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멘토를 자처하는 시대이자 행복이 화두인 시대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행복에 관한 많은 책들은 과거와 미래에 초점을 두지 말고 오로지 현재에 충실할 것을 주장한다. 과거와 미래에 생각을 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단호히 꾸짖으면서.

 

나는 늘 의문을 가졌었다. 내가 기르는 개는 가족들의 무지 혹은 고의로 인해 자신이 드물지 않게 받았을 불쾌하고 가혹한 대우에 대해 원한을 가지거나, 미래의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오로지 현재에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속적인 불만이나 고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부족하지 않은 음식, 낮잠을 청할 따듯한 햇볕, 하루 한두 차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배설을 하기 위한 짧은 산책 정도만으로도 더없이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삶을 행복한 삶이라 부른다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은 어떠한 정신적 고통도 목적도 의무도 책임도 없는 개의 생활을 종종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그런 삶도 의미 있는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생명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삶이 저절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누군가가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는다 해도 내가 그것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내 삶의 의미는 오직 나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고등동물인 우리 인간에게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행복 담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처럼 어떠한 자기 의지도 가지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순응하여 살아간다면 고도로 정신적인 인간 행위의 산물들인 철학이나 예술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발명품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욕망으로부터, 회한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현재에만 살라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었다. 그런 것을 자유라 부르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의문에 대해 반대 쪽 끝에는 가장 분명해 보이는 해답이 준비되어 있다. 오디세우스가 연(로터스) 열매를 먹고는 달콤한 만족과 행복감에 빠져 귀향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잊을뻔 하지만 끝내 망각과 싸워 이기고, 이후에도 자신을 붙잡아 두려는 다양한 유혹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귀향에 성공하는 이야기만큼 그 적절한 예가 또 있을까! 《오디세이아》는 인간의 자기의지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대표적인 예술작품이고, 서양문명의 전통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이러한 오디세우스적 삶에 대한 예찬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주인공 살인자가, 자신의 뇌가 조금씩 침식당하고 있는 질병인 치매의 무서움은 그것이 과거 기억을 지워버리는 일 보다는 미래기억을 갉아먹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핵심적이다. “미래라는 것이 없으면 과거도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기 때문에 말이다.

 

일견 맞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저절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자신만의 목적, 욕망, 의지, 희망.... 어떤 단어로 표현되든 미래를 염두에 둔 그 무엇 없이 말이다. 끝없이 같은 일만을 반복하는 단순육체노동자로만 살아가는 일이나 중산층 주부로 안락한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 우울증적 피로를 가져다 주는 게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란 게 불확실한 거라면 미래에 대한 의지와 현재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건가? 살인자는 자신의 기억력은 심각하게 나빠져가지만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의 목표, 즉 미래기억만큼은 확고하게 지켜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딸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실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보호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던, 자신의 딸이라 여겨온 여성을 죽인 건 자기자신이며, 딸의 잠재적 살인자라고 생각했던 이는 실은 자신을 조사해온 경찰이었다니…!  

 

그렇다. 기억이란 건 본질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것이고 과거의 기억을 잊거나 왜곡한다는 건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목적도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사라짐을 의미한다. 자아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치매 환자가 아니더라도 망각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그러니 은희와 나누었던 그 많은 대화들은 다 뭐란 말인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지어낸 것들이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상상이 지금 겪는 현실보다 더 생생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당황해 하는 살인자의 심정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닌 것이다. 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너무나 생생해서 진실이 아닐 리 없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목적의식적 욕망과 현재의 행위에 대한 미약하거나 단호한 믿음과 선택은 얼마나 일관성 없으며 얼마나 허망한 것들일까.... 그러니 정녕 쓸데없이 진지하게 산다는 건 웃기는 일이 되고 마는 걸까....   


   오디세우스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내 귀향에 성공했는데 페넬로페는 재가하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자리를 잊어가고 있다면 오디세우스는 차라리 로터스나 먹으며 살던지 칼립소에 정착해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을 걸 하고 후회하게 되지 않았을까. 


   가족의 의리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무한한 믿음과 그에 응당하는 해피엔딩식 보상은 어쩐지 너무 순진해보인다. 고대적 순진함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고대 사회라고  해서 인간들 사이의 욕망이 충돌하는 일이 적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양상이 더욱 적나라했을 지도 모른다.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농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실재 삶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그런 실재 삶의 부조리를 견디게 만들 만한 환상을 창조하는 일이 보다 유용하기 때문에 이런 허구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면서 그것이 일종의 공동체 이데올로기 교육을 담당했던 건 아닐까.  우리나라의 심청전이나 춘향전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리에겐 허구라 할 지라도 어떤 단호한 믿음에 목숨을 거는 일이 필요한 걸까? 아님 그런 진지함은 아직 인생을 잘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 속한 것일 뿐, 어른이라면 그저 담담하게, 묵묵히, 삶의 무의미를 견디기 위해 서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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