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뉴욕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가 자신을 불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브리지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내 경력 역시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의 지원서를 J.J. 톰슨(1856~1940)에게 넘겼다. 톰슨은 러더퍼드 이전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던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69세의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19년에 그는 행정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고, 1925년 무렵에는 실험실에 띄엄띄엄 나오며 가뭄에 콩 나듯 학생을 받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자신을 받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서는 크게 안도했다. 그는 물리학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물리학의 미래와 함께 자신의 미래 역시 유럽에 있다고 확신했다.


(93-94)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105)

나중에 MIT 총장까지 오르게 될 콤프턴은 당시 오펜하이머의 박학다식함에 기가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맞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괴팅겐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대개 프린스턴 대학교나 캘리포니아에서 온 기혼자 대학 교수들이야. 그들은 물리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교양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아. 그들은 독일인들의 섬세하고 잘 조직된 지적 활동을 부러워하고 있고, 그와 같은 물리학을 미국으로 이식하고 싶어 하지.”라고 썼다. 이는 확실히 콤프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113)

양자 물리학은 확실히 젊은이들의 과학이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물리학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그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실망한 채로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만방자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맛이 갔어.”라고 썼다. 하지만 1920년대 말까지만 해도 괴팅겐의(그리고 보어의 코펜하겐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에게 그들의 양자 이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118)

괴팅겐은 성인이 되어 가던 젊은이로서 오펜하이머가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양자 혁명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던 젊은 과학자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대변동에서 참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물리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짧은 9개월 동안 그는 학문적 성과와 성격의 변화를 이루었고,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단지 1년 전만 해도 그의 생존까지 위협했던 불안한 감정 상태는 이제 상당한 학문적 업적과 그에 따르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156)

1929년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모든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그런 욕망이 꼭 허영심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와 같은 매력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사람들은 멋진 취향이나 행복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의지만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야.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설계도 없이 기계를 만들려는 것과 같을 테니까.”라고 썼다.


(188)

오펜하이머는 1954년 심문관들에게 “1936년 무렵에 나의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고모와 사촌들 몇 명)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244-245)

요점을 말하자면 오펜하이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대의에의 헌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매카시 시기의 가장 해로운 특징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273)

오펜하이머는 양자 역학을 책만 읽어서는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첩경이었다. 그는 같은 강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와인버그는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 학생은 오펜하이머에게 달려가 그 문제를 자신이 풀어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좋아, 그것이 내가 오늘 세미나를 한 이유라네.”라고 대답했다.


(284-285)

오펜하이머는 이와 같은 정치적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1941 10 13일자 그의 편지는 예의 바르고, 재기 넘치며, 풍자적이다가, 마지막에는 날카로운 빈정거림으로 끝맺었다. 오펜하이머는 인권 선언이 급진적인 신념을 가질 권리뿐만 아니라, 그 신념을 익명으로(with anonymity)” 말 또는 글로 표현할 권리까지 보장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는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 동조자인 교수들의 활동은 회합을 가지고, 그들의 의견을 밝히며, 그것들을 (주로 익명으로) 출판한 것으로, 이러한 것들은 인권 선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보장된 행동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이 편지를 다음과 같이 도전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신성한 체 하는 애매함과 빨갱이 사냥으로 점철된 당신의 성명서를 보고 나서야 나는 당신이 의장을 맡고 있는 위원회를 둘러싼 감언이설, 협박, 오만함에 대한 소문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27)

한때 괴짜 이론 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419-420)

바이스코프는 보어가 자신에게 폭탄은 무서운 물건일지 모르나, 또한 위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보어는 자신의 우려하는 바를 알리는 글을 오펜하이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1944 4 2일 무렵에 그는 만족할 만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보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 역시 명징하고 예언적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


(443)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462)

만약에 오펜하이머가 히로시마 폭탄 투하 전에 대통령이 일본인들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인지했다면, 그리고 대도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 폭탄의 군사적 이용이 8월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속았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정부 관료들이 하는 말이면 뭐든지 의심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501)

몇 분 후, 뜨거운 뉴멕시코의 태양을 받으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앞으로 연구소의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506)

나중에 누군가 대통령이 손에 피라니, 제길. 그는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묻히지 않았어. 그걸 아프다고 떠들고 다니다니.”라고 중얼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애치슨에게 나는 두 번 다시 저 개자식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1946 1월까지도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는 애치슨에게 오펜하이머를 “5~6개월 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손을 비비면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하여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 울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571)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도 아루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 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 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576-577)

1949년 보어가 프린스턴을 방문했고, 아인슈타인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논문집에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보어가 아인슈타인은 서로 만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처럼, 보어 역시 아인슈타인이 왜 그토록 양자 이론을 혐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념 논문집의 초고를 보고 아인슈타인은 칭찬만큼이나 독설이 많다고 논평했다. 그는 이것은 나를 기념하는 책이 아니라 규탄서 같군.”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일인 3 14일이 되자, 프린스턴의 강당에는 오펜하이머, 라비, 위그너, 그리고 바일을 비롯한 저명한 학자 250명이 아인슈타인 생일 기념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동료들이 얼마나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달리했던 그가 강당 안에 들어서자 공기 중에는 기대감으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순간적인 침묵이 흐르고 나서, 모두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사람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684)

1953년 무렵이면 냉전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핵의 지니 요정을 호리병 속에 가두려 했던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미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류로 인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정치 기류는 오펜하이머를 병에 가둬 바닷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701-702)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721)

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 11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자신은 매카시가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746)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폴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811)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 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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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

봐라, 너부터 당장 그러고 있잖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94-95)

역시나 관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 세우고 갈라 세우고 오로지 어떻게든 갈라 세우는 일이었다. 줄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저희끼리 알아서 치고받도록. 그러느라 뭐가 중요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 생각도 못 하도록. 인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지기 싫어한다. 그 속성마저 남들만 그렇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싸우고, 그렇게 싸우기 때문에 싸울수록 더 편향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 불신을 극복하지도, 서로 이기거나 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진흙탕 밑바닥까지 서로 끌고 들어가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을 끄집어 올려 줄 관리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싸움은 끝나야 하고 누군가는 개처럼 물불 못 가리게 된, 자신들이 아니라 저것들을 따로 가둬야 하니까.


(157)

그것이 중요했다. 이거 먹고 제발 입 좀 다물어 달라는 식이면 나중에 더 내놓으랄 수도, 또 어느 순간 죄책감에 혼자 미쳐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힘은 늘 위대하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모든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일을 벌였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바로 자신은 착하고 항상 착하다는 믿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양면을 칼로 총으로 베고 쏴 죽이면서도 생각했다.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오로지 선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 세상에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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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14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설정이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
돼서 읽기를 멈춰 버렸습니다.

bookholic 2023-07-15 00:48   좋아요 0 | URL
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읽었습니다~~~^^
 















(15)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있어서 사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자주 폭력적이었다. 사진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 그런 폭력성에 대한 자각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피사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선 사진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으리라. 조선의 운명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26)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에 놀라곤 했다. 독일인 애쏜 써드는 1902년에 발표한 글에서 대한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 년 일생 동안 피우는 담배연기만으로도 우리나라 베를린의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 남자들은 모두가 괄괄하고 건강하게만 보인다고 썼다.


(53)

김옥균은 유길준에게 귀국을 만류했지만 유길준은 다음과 같은 답으로 거절하고 12 2일 일본을 떠났다.

형님께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생각은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귀국을 해야 하겠어요. 물론 들어가서 장차 어떤 일을 당할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가 없겠지요. 또 나는 살기 위해서 형님들과 관련이 없다고 변명하러 들어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변명이 될 일도 아니고 형님이나 나나 내일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형님의 처지와는 좀 달라요. 형님들은 어떻게 됐든 한번 일을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까닭 없이 일본에 앉아서 나라의 불행한 현실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들어가서 한번 부닥쳐볼 작정입니다. 요행히 살아남아 발붙일 곳이 마련된다면 나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국내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장차 형님에게도 재기하시는 데 절대 필요한 발판이 되지 않겠습니다.”


(108)

사실 조선의 기독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물론 기독교가 조선인들에게 출애굽기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1900년대 후반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정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나 방파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길 없는 민족공동체에서 보호와 위로가 주어지는 교회공동체로 발길을 돌렸다고나 할까?


(146-147)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치달린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견해가 다른 건 물론 개화파 내부의 견해도 다르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김옥균을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 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위인으로 평가했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런인물로 폄하했다.


(199-200)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10년 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 밀려났던 대원군이 조선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치 개혁의 얼굴 마담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894 7 28(음력 6 26) 정오 74세의 노인인 대원군은 비상시국의 첫 번째 회의를 주재하면서 나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완고의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원군은 이 회의에 군국기무처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개혁지지를 선언하고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로 임명했다.


(231)

김용옥은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뒤부터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집어먹기 시작했다우금치 전투 이후 일본의 조선 침탈은 가속됐고 일본은 식민통치 기간에 좌우 이념 대결, 6.25 동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모든 죄악을 다 뿌려놓은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296)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시신 처리였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가 증거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349)

, 무거운 곡괭이가 검은 흑벽을 크게 찍어내자 돌연 반짝반짝 노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노 터치! 노 터치!” 즉각 미국인 채굴 감독의 고함이 광구 속을 쩡쩡 울렸다. 조선인 광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금맥이 나왔구나. 땅속에서 금맥이 드러날 때마다 미국인들이 지르는 소리는 똑같았다. 노 터치(No touch, 손대지 마라)! 혹여 금을 훔칠까봐 소리치는 것인데 조선인 광부들의 귀에는 노다지로 들렸다. 그들은 노다지을 가리키는 양인들 말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신들도 금맥을 발견하면 즉각 소리쳐서 금이 나왔음을 알렸다. “노다지! 노다지!”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조선인 광부들에게 황금은 곧 노 터치였다. ‘노다지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광물이 쏟아져나오는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뜻의 광산 용어로 쓰이다 이내 큰 횡재를 뜻하는 말로 조선인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갔고 이제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이 한국어사전에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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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7-12 0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울 내용이 많아서 좋아요.

bookholic 2023-07-12 21:03   좋아요 0 | URL
금방 까먹아서 문제입니다 ㅎㅎ
 

















(172)

혹은 나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이유가 없든가. 혹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평균적인 사람은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합리적인 윤리학을 만들어 낸 다음, 그것에서 결점이 발견되었을 때 적절한 수정을 가한다고? 그건 순수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그들의 인격은 자기들이 제어할 수 없는 영향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본인이 그것을 원하고, 또 그것에 의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198)

문제는둘 중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당신이 관측을 행하기 전에는, 파동함수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당신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파동함수는 단지 5050의 확률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가르쳐 줄 뿐이에요. 하지만 일단 당신이 관측을 행한 후에는, 다시 한번 그 계를 관찰하더라도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와요. 처음에 상자를 들여다보았을 때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면, 다시 들여다 보았을 때도 여전히 죽어 있을 거라는 얘기죠.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관측한다는 행위가, 각기 다른 가능성을 대표하는 두 개의 파동함수의 혼합을 단 한 가지의 가능성만을 대표하는 순수한파동, 그러니까 고유 상태라고 불리는 것으로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이 바로 파동함수의 수축이라고 불리는 현상이죠.


(281)

그리고 만약 당신이 개개의 광자가 어떤 진로를 취하는지 관측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계를 하나의 고유 상태로 수축시키고간섭 패턴을 파괴하고, 홀로그램을 망쳐버릴 거예요. 하지만 두 줄기의 광선이 방해를 받지 않고 다시 하나로 합치게 놓아둠으로써 두 개의 고유 상태들이 상호작용할 기회를 준다면, 홀로그램은 사라지지 않고 양쪽의 고유 상태들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확고한 증거로서 영구히 남게 되죠.


(322)

이봐요, 걱정하지 말아요. <ASR> <버블>의 존재 이유가 인간에 의한 가능성의 고갈을 방지함으로써 우주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당장 전 세계에 발표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설명이 없었어도 <버블>이 출현한 것만으로도 난리를 쳤잖아요. 진실이 너무나도 폭발력이 큰 탓에, 사람들이 그걸 오해하는 쪽이 위험할지, 아니면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쪽이 더 위험할지 갈피를 못 잡겠군요. 인간의 지각이 우주 대부분을 소멸시켰다. 인생이란 다른 버전의 나 자신을 끊임없이 학살하고 행위다. 대중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던져주면, 그걸 중심으로 도대체 어떤 컬트 교단이 생겨날지 상상해 봐요.


(401)

그래서 나는 인간답게 기다렸다. 무의미하며 비생산적인 두려움에 고뇌하면서, 상상 불가능한 것을 상상해 보면서 말이다. 만약 이 행성 전체가 영원히 확산 상태에 놓인다면,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수축은 아예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그 무엇도 현실이 될 수 없으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따로따로 체험하게 될까? 한 고유 상태당 고립된 의식이 하나씩 존재하는, 다세계 모델을 정말로 현실화한 듯한 방식으로 말이다. 혹은 모든 것을,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들이 불협화음처럼 중첩되는 식으로? 그 어떤 미래에서도 모든 가능성들이 불협화음처럼 중첩되는 식으로? 그 어떤 미래에서도 수축 현상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왔든 일들-아니면 적어도 수축에서 살아남은 나의 기억들-, 그런 우주의 본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과거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수축 과정이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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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관료주의 특권계급이 신성시하는 이 사무 공간에서는 눈에 띄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장쇠퇴라는 영원한 법칙이 이곳에서는 관료주의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적용되지 않는다. 우체국 건물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자. 나무들은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이가 들면 백발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건물이 낡으면 허물어져 새 건물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나라 관료주의는 항상 똑 같은 것만 고집하고 세속의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체국 비품이 소진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훼손되었으면 상급 관청에 요청한다. 그러면 역시 빠르게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막강한 권력의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용이 되는 알맹이는 없고, 형식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다.


(60)

웅장한 대자연을 바라보며 여자는 마치 땅을 갈아엎는 쟁기처럼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여행의 힘을 실감했다. 여행은 일상의 삶에 익숙해져 단단하게 굳어버린 영혼의 껍질을 단번에 벗겨버리고,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변신을 향한 욕망에 언젠가 열매가 열릴 씨앗을 심어놓는다.


(112)

곧 자명종이 울릴 거야…… 다시 잠들면 안 돼…… 책임감! 책임감을 잊어선 안 돼! 당장 일어나자. 여덟 시에 업무가 시작되잖아. 그전에 일어나서 불 피우고 커피 끓이고, 우유와 빵 사 오고, 방을 정돈하고, 어머니 붕대를 갈아주고, 점심 식사 준비도 해놓아야 하잖아?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는데…… ! 맞아. 식료품 가게 여주인이 어제 외상 갚으라고 했었지…… 안 돼, 자면 안 돼. 정신 차리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야 해…… 그런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있나? 자명종이 울리질 않아…… 고장 났나? 태엽 감아 놓는 걸 깜빡했나? 자명종 어디 있지? 방 안에 빛이 벌써 환한데……


(141)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쳤고, 언제라도 날아오를 듯이 상쾌했다. 끊임없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가슴은 마치 감전된 듯한 전율을 손가락 끝까지 전해주었다. 이상하고, 강렬하고,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이제는 오히려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고, 갑자기 몰아닥친 강풍에 날리듯 여기저기로, 안으로 밖으로, 위층과 아래층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계단을 오를 때도 한 번도 한 계단씩 오르지 않았다. 뭔가를 잊은 사람처럼 마음이 들떠 늘 세 칸씩 뛰어올랐다. 놀고 싶은 충동과 애정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 손은 늘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양팔을 활짝 펼치고 먼 곳을 향해 터져 나오는 웃음과 환호를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148-149)

도대체 나는 누구지? 수년 동안 사람들이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 갔지. 오래도록 시골 마을 우체국에 앉아 있었는데도, 아무도 뭐 하나 챙겨주거나 걱정해 주지 않았잖아. 고향 사람들 모두 너무 가난하다 보니 빈곤함에 지쳐 의심만 늘게 된 걸까? 아니면, 내가 갑자기 매력적인 여자로 변했나? 지금까지 밖으로 표출되지 못했던 매력이 이제야 나타났나? 내가 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예쁘고 똑똑하고 매력적인데 다만 그렇게 믿을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 아닐까? ,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나는 어떤 사람인가?’


(176)

정상에 선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내려도보지 못하고, 행복에 겨운 사람은 남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고생해본 사람만이 어떤 일에나 방심하지 않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고 남보다 더 영리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234)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 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 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 똑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 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253)

여자는 매일 아침 증오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것은 연기에 그을린 다락방 천장의 대들보였다. 낡은 침대, 싸구려 누비이불, 등나무 의자, 깨진 물주전자가 놓여 있는 세면대, 벗겨진 벽지, 판자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모든 것이 지지리도 궁상맞고 흉측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명종 소리는 여자의 귓전을 때리며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었다. 해진 속옷, 역겨운 검은색 원피스…… 원피스의 소매는 이미 오래 전에 찢어졌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288-289)

그래, 우리는 참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어. 어떤 의사도 6년간의 젊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어. 누가 내 젊음을 보상해 주지? 국가가? 그 고위층 사기꾼들이? 그 고위층 도둑놈들이? 40명이나 되는 장관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대봐. 법무부 장관? 복지부 장관? 산자부 장관? 공정하게, 사리사욕 없이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급 공무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름을 대봐. 그들은 우리를 전쟁으로 몰아넣고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고, ‘황제 만세!’를 외쳤어. 물론, 지금은 다른 걸 들려주고 있지. 진흙탕에서 보니, 세상이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군.


(295)

나는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았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쉬지 않고 불평했던 사람은 언니였어. 그리고 스위스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내게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거야. 나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를 이제야 알았어.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전쟁이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 갔는지, 우리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조차 모르고……”


(421)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계획서는 빠진 것이 있을 거야. 모든 범죄에는 구멍이 있지. 하지만 어디에 허점이 있는지 미리 알 수는 없어. 아무리 꼼꼼한 범죄자라도 예외 없이 사소한 실수를 하게 마련이야. 문서란 문서는 전부 없애버리고는 어리석게도 여권을 남겨놓는다든가 하는 실수 말이야. 온갖 장애물을 다 고려하지만 가장 분명하고 틀림없는 장애물은 간과하게 되지. 뭔가 한 가지를 꼭 잊어버려. 아나 나도 가장 중요한 사항을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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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06 0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발췌문만 봐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 감정의 혼란이 참 좋았는데, 다음에 초조한 마음 읽고 이것도 얼릉 사야겠어요 ㅠㅠㅠ!!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네..........

bookholic 2023-07-06 16:0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엄청 좋았습니다..^^
알라딘 현재 평점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