책에 나옵니다. 마한, 진한, 변한인데, 당시의 역사 인식을 보면 삼한을 통합한 나라가 고려라는 인식이 아주 굳건히 지속됩니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대신할 새로운 국호를 찾다 보니까 역사적으로 조선 다음에는 한이라는 국호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거죠. 그래서 삼한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이어받아서 그 한 중에서도 더 큰 한, 즉 대한을 나라 이름으로 정했는데, 황제의 나라라서 대한제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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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고성훈) <정감록>에도 일종의 암호가 나오는데요. 파자(破字)라고 합니다. 글자를 풀어서 획으로 나눠 쓰거든요. 이를테면 이망정흥(李亡鄭興)’으로 쓰지 않고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한다로 씁니다. 임진왜란을 예로 들면 임진왜란의 키워드 중 하나가 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직접 ()’로 쓰지 않고 여인(女人)이 벼()를 이고 있다.”로 씁니다. 또한 병자호란이 한겨울인 12월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눈 설() 자가 곧 병자호란을 상징하는데, 눈 설 자를 쓰지 않고 비 우()자 아래 산()이 옆으로 누웠다고 해서 우하횡산(雨下橫山)’ 같은 식으로 쓰는 게 일종의 파자법이거든요. 암호라고 할 수 있죠.


(44)

(신병주) 무신란 이후에 영조가 직접 전교를 내립니다. 반란의 원인은 결국 조정에서 당쟁만을 일삼아서 재능 있는 인재들이 등용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계속 기근이 일어나 백성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제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당쟁만을 일삼는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해 주는 게 없으니까 백성들이 조정이 있는 것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 편입된 것이라고 하고요. 그러니 결국 반란을 일으켰던 주모자와 반란에 가담했던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조정이 잘못한 거라고 합니다.


(46)

(신병주) 좌청룔,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고 들어 보셨죠? 푸른색이 상징하는 것은 동쪽으로, 동인을 상징하는 게 미나리입니다. 우백호라는 건 서쪽을 말하는데 백호니까 흰색인 청포묵이 서인을 뜻하죠. 그다음에 남쪽은 붉은 봉황을 뜻하니까 붉은색 소고기가 남인을 가리키고요. 또한 북쪽은 검은 거북이어서 검은색인 김이 북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인식되는 붕당에 상징색을 부여하고 이 음식들을 고루 섞어 먹으면 붕당 간의 화합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은 거죠.


(60)

(신병주) 어사는 공식적으로 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왕명을 받아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파견을 나가는 사신에 해당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임무에 따라서 진휼을 감독하는 어사는 감진어사라고 했고, 별도로 파견하는 어사는 별견 어사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 관리들의 부정이나 비리를 색출해야 할 때는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해야 해하니까 암행이라는 말을 썼죠.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도 암행어사였기 때문에 신분을 위장해야 하는 거지꼴로 나타나는 바람에 장모를 깜짝 놀라게 해 주는 대목이 나오죠.


(81)

(신병주) <실록>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대단히 닮았어요. 영조가 박문수를 지적하면서 나도 고집이 세지만 넌 진짜 고집이 세다.”라고 이야기하고 너는 성격이 진짜 불같다.”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영조 본인도 약간 그런 기질이 있다 보니까 서로 통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문수가 왕 앞에서 싸우니까 다른 신하들이 박문수를 무식하다고 나무라는데 영조가 다 나라를 위하는 말이다. 무식하면 공부 좀 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박문수를 옹호해 주는 말까지 합니다.


(120)

(신병주) 이제까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라는 인물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쥔 인물이었던 거죠. 여러 자료를 보면 영빈 이씨는 상당히 원칙이 분명하고 경우가 바르던, 아주 이성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때 파국을 막을 방법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영조도 후에 종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가하잖아요. 영빈 이씨 본인도 엄청나게 괴로웠겠죠. 그래서인지 기록을 보면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147)

(김문식) 문학 하시는 분과 예술 하시는 분들은 문체반정을 놓고 대단히 비판적으로 보시는데, 정조가 개방적인 군주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허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지가 있는 거고, 기본적으로는 왕위를 보존해야 하는 속성이 있죠. 또한 문체반정의 목적이 노론 세력을 약화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에 정조가 금지하려 했던 패관 소품체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노론 계통이었거든요. 참고로 패관 소품체는 대단히 짤막하면서도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문체입니다. 정조는 그런 문체로 쓴 글들이 나왔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성도 간파한 것 같아요. 계속 유행한다면 체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본 거죠. 상당한 정치적 고려 끝에 취한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169-170)

(그날) 포도대장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말렸다고 합니다. “서민이 상언하는 것은 매우 외람되고 난잡한 행동입니다. 상언과 격쟁을 받지 마소서.” 그러니까 정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들어러. 저 말할 것 없는 자들이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달려와 하소연하기를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듯이 하니 그렇게 만든 자가 잘못이지, 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애민 군주의 진정성이 수백 년의 시공간을 넘어서 가슴에 감동을 안깁니다. 정말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지 않습니까?”


(192)

(그날)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텐데, 정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는 몹시 나쁜 경험을 한단 말이죠. 근데 그 상처가 치유의 과정 없이 가슴에 남아서 오래도록 정조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힐링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정조야말로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너무 포용하는 정책들을 펼친 게 문제일지도 몰라요. 피바람을 몰고 오는 복수를 했으면 울화가 해소됐을 거예요. 화병이 안 생겼을 수도 있죠. 그런데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들과 20년간 함께 나라 살림을 걱정했어요. 철천지원수랑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 20년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종기가 안 생기기고 못 배기죠. 게다가 역사를 보면 독살 사례들이 있으니까 의심하는 거고요.


(210-211)

(김문수) , 그런 한계는 있습니다. 물론 민의 성장을 지도층이 받아들여 맞추면서 개혁이 계속 이루어졌으면 좋았겠죠. 우리가 조선 시대에 기대한 건 그런 개혁인데, 정조는 민의 성장으로 나타난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정책을 펴기는 했습니다. 다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버지로 말미암아 생긴 트라우마가 정조의 발목을 크게 잡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릴 때부터 죄인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자신이 왕이 되었는데도 아버지를 쉽게 복권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복권해야겠다는, 상당히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서 세운 계획을 하나하나 진행해 가는 것이 정조로서는 상당히 부담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장애와 정치 세력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추진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247)

(김문식) 정조는 자신이 강력하게 일을 추진할 때 자기를 도울 수 있는 확실한 세력을 아들인 순조의 혼인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결심했을 거고요. 근데 정조가 예상 밖으로 일찍 사망한 게 하나의 패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의 건강이 안 좋았던 것이 또 다른 패착이었죠. 세자가 되어서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잖아요. 근데 계속해서 왕이 이른 시점에 사망해 버리고, 덕분에 후임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이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다가 결국은 후손마저 끊기죠. 그래서 철종을 데려오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닌 것 같아요. 안 좋은 조건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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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스스로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등 떠밀려 시작한 방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행성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이 행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이해했다. 누군가 그를 힘껏 밀쳐도 그는 곧 중심을 잡고 자기가 갈 방향을 찾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도 항상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고 항상 뒤처진 느낌이었다. 내가 어디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단지 내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시적으로 불안정을 겪을지라도 끊임없이 돌아다녔지만 나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움직였다면 급류가 흐르는 여울에서 흔들리는 뗏목 위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 같았을 것이다 뗏목이 움직이고 강물이 움직일지라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96)

그는 실험에서 대조군이었고 나는 실험군이었다. 그에게 가짜 약이, 내게는 진짜 약이 주어졌다. 나는 신약의 효과를 경험한 반면 그는 왜 약이 효과가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둘 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내겐 버티고 설 땅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방랑자였다. 내게는 영주권이, 그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그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나는 벼랑 밑을 내려다봐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 심연을 가릴 담장이나 생울타리가 항상 있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그는 그 벼랑에서 물러서서 살아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벼랑과 나 사이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는 내 가림막, 내 스승, 내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삶이 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23)

아무것도 몰라. 너무 갈팡질팡하고. 그래서 잠자코 있거나 너무 서두르지. 여자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래. 가만히 앉아서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그게 자네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야.” 그는 내가 순간을 팽창시키고 오래 끄는 방법을 알고, 발을 질질 끌면서 원하는 일이 일어나길 가만히 기다린다고 말했다. 사부라르 트레네(질질 끄는 지식인). 그저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는 거라고.


(197)

나는 왜 그녀를 떠났을까? 내가 나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었거나, 혹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거나, 그도 아니면 아무하고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지만 타인은 절대로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고, 결국에 그런 허상은 내 안에서 끄집어내 던져서 깨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영혼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고, 사랑이란 내게는 낯선 것이며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분노와 증오만 있었기 때문이다.


(199)

멀어져가는 그의 택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친하게 만든 요인은 상상 속 프랑스와의 로맨스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냥 가림막, 착각이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어디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극단적인 무능력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살며 평범한 일을 하고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린 평범한 친구를 갖거나 유지할 수도 없었다.


(328)

그날 저녁 뉴턴행 그린 라인 지하철의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 너야? 이 너무도 낯선 보스턴 풍경 속에서 눈에 띄는 저 얼굴이 정말 너라고? 네가 누군데? 너는 몇 개의 가면을 동시에 쓸 수 있어? 이렇게 보지 않을 땐 너는 누군데? 너는 형체가 없는 반죽 같은 존재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어질 준비가 된 반죽? 그렇게 쉬운 묵인과 동의, 인정으로, 그 거짓된 얼굴을 믿는 사람들에게 네가 안겨줄 배신감에 대해 미리 사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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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02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을,,,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
재독 해야 겠습니다 ^^

bookholic 2022-09-03 00:35   좋아요 2 | URL
그렇게 말씀하셔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소설 가을하고 어울리는 것 같아요..^^
즐거운 가을 되세요~~
 















(26)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가,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귀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32)

이 모든 것들이 당혹스럽고 언짢았다. 왜냐하면 그 무렵 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론적으로는(물론 남몰래 그랬다) 전적으로 버마인들 편이었고, 그들의 압제자인 영국인들을 전적으로 적대시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정도보다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제국의 추악한 짓거리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악취 지독한 철창에 처박혀 있는 불쌍한 죄수들, 장기 재소자들의 겁먹은 얼굴, 대나무로 매질을 당한 사람들의 터진 엉덩이. 이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난 그럴싸한 내 나름의 관점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나는 아직 어린데다 부실한 교육을 받았고, 동양에 가 있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내 문제를 철저히 함구한 채 혼자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대영제국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것을 대체해가는 신생 제국들보다는 영국이 훨씬 낫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내가 알았던 것이라곤 섬기던 제국에 대한 나의 증오와, 도무지 일을 할 수 없게 만들려던 악독하고 자그만 인간들에 대한 나의 분노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64-65)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나 지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 살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버마에서 영국 제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목격했고, 영국에 와서는 빈곤과 실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런 시스템에 맞서 싸운다는 게, 주로 독서 대중에서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책들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태의 진전이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한때는 한 세대 뒤의 위험 같아 보이던 것들이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데 그쳐서도 안 되고, 언제나 활발한 적들의 술수에 놀아나서도 한 된다.


(88)

애국주의, 즉 국민적 충심이 갖는 압도적 힘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볼 수는 없다. 애국주의는 상황에 따라 무력해질 수도 있고, 문명의 어느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힘으로서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기독교와 국제 사회주의는 애국주의에 비하면 지푸라기처럼 연약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들의 나라에서 권좌에 오른 가장 큰 비결은, 그들은 이 사실을 파악했고 그들의 적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데 있다.


(107)

영국은, 자주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처럼 보배 같은 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벨스 박사의 묘사처럼 지옥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집안을, 상당히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골칫덩이가 많진 않아도 찬장마다 해골이 넘쳐나는 집안 말이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 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134-135)

군대 생활의 본질적인 공포는(군인이 되어본 사람이라면 군대 생활의 본질적 공포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이다) 어떤 성격의 전쟁에서 싸우게 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군기 같은 것은 어떤 군대든 궁극적으로는 마찬가지다. 명령은 복종해야 하고 필요하면 처벌로써 강요되며, 장교와 사병의 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책들에 나오는 전쟁 묘사는 대체로 정확하다. 총탄은 맞으면 아프고, 시체는 썩어 악취를 풍기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너무 무서워 바지를 적시기도 한다. 어떤 군대가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배경이 그 군대의 훈련과 전술과 전반적인 능력에 영향을 끼치며, 정의 편이라는 의식이 사기를 북돋우는 것도 사실이다.


(137)

오늘날 일반 대중의 견해가 왔다갔다하는 묘한 현상은, 말하자면 수도꼭지 열리고 닫히듯 정서가 돌변하는 것은 신문과 라디오의 최면 탓이다. 한편 지식인들의 경우는 상당 부분 돈과 한낱 신체적 안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주전(主戰)’ 쪽이 되기도 하고 반전쪽이 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그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에 대한 실제적인 그림이 없다. 물론 그들은 스페인내전에 대해 열광하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죽는다는 게 불쾌한 일이란 건 알았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 장병의 전쟁 체험은 아무튼 품위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웬일진지 이 전쟁의 변소는 악취가 덜 나고, 군기는 덜 짜증스럽다고 본 것이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었는지는 <뉴 스테이츠먼>을 슬쩍 들여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쏙 빼닮은 허튼소리가 작금의 붉은 군대에 대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명백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종종 싸워야만 하고, 싸우자면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전쟁은 악이며, 차악(遮惡)인 경우도 흔히 있다.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하며,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악취 진동하는 병으로 망하는 것이다. 이런 케케묵은 소리를 굳이 쓸 필요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간 임대소득이나 이자로 먹고사는 자본주의가 우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148)

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어떤 식이든 거짓이라는 말이 유행인 건 나도 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는 말을 기꺼이 믿는 쪽이다. 한데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글을 무의식적으로 윤색하거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실을 애써 추구했다. 단 어느 쪽이든 사실은 존재하며,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사실이 늘 상당 부분 있었다.


(194)

진실은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신문이 사실을 워낙 거짓으로 알리기 때문에, 거짓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어거나 나름을 견해를 갖추지 못한다 해서 일반 독자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전반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황당한 믿음을 고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무엇 하나 입증되지도 반증되지도 않기에, 더없이 엄연한 사실도 뻔뻔히 부인해버리는 게 가능해진다. 더구나 민족주의자는 세력, 승리, 패배, 복수에 대해 끊임없이 골몰하면서도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선 다소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가 바라는 바는 자기편이 상대편보다 앞서고 있다고 느끼는것이며, 사실이 뒷받침되는지 확인하기보다는 상대편을 묵살해버림으로써 더 쉽게 그럴 수 있다. 모든 민족주의 논쟁은 토론반 학생들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결판이 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어떤 민족주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실제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세력과 정복을 꿈꾸며 제법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210)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일반적인 사실로 판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싸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 복잡한 무기는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고, 단순한 무기는(보복이 따르지 않는 한) 약자에게 갈고리발톱이 된다.


(218-219)

확실히 과학교육은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실험적인 사고의 습성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 즉 부닥치는 어떤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습득하는 것이어야지, 사실을 잔뜩 축적하는 것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과학교육 옹호론자에게 하면 대게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면, 언제나 과학교육이란 정밀과학에, 달리 말해 더 많은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과학은 한 덩어리의 지식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은 현실에서 강한 반발에 부닥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순전히 직업적인 시기심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이 단순히 하나의 방식이나 태도라면, 그래서 사고방식이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 과학자라 할 수 있다면, 지금 화학자나 물리학자 등등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위세는 어찌 되며 아무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현명하다는 주장은 또 어찌 되겠는가?


(240)

하지만 자연과학이나 음식이나 미술이나 건축이 어떻게 되든 간에 사상의 자유가 말살된다면 문학의 운명은 (내가 지금까지 밝히려고 한 바와 같이) 암울할 게 확실하다.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체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작가, 박해와 현실 조작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작가, 그럼으로써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이는 작가도 같은 운명인 것이다. 그 길로 접어들면 헤어날 방법이 없다. ‘개인주의상아탑을 비난하는 어떤 장광설도, ‘참된 개성은 공동체와 합일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식의 경건하고 상투적인 어떤 주장도, 매수된 정신은 망가진 정신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어느 순간에 자발성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문학 창작은 불가능하며 언어 자체가 굳어져버린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간의 정신이 지금의 것과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된다면, 우리는 문학 창작과 지적 정직성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가 아는 것은,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는(지금 소련에 대한 거의 모든 찬사에는 그런 부인이 내제되어 있다) 작가나 언론인은 실은 자신의 파멸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246-248)

이런 질문을 하루 수밖에 없는 건,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77)

제비보다 먼저, 수선화보다 먼저, 아네모네보다 조금 늦게, 두꺼비는 봄이 다시 찾아온 것에 대해 나름의 경의를 표한다. 지난 가을부터 들어가 누워 있던 땅속 구멍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적당한 물웅덩이 쪽으로 최대한 빨리 기어가는 것이다. 무언가가(땅속의 어떤 떨림인지 아니면 그냥 온도가 몇 도 올라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두꺼비에게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몇 마리는 내내 잠만 자다 한 해를 아예 빼먹기도 하는 것 같다. 한여름에 땅을 파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두꺼비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300)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으로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 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이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다.


(329)

작가의 관점은 정신건강 차원의 온전함, 그리고 가지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능일 것이며, 그것은 확신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프트는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비전은 확실히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걸리버 어행기>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이 온전함이라는 기준을 겨우 만족시키는 수준일지라도, 작가의 확신이 뒷받침해준다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충분히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419)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 데 있었다. ,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해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바보 같아 보이게 하며, 모든 면에서 남보다 앞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 지기만 했다.


(431)

아이는 일종의 이질적인 수중(水中) 세계에 살며,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자면 기억이나 점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단서는 우리도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거의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기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거의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신학기가 되어 학교로 아이를 돌려보낼 때 무늬가 영 이상한 옷을 입혀 보내면서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주는 부모를 생각해보라! 그런 유의 문제에 대해 아이는 때때로 항의 표시를 하겠지만, 많은 경우 아이의 태도는 그저 감정을 숨기는 데 그치고 만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어른에게 노출하지 않는 것은 일고여덟 살 때부터 시작되는 본능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어른이 아이한테 느끼는 애정이나 아이를 보호하고 아끼고자 하는 욕구도 몰이해의 원인이 된다. 어른이 다른 성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보답으로 그 어른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한다면 경솔한 판단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건대, 유아기가 끝난 뒤로는 어머니 말고는 어떤 어른에게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어머니에 대해서도 신뢰가 없었는데, 쑥스러워서 진짜 감정은 대부분 숨겼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내 경우에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의 감정은 어린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이었다.


(434)

아이들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그렇게 잘 믿기 때문에 어른한테 영향받기 쉬우며, 그만큼 열등감에 물들거나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감에 휘둘리기 쉽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가장 계몽된 학교에서도(보다 미묘한 방식일진 몰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는 기숙학교가 일반 통학학교보다 더 나쁘다는 것만은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집이 가까이 있으면 아이가 인식을 얻기가 더 쉬운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 특유의 결함은 여덟아홉, 심지어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을 최근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로 보내온 일반적인 관행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446)

정치에선 둘 중 어느 쪽이 덜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 이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악마나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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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8-28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책입니다.
뽑아주신 인용문장을 보니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ookholic 2022-08-28 23:21   좋아요 1 | URL
저는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좋은 글들이 많았어요...
소설을 통해 조지 오웰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의 에세이도 깊이 있고, 좋았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133)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직장인.’

이 평범함은 준이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게 숨 쉬듯이 당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생활을 쟁취하는 것, 유지하는 것 모두 준에겐 숨이 차오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살고 있을까, 어떻게 자기를 꾸준히 먹여 살리고 있을까. 이력서를 수정하던 준은 마음이 아득해져서 모니터 앞에 얼굴을 묻었다.


(147-148)

그렇죠. 결국 세상에서 비싼 값을 쳐주는 재능을 타고나는 건 운의 영향이 큽니다. 시대도 마찬가지죠. 아마 저 같은 사람은 80년대에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실패자가 됐을 거예요. 몸이 허약하고, 술은 못 먹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웬만한 회사는 일 년도 못 버티고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 제 성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게임 산업이 막 성장하고 있을 때에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한국에서 살았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남자는 잠시 멈추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는 미친 듯이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 운이었던 겁니다.”


(153)

어쩌면 준이 그동안 뽑기에서 실패했다고 투덜거린 재능들이 언젠가 행운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태수처럼 말이다. 준은 이제 고작 서른두 살이었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의 기준을 성인 평균 수명의 3분의 1로 잡았다고 했으니, 백 세 시대에서는 어린이가 서른세 살까지인 셈이다. 무엇을 새로 발견해도, 새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다.

준은 아직 불시착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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