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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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지적인 소설이다. 많은 한국 작가들이 사랑해마지않는 작가 폴 오스터. 그가 이후에 지속적으로 천착하게 될 문제의식들을 한꺼번에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내가 먼저 만났던 몇몇 후속 작품들 속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변주되고 있지만, 이 작품만큼 플롯 자체보다 작가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 언어에 대한 고민, 서사구조와 방식에 대한 고민 등이 압축적으로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도 없는 것 같다.

 

문학 이론에 대한 짧은 지식 탓에, 책을 덮고도 꽤 오랜 시간을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했다. 그 결과, 이 소설은 탐정이라는 인간에 대한 직업적 관찰자와 닮은 직업을 가진 작가가 실재로 탐정이 되어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마침내 관찰을 하는 주체와 관찰 대상의 심리적 전도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실은 관찰 대상이었음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마저 보여준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세세한 것까지 그대로 묘사하는 기록자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내적 논리를 사유하는 사색가로, 나아가 오로지 전체적인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갖는 추상적 탐미주의자로, 자신의 지상의 삶마저 잃어버린 유령같은 절대 고독자로,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어두운 과거와 작별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는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관통하면서 내가 찾아낸 주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즉 작가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위해 자기 자신의 평범한 실재적인 삶을 버리고 영원히 고독과 친구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작가는 정녕 유령같은 존재일까?

 

2. 인간의 삶은 과연 얼마만큼 우연성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그 우연성을 용기 있게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의무일까, 아니면 최대한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기위해 애쓰는 게 보다 가치 있는 삶일까?

 

3. 인간의 삶은 관습적인 사회적 관계(가족, 동료...)의 지배를 받는다. 여기서 벗어나 자기결정권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 완전히 독립적, 주체적으로 사는 일이 가능할까?  어떤 쪽을 지향하는 삶이 보다 윤리적인 걸까?

 

4. 인간은 각기 고유의 정체성이란 걸 가지고 있을까? 정체성은 관계의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변하기도 하는 모호한 것일까

 

물론 작가가 어떤 명시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대체로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70, 80년대를 풍미했던, 그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런 주제들에 대한 관심이 폴 오스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글쓰기의 의미와 방식에 대해 가장 성실하게 고민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 전 읽은, 비교적 최근작인 환상의 책에서도 거의 같은 주제가 변주되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는 질문 보다는 작가로서의 확신 같은 게 더욱 느껴졌었다. 특히 이야기가 절망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주목한 점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이야기에 한껏 공감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소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덕분이었다.

 

소설에서 재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폴 오스터 만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나는 뉴욕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유리의 도시>에 나오는 돈키호테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이유가, 이야기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미치광이가 된 실재 인물 돈키호테가 글로 표현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거나, 실은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는 등의 가설을 내어놓지만, 작중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작가 폴 오스터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자신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재미를 통해 자신의 기이한 행위에 공감하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작가를 이용한 거라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주인공이고, 주인공의 자기 삶에 대한 정당화의 성패 여부는 재미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고마운 말을 해주다니! 덕분에 아무리 주제의식이 신선하고 날카롭다 해도 도무지 재미없는 이야기에는 순순히 공감할 수 없었던 나도 이젠 좀 더 떳떳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재미없는 소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으리라! ^^;;

 

2013.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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