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74)

스스로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등 떠밀려 시작한 방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행성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이 행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이해했다. 누군가 그를 힘껏 밀쳐도 그는 곧 중심을 잡고 자기가 갈 방향을 찾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도 항상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고 항상 뒤처진 느낌이었다. 내가 어디에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단지 내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시적으로 불안정을 겪을지라도 끊임없이 돌아다녔지만 나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움직였다면 급류가 흐르는 여울에서 흔들리는 뗏목 위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사람 같았을 것이다 뗏목이 움직이고 강물이 움직일지라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96)

그는 실험에서 대조군이었고 나는 실험군이었다. 그에게 가짜 약이, 내게는 진짜 약이 주어졌다. 나는 신약의 효과를 경험한 반면 그는 왜 약이 효과가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둘 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내겐 버티고 설 땅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방랑자였다. 내게는 영주권이, 그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그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나는 벼랑 밑을 내려다봐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 심연을 가릴 담장이나 생울타리가 항상 있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그는 그 벼랑에서 물러서서 살아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벼랑과 나 사이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는 내 가림막, 내 스승, 내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삶이 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23)

아무것도 몰라. 너무 갈팡질팡하고. 그래서 잠자코 있거나 너무 서두르지. 여자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래. 가만히 앉아서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그게 자네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야.” 그는 내가 순간을 팽창시키고 오래 끄는 방법을 알고, 발을 질질 끌면서 원하는 일이 일어나길 가만히 기다린다고 말했다. 사부라르 트레네(질질 끄는 지식인). 그저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는 거라고.


(197)

나는 왜 그녀를 떠났을까? 내가 나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었거나, 혹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거나, 그도 아니면 아무하고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지만 타인은 절대로 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고, 결국에 그런 허상은 내 안에서 끄집어내 던져서 깨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영혼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고, 사랑이란 내게는 낯선 것이며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분노와 증오만 있었기 때문이다.


(199)

멀어져가는 그의 택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친하게 만든 요인은 상상 속 프랑스와의 로맨스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냥 가림막, 착각이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어디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극단적인 무능력이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한 집에서 살며 평범한 일을 하고 평범한 텔레비전을 보고 평범한 식사를 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린 평범한 친구를 갖거나 유지할 수도 없었다.


(328)

그날 저녁 뉴턴행 그린 라인 지하철의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 너야? 이 너무도 낯선 보스턴 풍경 속에서 눈에 띄는 저 얼굴이 정말 너라고? 네가 누군데? 너는 몇 개의 가면을 동시에 쓸 수 있어? 이렇게 보지 않을 땐 너는 누군데? 너는 형체가 없는 반죽 같은 존재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어질 준비가 된 반죽? 그렇게 쉬운 묵인과 동의, 인정으로, 그 거짓된 얼굴을 믿는 사람들에게 네가 안겨줄 배신감에 대해 미리 사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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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02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을,,,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
재독 해야 겠습니다 ^^

bookholic 2022-09-03 00:35   좋아요 2 | URL
그렇게 말씀하셔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소설 가을하고 어울리는 것 같아요..^^
즐거운 가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