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를 사랑하는 팬을 자처하면서도 이번에는 한동안 그의 신작을 구입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작년에 작가가 어느 팟케스트 방송에 나와 자신의 신작 소설 내용과 주제에 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된 적이 있는데, 어쩐지 안 읽어봐도 알 것만 같은 살짝 뻔한 내용에다가 감상주의로 빠졌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다작 작가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지금껏 한 권을 제외하고 모조리 읽어 온 자칭 김연수빠였던 내가 원더보이를 읽고 나서 고개 들기 시작한 불안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던 거다. 그러나... 팬으로서의 의무를 끝내 저버릴 수는 없었다고나 할까. ^^;;

 

안타깝게도,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로 드러났다. 책을 덮고 나자 마치 재미있고 적당한 감동을 주는 헐리웃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이 들었지만, 뇌와 오감을 자극하는 그 무엇(문학적 매혹이라고나 할까...?) 혹은 뒤통수를 내려치는 깨달음 같은 건 없었다. 폴 오스터 식의 우연적인 얽히고설킴이 이어지고 약간의 반전 비슷한 것도 있고 줄리언 반즈 식의 비밀과 진실 추적도 있지만, 아쉽게도 독자로서의 내가 그로 인해 깜짝 놀라게 된다거나 손에 땀을 쥐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해지게 만드는 삶의 아이러니도, 그렇다고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처절한 회한도 없었다. 소설에 왜 이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1. 시점의 변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혹 부적절한 시점의 이동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는 시점이 여러 차례 바뀐다. 주인공 카밀라의 1인칭 화법에서 시작된 소설은 중반부에는 2인칭 화법(카밀라의 생모 정지은의 시점)이라는 독특한 시점으로, 다음엔 희재의 친구들인 우리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엔 또 다른 희재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런 시점의 다양한 변화는 동일한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적절할지 몰라도, 단순히 스토리(진실이 점차 드러나는)의 전개를 떠맡는 역할을 주도하는 사람이 바뀌는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오히려 소설에의 몰입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주는 게 아닐까? 만약 마지막에 한 두 페이지라도 다시 한 번 카밀라의 시점으로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시점 자체가 이동하다 보니, 진실과 점점 가까이 대면하게 되면서 극심한 내면적 갈등을 겪었을 카밀라(희재)의 내적 격동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이 또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한동안은 점점 추해지는 모습으로)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는 진실을 마주하는 동안 느꼈을 내밀한 고통을 밀도 있게 경험하기를 기다렸던 나는 좀 김이 빠져버렸던 게 사실이니까.

 

2. 소문과 소통

이 소설에서 애초에 죄를 불러온 건 두 가지 마음이다. 타인의 명예와 안위를 위협해서라도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지키려는 본능과, 분노로 인한 복수심. 이 두 가지가 약간의 불운, 약간의 어리석음과 만나면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때로는 사소한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몰고 오는 것이다. 신혜숙과 미옥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불운에 대한 복수심으로 죄 없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방식에 대해 자연스레 줄리언 반즈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는 건 나 뿐일까? 그리고 악의와 무지가 결합하여 낳은 아기라고 할 수 있는 소문이 때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내용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낯익은 <올드보이>의 전설 아닌가?

 

저는 소문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이니까요. 저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 무지한 마음이 무서울 뿐이죠.”

 

대부분의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절망과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은 종종 고통과 절망에 빠진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사악한 흉기로 돌변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수라’ 세계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용기와 중단 없는 노력만이 구원의 동아줄이 되어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그런데 자신의 절망과 타인의 절망이 만나 마술 같은 이해와 소통에 이르는 순간을, 불가피하게 일찍 헤어진 엄마와 자식 사이만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관계가 또 있을까! 이 소설이 진부함을 무릅쓰고 쓰여졌다기 보다는 바로 그 진부함에 기대어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거두기 어려운 이유다.

 

또 이런 주제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진실 찾기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다소 흔한 추리 소설적 방식 역시 아쉽게도 줄리언 반즈의 소설에서처럼 강한 긴장감을 유발하지도, 치명적인 충격을 주지도 못했다.

 

3. 이야기를 통한 구원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미 사유된 바 있었던 삶의 진리다. 질문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차피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들이니 삶에는 큰 의미란 게 없다는 건가, 아니면 최대한 실수를 적게 하기위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이 문제를 고민하며 오락가락했던 쿤데라의 토마시와는 달리, 십대 소녀 지은의 단호한 선택은 후자였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런 소리들 사이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 번의 인생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들리는 목소리인 셈이었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건 그날 새벽, 조선소 사장에게 부탁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양관으로 달려가면서 지은이 수없이 읊조렸던 말이라는 걸 이제우리는 알게 됐다.

 

물론 이렇게 영민한 지은도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 오히려 흔치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으리라.

 

우리는 이제 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는 걸.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이제 우리가 그동안 김연수의 숱한 단편들을 통해서 공감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할 차례다. 좌절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전하고 듣는 일 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구원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농무가 풍년을 기원하듯이, 두루미가 습지를 찾아가듯이, 이야기는 끝까지 들려지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작가가 들려주는 어떤 슬픈 이야기에서도 사랑이 빠지는 일은 없다. 희재가 된 카밀라의 생모 지은의 절망과 좌절 사이에도 예쁜 사랑 이야기가 부록처럼 붙어있다. 가려진 진실은 대부분 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언제나 햇볕에 반짝 하고 아주 짧은 순간 그 존재를 드러내는 사금파리처럼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숨어있다는 믿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지만, 십대의 출산에 가슴 저릿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억이 녹아들어가 있는 경우가 정녕 그리 흔하겠는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진실을 찾는 이들에게는 더한 절망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4. 한없이 보드라운 문체의 아름다움

앞서 나열한 바대로 김연수의 이번 소설에서는 안타깝게도 주제, 구성, 인물 등 어떤 면에서도 일말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좌절과 소통에 대해 조심스레 읍조리는 변함없는 김연수를 만나는 기쁨은 내게 작은 위안을 주는 점도 있었다. 오랜 고향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서로 공감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며 편안한 시간을 함께하는 따듯한 느낌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감성에 잠시나마 젖어 있을 수 있었던 건 꽤 좋은 느낌이었다.

 

또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는 김연수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답고 감성적인 문장들이다. 문장의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때로는 글 자체에 취하게까지 만드는 힐링 소설가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단연 그가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는 그게 바로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첫 번째,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 고독을 즐기지. 그러니까 레드우드의 에너지에 끌려서 거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면적이고 달의 영향권 안에 있어. 두 번째, 그래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강한 사람들과도 투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 세 번째, 무엇보다도 네게는 쓸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

 

흔들리는 뱃전에 서서 시내 쪽을 바라보는데, 그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정말 아름답게 반짝였다. 흩뿌린 보석 같기도 하고, 은하수 같기도 했다. 불빛이 참 예뻐요, 라고 좋아했더니 아빠는 아름다운 것들은 좀 떨어져서 봐야지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으니까.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태도가 진실을 만들어낸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한없이 예쁘게 표현한 이런 문장들은 김연수만의 전매특허품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 건 사실 그의 거창한 주제의식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이런 말들의 잔치에 빠져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지금 가려는 식당이 이테리 식당인건 아는데, 파스타나 피자가 나오고 주재료로 해산물이나 치킨이나 비프가 들어간다는 것도 아는데, 이번엔 어떤 새로운 첨가재료가 들어가서 색다른 맛을 내는 변종 메뉴가 소개될지를 기다리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앞으로도 계속 나의 삶과 함께 할 것 같다는 말이다. 다만, 조금만 더 치열하게 질문하고 밀어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작품이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출간되더라도 말이다. 그가 달짝지근한 위로와 만족을 주는데 만족하는 대중소설가가 되기보다는 문학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다. 문학은 도덕 교과서나 주말 드라마와는 다른 것 아닌가? 그는 지금껏 우리나라의 가장 지적인 작가 가운데 선두주자 아니었던가!

 

2013. 04.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읽은 폴 오스터 책 가운데 가장 말랑말랑한 작품이다. 이번엔 열린책들에서 글자간격도 널널하게 편집해주시고... 문장들 역시 전작들에 비해 수월하게 읽히는 맛도 나쁘지 않았다. 번역도 한 몫 한 듯.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나가는 청춘일기지만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폴 오스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척 지적인 소설이다. 많은 한국 작가들이 사랑해마지않는 작가 폴 오스터. 그가 이후에 지속적으로 천착하게 될 문제의식들을 한꺼번에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내가 먼저 만났던 몇몇 후속 작품들 속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변주되고 있지만, 이 작품만큼 플롯 자체보다 작가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 언어에 대한 고민, 서사구조와 방식에 대한 고민 등이 압축적으로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도 없는 것 같다.

 

문학 이론에 대한 짧은 지식 탓에, 책을 덮고도 꽤 오랜 시간을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했다. 그 결과, 이 소설은 탐정이라는 인간에 대한 직업적 관찰자와 닮은 직업을 가진 작가가 실재로 탐정이 되어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마침내 관찰을 하는 주체와 관찰 대상의 심리적 전도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실은 관찰 대상이었음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마저 보여준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세세한 것까지 그대로 묘사하는 기록자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내적 논리를 사유하는 사색가로, 나아가 오로지 전체적인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갖는 추상적 탐미주의자로, 자신의 지상의 삶마저 잃어버린 유령같은 절대 고독자로,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어두운 과거와 작별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관통하면서 내가 찾아낸 주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즉 작가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위해 자기 자신의 평범한 실재적인 삶을 버리고 영원히 고독과 친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작가는 정녕 유령같은 존재일까?

 

2. 인간의 삶은 과연 얼마만큼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그 우연성을 용기 있게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의무일까, 아니면 최대한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기위해 애쓰는 게 보다 가치 있는 삶일까?

 

3. 인간의 삶은 관습적인 사회적 관계(가족, 동료...)의 지배를 받는다. 여기서 벗어나 자기결정권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 완전히 독립적, 주체적으로 사는 일이 가능할까?  어떤 쪽을 지향하는 삶이 보다 윤리적인 걸까?

 

4. 인간은 각기 고유의 정체성이란 걸 가지고 있을까? 정체성은 관계의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변하기도 하는 모호한 것일까

 

물론 작가가 어떤 명시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대체로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70, 80년대를 풍미했던, 그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런 주제들에 대한 관심이 폴 오스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글쓰기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 가장 성실하게 고민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 전 읽은, 비교적 최근작인 환상의 책에서도 거의 같은 주제가 변주되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는 질문 보다는 작가로서의 확신 같은 게 더욱 느껴졌었다. 특히 이야기가 절망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주목한 점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이야기에 한껏 공감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소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덕분이었다.

 

소설에서 재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폴 오스터 만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나는 뉴욕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유리의 도시>에 나오는 돈키호테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이유가, 이야기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미치광이가 된 실재 인물 돈키호테가 글로 표현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거나, 실은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는 등의 가설을 내어놓지만, 작중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자신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재미를 통해 자신의 기이한 행위에 공감하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작가를 이용한 거라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주인공이고, 주인공의 자기 삶에 대한 정당화의 성패 여부는 재미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고마운 말을 해주다니! 덕분에 아무리 주제의식이 신선하고 날카롭다 해도 도무지 재미없는 이야기에는 순순히 공감할 수 없었던 나도 이젠 좀 더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재미없는 소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으리라! ^^;;

 

2013. 04. 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인시공 -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과학자가 쓴 예쁜 책. 휴식같은 책, 솔바람같은 책. 특히 양상치 셀러드처럼 상큼한 앞부분이 좋다. 이 책을 읽고나서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을 사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키, 하루키 - 하루키의 인생 하루키의 문학
히라노 요시노부 지음, 조주희 옮김 / 아르볼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 대한 평전을 출간하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의 본문을 읽기 전부터 나는 내심 저자의 용기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인 히라노 요시노부 스스로도 서문에 밝히고 있는 바대로, 이 평전은 하루키 자신이 수많은 잡지와의 인터뷰, 에세이, 강연 등에서 직접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무척 조심스레 쓰여 졌다. 사실 애초부터 하루키에 대한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을 것이라거나, 색다른 관점으로 심도 있게 꿰뚫는 하루키의 문학세계 따위를 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키에 대한 팬심 하나로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이 책은 나를 작가 하루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동안 나도 하루키 작품의 애독자로서 적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둘러싼 모험상실의 시대,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 스푸트니크의 여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Q84.... 아마도 단일 작가의 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것 같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적지 않게 출간된 그의 에세이도 꾸준히 읽어왔기 때문에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독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히라노 요시노부의 성실한 자료 조사와 문학 연구자로서의 내공 덕분에, 그동안 내가 몰랐던 몇 가지 주변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팬들에게는 작가에 대한 사소한 정보도 소중하다!), 하루키 문학을 관통하는 주제의 변화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

 

그동안 마치 작가가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아님 혹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무튼 미시마 유키오처럼 아버지가 승려였다!), 1Q84에 자주 언급되는 아쿠타가와 상에 대한 그의 심상치 않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엔도 슈사쿠나 오에 켄자부로와 같은 대가들이 각종 문학상 심사위원으로서 하루키의 작품을 평한 심사평 내용 등은 꽤 흥미로웠다.

 

사회 참여적 태도라 할 수 있는 커미트먼트로 이행하기 전 그의 문학이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디태치먼트였던 것도 하루키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세대 전체의 흐름이었다는 저자의 통찰도 재미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제 세대 전체가 보다 사회 참여적이 되었단 말일까? 몇 십 년 늦게 일본의 뒤를 밟아나가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쩌면 아직도 국가나 사회적 관습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열심히 디태치먼트중인 지도 모른다. ‘개인으로서 독립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훈련... 확실히 그런 훈련은 좀 더 필요하다.(우리에겐 계몽이 더 필요해요!) 물론 그 개인이 단순한 상품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서.

 

하루키 소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에 대한 하루키 자신의 명쾌한 설명도 재미있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완전히 도망칠 수 없는 문제, 어디까지고 쫓아오는 자아의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완전히 도망칠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양입니다. (74)

 

하루키에게 자아의 그림자란 대체 뭘까? 그게 그에겐 왜 그토록 중요할까...? 그의 책들을 모조리 다시 읽어보고 싶다. 처음으로 평단의 전적인 칭찬을 받아낸 작품이라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 3부작과 함께. 


그가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 상을 수상할 때 했던 유명한(일부에서는 비아냥거리가 되었던) ‘벽과 계란연설의 한 부분은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개인의 혼이 가진 존엄함을 드러내어 거기에 빛을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의 혼이 시스템에 끌려 들어가 멸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거기에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겁주고 울고 웃게 만듦으로써 개개인의 영혼이 가진 소중함을 밝히려고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매일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153)

 

책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분량을 채운 뒷부분의 하루키 작품 줄거리 모음을 보고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앞부분 내용의 성실함을 감안해서 그냥 너그러이 보아 넘기기로 했다

 

2013. 04. 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