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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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이라기 보다는 재미난 꽁트에 가깝다. 인간 내면의 악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살인, 강간 같은 소재를 사용하는 건 너무 쉽고 단순한거 아닌가....암튼 이렇게 지적인 방식으로 소설이 쓰여질 수 있도록 오랜기간 축적된 서양철학 전통과 신학전통만큼은 무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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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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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이 막 넘어간다. <살인자의 건강법>의 중년 버전이라고나 할까. 또 나쁜 남자를 사랑하게된 아홉 여인의 운명은.... 극단적 탐미주의, 신의 사랑법, 신적인 사랑법에 대한 흥미로운 노통브식 고찰은 계속된다. 우화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재밌게. 그런데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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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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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으며 느꼈던, 마초적 탐미주의에 대한 나의 불편함을 시원하게 긁어준 소설. 고로 이 소설은 어쩌면 노통식 페미니즘 풍자 소설? 그닥 기분이 상쾌해지는 결말은 아니지만 풍자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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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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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의 <독서의 기술>을 읽다가 셰익스피어에 관한 블룸의 절대적 지지에 선동당해(이보다 더 자극적인 선동이 또 있을까) 나로서는 <햄릿>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가 문학적 위력이라는 면에서 <성경>에 맞먹는 유일한 인물이며, 구약의 야훼, 신약의 예수, 코란의 알라보다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의 설득력은 더 크다고까지 하니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수사법과 상상력의 자원은 야훼, 예수, 알라를 능가하"며, "햄릿의 정신과 그 정신을 확장하는 데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신이 사용한 언어보다 아직까지는 더 넓고 더 민첩하다"니, 대체 그 어떤 다른 칭송의 말이 여기에 필적할 것이가... 

 

정말 그 정도로... 하는 의심을 하기에는 너무도 무게감 있는 문학 평론계의 대부의 말씀이기에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해보고싶은 충동이 드는게 당연지사. 그래서 책을 펴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갔다. 인생 중반을 넘어서 읽는 <햄릿>은 역시나 다르게 다가왔다.. 20대 초반에, 그리고 30대에 읽었을 때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을 여러 대목들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러 차례 다시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좀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 젊은 날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이런 것들이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마저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다니, 이게 대체 좋은 소식인건지 슬픈 소식인건지...  

 

<햄릿>에는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수많은 지혜들이 담겨있지만, <햄릿>의 주제어를 한 단어로만 말하라고 한다면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더랬다. 이담에 아이들이 다 커서 내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한 가지만 말해달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용기"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셰익스피어 생각도 마찬가지였던가보다...

 

내친 김에 해럴드 블룸의 햄릿 인물평도 인용해 본다."왜 <햄릿>을 읽는가?... 햄릿 왕자는 지식인 중의 지식인으로서, 서구 정신의 고귀함이며 재앙이다. 이제 햄릿은 지성 그 자체의 표상이 되었고, 그것은 서구적인 것도 아니고 동양적인 것도 아니며, 남성적인 것도, 여성적인 것도, 흑인의 것도, 백인의 것도 아니고 단지 최상의 상태의 인간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진정으로 다문화적인 최초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284쪽)

 

일체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독법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극보수 비평가가로서의 주장이기는 해도 문학작품에 녹아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라면 일각연이 있는 저자의 생각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문화와 계급적 배경을 다 떼고서 그저 단순히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햄릿이라는 캐릭터를 문학 역사상 최고의 지식인이자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본다는 블룸의 견해에 대해서 말이다.

 

 

햄릿: 한 방울의 악 성분이 종종 고귀한 본질 모두를 말살시키고, 치욕을 불러온단 말일세.(39쪽)

 

햄릿: 나 원 참, 봐요, 훨씬 더 낫게 해야지. 모든 사람을 각자의 값어치대로만 대접하면, 태형을 피할 사람 있어요? 당신의 명예와 가치에 버금가게 그들을 대접하시오, 그들의 자격이 모자랄수록 당신의 선심은 더욱 값질 테니까.(85쪽)

 

햄릿: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94쪽)

 

햄릿: 가장 깊은 내 영혼이 선택의 주체 되고 인간들을 선별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그대를 자기 사람으로 확정했네. 왜냐하면 그대는 모든 해를 입으면서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운명의 시련과 보답을 꼭같이 고맙게 맞이한 사람이니까. 그러므로, 혈기와 분별력이 너무나 잘 배합되어 운명의 여신이 아무 곡조나 연주하는 피리가 아닌 이들은 복받았어. 격정의 노예가 아닌 사람 알려주게. 그럼 난 그를 그대처럼 내 심중에, 암, 내 마음 한가운데 지니겠네. (104-5쪽) 

 

배우 왕: 지금 당신 말한 대로 생각한다 믿지마는 우리들이 작심한 바 우린 자주 깨뜨리오. 결심이란 기껏해야 기억력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그 힘이란 미약하오. 그 열매가 시퍼럴 땐 나무 위에 달렸짐나, 익게 되면 그냥 둬도 떨어지는 법이라오. 우리들이 자신에게 빚진 것을 잊어버려 못 갚는 건 정말이지 피할 수가 없는 거요. 격정 속에 우리들이 자신에게 제안한 건 그 격정이 사라지면 결심조차 없어지오. 슬픔이나 기쁨이나 격결하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그 자체가 소멸되오. 기쁜 마음 광분하면 슬픈 마음 통탄하고, 별것 아닌 사건으로 슬픔 기쁨 엇갈리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아니하며, 사랑조차 운에 따라 바뀌는 건 이상할 것 하나 없소..... 그렇지만 순서대로 시작에서 끝을 내면, 의도한 바 운명과는 정반대로 가는지라 우리들이 계획한 건 끊임없이 뒤집히오. 우리 생각 우리 거나, 그 결과는 아니라오. (111-2쪽)

 

햄릿: 덕이 없더라도 그걸 몸에 걸쳐보세요. 악습에 대한 감각을 모조리 잡아먹는 습성이란 괴물도 이 점에선 천사랍니다. 즉 곱고 착한 행동이 습관이 되면, 그놈이 쉽사리 입을 수 있는 외투나 예복 또한 준답니다.오늘 저녁 자제하면 그 때문에 다음번 금욕은 조금 쉽고, 그 다음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은 천성의 각인조차 바꿔놓을 수 있으며, 악마를 누르거나 놀라운 힘으로 그놈을 내던집니다. (133-4쪽)

 

햄릿: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난 내가 왜 이건 하리라고 살아 말하는지 모르겠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진정으로 위대함은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149쪽) 

 

왕: ...사랑의 발단은 시간임을 알며, 그 불꽃과 열기도 시간 가면 줄어듦을 실제 증거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길 속엔 그것을 약화시키는 일종의 심지나 검댕이 자라는 법이며 언제나 꼭같이 좋은 것도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좋은 것도 넘치면 홧병처럼 제풀에 죽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픈 일 하고플 때 해야 돼. 왜냐면 <하고픔>은 말이 많고 손이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변하고 줄어들고 지연되며, <해야 됨>도 한숨이 피 말리는 것처럼, 누그러지면서 우리를 해치니까. (168쪽)

 

햄릿: 아무 상관 없어. 우린 전조를 무시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잖은가. 죽을 때가 지금이면 아니 올 것이고, 아니 올 것이면 지금일 것이지. 지금이 아니라도 오기는 할 것이고. 마음의 준비가 최고야. 누구도 자기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 모르는데, 일찍 떠나는 게 어떻단 말인가? 순리를 따라야지. (198-9쪽)

 

2014.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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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멘토를 자처하는 시대이자 행복이 화두인 시대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행복에 관한 많은 책들은 과거와 미래에 초점을 두지 말고 오로지 현재에 충실할 것을 주장한다. 과거와 미래에 생각을 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단호히 꾸짖으면서.

 

나는 늘 의문을 가졌었다. 내가 기르는 개는 가족들의 무지 혹은 고의로 인해 자신이 드물지 않게 받았을 불쾌하고 가혹한 대우에 대해 원한을 가지거나, 미래의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오로지 현재에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속적인 불만이나 고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부족하지 않은 음식, 낮잠을 청할 따듯한 햇볕, 하루 한두 차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배설을 하기 위한 짧은 산책 정도만으로도 더없이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삶을 행복한 삶이라 부른다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은 어떠한 정신적 고통도 목적도 의무도 책임도 없는 개의 생활을 종종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그런 삶도 의미 있는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생명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삶이 저절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누군가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는다 해도 내가 그것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내 삶의 의미는 오직 나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고등동물인 우리 인간에게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행복 담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처럼 어떠한 자기 의지도 가지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순응하여 살아간다면 고도로 정신적인 인간 행위의 산물들인 철학이나 예술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발명품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욕망으로부터, 회한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현재에만 살라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었다. 그런 것을 자유라 부르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의문에 대해 반대 쪽 끝에는 가장 분명해 보이는 해답이 준비되어 있다. 오디세우스가 연(로터스) 열매를 먹고는 달콤한 만족과 행복감에 빠져 귀향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잊을뻔 하지만 끝내 망각과 싸워 이기고, 이후에도 자신을 붙잡아 두려는 다양한 유혹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귀향에 성공하는 이야기만큼 그 적절한 예가 또 있을까! 《오디세이아》는 인간의 자기의지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대표적인 예술작품이고, 서양문명의 전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이러한 오디세우스적 삶에 대한 예찬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주인공 살인자가, 자신의 뇌가 조금씩 침식당하고 있는 질병인 치매의 무서움은 그것이 과거 기억을 지워버리는 일 보다는 미래기억을 갉아먹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핵심적이다. “미래라는 것이 없으면 과거도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기 때문에 말이다.

 

일견 맞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저절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자신만의 목적, 욕망, 의지, 희망.... 어떤 단어로 표현되든 미래를 염두에 둔 그 무엇 없이 말이다. 끝없이 같은 일만을 반복하는 단순육체노동자로만 살아가는 일이나 중산층 주부로 안락한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우울증적 피로를 가져다 주는 게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란 게 불확실한 거라면 미래에 대한 의지와 현재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건가? 살인자는 자신의 기억력은 심각하게 나빠져가지만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의 목표, 즉 미래기억만큼은 확고하게 지켜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딸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실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보호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던, 자신의 딸이라 여겨온 여성을 죽인 건 자기자신이며, 딸의 잠재적 살인자라고 생각했던 이는 실은 자신을 조사해온 경찰이었다니…!  

 

그렇다. 기억이란 건 본질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것이고 과거의 기억을 잊거나 왜곡한다는 건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목적도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자아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치매 환자가 아니더라도 망각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그러니 은희와 나누었던 그 많은 대화들은 다 뭐란 말인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지어낸 것들이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상상이 지금 겪는 현실보다 더 생생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당황해 하는 살인자의 심정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닌 것이다. 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너무나 생생해서 진실이 아닐 리 없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목적의식적 욕망과 현재의 행위에 대한 미약하거나 단호한 믿음과 선택은 얼마나 일관성 없으며 얼마나 허망한 것들일까.... 그러니 정녕 쓸데없이 진지하게 산다는 건 웃기는 일이 되고 마는 걸까....   


   오디세우스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내 귀향에 성공했는데 페넬로페는 재가하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자리를 잊어가고 있다면 오디세우스는 차라리 로터스나 먹으며 살던지 칼립소에 정착해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을 걸 하고 후회하게 되지 않았을까. 


   가족의 의리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무한한 믿음과 그에 응당하는 해피엔딩식 보상은 어쩐지 너무 순진해보인다. 고대적 순진함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고대 사회라고  해서 인간들 사이의 욕망이 충돌하는 일이 적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양상이 더욱 적나라했을 지도 모른다.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농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실재 삶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그런 실재 삶의 부조리를 견디게 만들 만한 환상을 창조하는 일이 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이런 허구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면서 그것이 일종의 공동체 이데올로기 교육을 담당했던 건 아닐까.  우리나라의 심청전이나 춘향전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리에겐 허구라 할 지라도 어떤 단호한 믿음에 목숨을 거는 일이 필요한 걸까? 아님 그런 진지함은 아직 인생을 잘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 속한 것일 뿐, 어른이라면 그저 담담하게, 묵묵히, 삶의 무의미를 견디기 위해 서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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