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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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프랑스 소설에 관심이 가서 발자크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며 무려 137편의 소설로 구성된 인간 희극을 야심차게 집필했는데, 고리오 영감은 그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리얼리즘의 선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리만큼 섬세하고 날카롭다.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가장 끔찍한 고통 앞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하숙집 주인과 하숙인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지만, 두 딸에 대한 끔찍한 사랑으로 거액의 지참금과 함께 두 딸을 각기 귀족과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 시키지만, 이들에게 평생에 걸쳐 모은 모든 돈을 내어주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궁핍함과 고독을 끌어안고 비참하게 살아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몰락한 부르주아 고리오 영감, 허영과 사치로 똘똘 뭉쳐 마지막까지도 아버지와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고 배반을 일삼는 구제불능의 이기적인 두 딸, 이들 간의 관계를 지켜보며 자신의 양심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출세에 대한 목마름으로 끊임없이 상류귀족사회(사교계)를 기웃거리는 가난한 법대생 라스티냐크(그의 사회적 처지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적 갈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를 연상시켰다. 말미의 <작품 해설>을 읽어보니 도스토예프스키는 발자크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캐릭터에서도 힌트를 얻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자처럼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꿰뚫어보며, 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법률을 조롱하여 의식적 악행을 일삼고 라스티냐크를 악의 세계로 유혹하는 불사조보트랭....

 

이런 인물군의 배치는 부르주아 계급 사회가 막 형성되고 있을 당시에는 나름 신선하고 날카로운 세태 발굴로 주목 받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수많은 멜로드라마 구조의 전형이 되었다. 이런 인물들 간의 갈등은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 주부들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주말 드라마의 단골 내용이기도 하지 않은가! 발자크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200여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보아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 아니 마치 지금의 우리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수치심마저 들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고 슬프기까지 하다. 출세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수그러들기는커녕 갈수록 더욱더 맹위를 부리고 배반과 후안무치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문학 비평의 신과도 같은 존재인 헤럴드 블룸은 보트랭이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에 이 소설에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한국에는 이미 홍길동이 있고 서구에도 로빈훗이라는 인물이 변주되어온 지 오랜데, 보트랭이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블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보트랭의 문학적 계보는 고딕 양식이라기보다 고양된 낭만주의에 가깝다. 그는 바이런적인 영웅-악당이지만 생존자다. 바이런의 작품에서는 어느 누구도 마흔에 도달한 사람이 없지만, 범죄 세게의 보트랭은 불사신이다. 보트랭은 탐구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경멸하는 사회와 교전 중이다... 보트랭은 실제도 무정부주의자이지만 전체 범죄계를 전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를 오만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보트랭은 시칠리아인이 아니라 파리지앵이었다. 그래서 그의 악마적 자부심은 가족적이 아니라 개인적이다. 그 추진력의 동기는 동성애적이지만 발자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젊고 잘생긴 제자들에 대한 갈망이 주로 성적인 것과 연관되었는지 아니면 가부장적 태도를 표방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보트랭은 젊은 제자들이 여성과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성적인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세계문학의 천재들, 809강조 표시는 필자의 것임.)

 

그러니까 보트랭은 19세기를 풍미했던 낭만주의적 영웅의 전조였던 것이다. 사회의 규범이나 법률은 무시를 넘어 조롱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과 감성만을 절대시하며, 강자의 오만을 체화한 무정부주의자라는 또 하나의 전형 말이다. 홍길동과 로빈훗의 감성이 권력자에 대한 분노와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연민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19세기 영웅들의 감성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약자에 대한 연민 보다는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그 사회를 통째로 거부하고 전복할 수 있는 개별적 인간의 힘, 인간 의지의 크기와 강도, 즉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다른 낭만주의 영웅과는 달리 보트랭은 불사신으로 오랫동안 살아남기까지 한다. 어딘가 <다크 나이트>의 조커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하고... 어쨌든, 이런 오만한 천재캐릭터를 사랑하는 헤럴드 블룸의 유치한 선민사상과 마초적 악취가 갑자기 훅, 하고 내 코를 건드리는 바람에,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진실에 대한 발자크의 신랄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감탄에 저릿저릿했던 내 두뇌와 가슴이 황급히 냉정을 되찾고 말았다.

 

블룸에 따르면, 발자크의 후속작품들 속에서 보트랭은 하계의 악마에서 파리 경찰조직의 신적 존재로 단계적으로 변모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발자크 자신처럼 합법주의자, 왕당파, 그리고 과두정치의 수호자가 된다고. 그러니까 조커가 베트맨이 된다는 급 싱거워지는 얘기다.

 

그런데 더 맥 빠지게 만드는 얘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머싯 몸에 따르면(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발자크에게는 청년 라스티냐크처럼 명성과 부에 대한 야심이 평생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지나친 허영과 낭비벽으로 평생을 빚더미 위에서 살았으며, 이를 해결하기위해 돈 많은 여성들을 결혼 대상으로 삼아 끈질긴 구애를 반복하는 파렴치하고 저열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 작품만을 읽고 끝내야 좋은 건가... 정신분열도 아니고, 작품 속에서 그토록 혐오스럽게 묘사했던 인물들의 행태를 자신이 반복하고 살았다니, 인간의 위선이란 그 끝이 어딘가 싶다. 아님 두뇌라는 불변의 자본을 지닌 천재의 도덕성은 보통 인간의 도덕성보다 더 약해지기 쉬운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역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욕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더욱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아이러니의 또다른 예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게츠비』라는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자기 자신이 지닌 욕망 덕분이었듯 말이다. 하여간 문학이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슬픈 결론.

 

2013.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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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장석주의 소설창작 특강
장석주 지음 / 들녘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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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마흔의 서재라는 인기 신상으로, 애서가뿐만 아니라 그간 책이 자신의 삶의 일부가 아니었던 이들의 구미마저 잡아당기고 있는 장석주 작가가 10여 년 전 썼던 두툼한 소설 창작 강의록이다. 내게는 처음 접하는 소설 작법책이지만, 사실 이 책은 구체적인 작법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막연하게 소설 읽기를 즐기지만 자신이 왜, 어떤 부분에서 소설 읽기에 매력을 느끼는지, 소설을 읽을 때 어떤 부분들을 의식하면서 읽으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더 잘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콕콕 집어주는 책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려는 사람보다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를 위한 책에 가까운 것 같다. 뒤늦게 어마어마한 양의 정신의 양식을 눈앞 가득 쌓아두고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치울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 처지에는 딱 맞는 책이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굶주려온 탐식가이긴 해도 무작정 배만 불리는 것보다는 맛을 제대로 음미하면서 그 영양을 섭취하고싶으니까.

 

이 책은 소설창작의 기초에 관한 설명이 중심인 1부와, 90년대 한국소설 양상에 대해 개괄하고 있는 2,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게 보다 실질적인 정보를 주었던 건 2부의 내용이었다. 1부는 소설의 구성요소와 글쓰기 훈련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들을 담고 있는데, 소설의 구성요소에 관한 강의는 중고교 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일반적인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이었고, 글쓰기 훈련에 관한 조언은 주로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이 책 강추한다!)

 

2부의 내용은 다른 책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보석과도 같은 정보들로 구성되어 있다. 90년대 한국 문학계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거대한 지각변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제작들에 대한 주요 비평들까지도 총망라해 놓았다. 80년대의 이념적, 이성적 사유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인의 실존의 문제와 감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드러나게 된, 거대한 변화의 시기였던 90년대 한국 문학의 특징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발점이 되었던 소설, 페미니즘 소설, 대중소설, 환상소설 등으로 명쾌하게 축약해서 정리해준 저자 덕분에 이 시기 한국 문학의 흐름을 더욱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이다. 2000년대 흐름도 이렇게 잘 정리해 놓은 글이 있다면 좋겠다.(찾아봐야지!)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가 강의 내용의 예시를 위해 사이사이에 배치해 놓은 주옥같은 단편 여러 편을 통째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훌륭한 작가이자 평론가인 저자의 세련된 작품해설을 곁들여서 말이다. 소설 작법 책이 이처럼 재미실용적 가르침을 동시에 주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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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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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닉 혼비가 자신의 독서일기(혹은 칼럼?)를 모아 엮은 책인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하다고 소개를 한 탓에 구입해 두고는 수많은 다른 대기자들과 함께 한 구석에 고이 모셔놓았던 이 책을 거의 1년 만에 손에 들게 되었다. 러시아 문학 애호가인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을 읽던 도중 이 책이 재미있다는 소개를 다시 접하게 된 덕분이다. 만만한 두께에다 글자간격도 널찍하게 편집되어 있고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내용이라 간만에 부담 없이 좋은 책을 즐겼다. 추리소설 형식이지만 내용이 어느 정도 예측되는 면이 있어서 긴장감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전형적인 추리물에서 나타나는 팽팽한 서사 중심이 아니라서 오히려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인물들의 심리와, 그 모든 사건과 행위가 암시하고 있는 의미들을 천천히 곱씹어보게 만드는 행간의 공백이 느껴지는 서술방식 등은 이 소설이 결코 가벼운 소설이 아님을 말해준다.

 

소설 전체의 느낌은 우울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이다. 주인공 빅토르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물원에서 분양 받아 데려온 펭귄 미샤와 함께 살고 있는 소설가이다. 생계를 위해 그는 신문에 죽은 명사에 대한 간단한 약력 소개와 애도의 글을 쓰는 일을 맡게 되면서 여러 가지 뜻하지 않았던 사건들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빅토르는 신문사 직원의 딸 소냐를 우연히 맡아 키우게 되고, 소냐 양육을 위해 고용한 나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가족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빅토르에게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심각한 의문점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 들지 않는다. 가령, 자신이 신문사에서 주는 리스트 속 사람들의 부고를 미리 써두는 일을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상들이 속속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도 말이다.

 

수동적이다 못해 그야말로 무책임한 이런 인간이 주인공이라니, 뒤로 가다 보면 뭔가 커다란 반전이 생기겠지, 하고 읽어나갔지만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도 빅토르의 성격에는 큰 변화가 생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합리화만 심해진다.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외로운 펭귄 박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갈수록 펭귄 미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더해지긴 하지만, 자신의 삶을 둘러싼 온갖 의혹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어떤 근본적인 흔들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 그동안 그에게 벌어졌던 불가사의한 사건들의 실체가 명백히 드러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 가능했던 내용이어서 그다지 놀라운 반전 같은 건 아니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빅토르의 심리에 안타까운 공감이 일긴 했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도 여전히 의문이 남았던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 결정적인 해답을 준 건 책 뒤의 옮긴이의 해설과 인터넷을 통해 찾아 본 작가의 말이었다.

 

소련의 해체로 독립을 이룬 우크라이나는 아직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혼란스러운 상태인즉,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 마피아 조직이 정부와 여타 사회조직의 역할을 대신하고 부패와 불의가 만연한 암울한 시기를 겪고 있다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제야 모든 의문들이 한꺼번에 풀렸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울한 분위기, 주인공의 지나치리만큼 무기력한 모습, 모든 주변 인물들이 왜 그렇게 돈을 밝히는지, 병원이나 사회단체 등 모든 기관이나 조직의 문턱에서 왜 정확한 절차가 없고 불확실한 인물들에 의해 '연줄'이라는 의구심 가득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일들이 해결이 되는지, 이 모든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말이다.

 

당연히, 모든 것이 극도로 불안한 환경 속에서는 관계에 대한 진지한 애착이나 사랑 따위도 생겨나기 힘들 것이다.

 

감정과 생각들이 뒤죽박죽된 채 어쩐 일인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했다. 고독했던 그의 삶은 이제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구속으로 절반씩 채워진 채 변하고 있었다. 삶에 변변치 못하게 흐르던 에너지는 파도가 되어 그를 이상한 섬으로 몰고 갔다. … 그러면서도 그는 멀리 떨어진 채, 심지어 자신의 삶과도 거리를 둔 채 도대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소냐가 출현한 최근까지, 마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능했던 순간마저 놓쳐버려 설명할 수 없는 위험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은 지금까지도.

그의 세계는 이제 자신과 펭귄 미샤, 그리고 소냐로 채워져 있지만 이 작은 세계는 너무 쉽게 깨질 수 있고,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은 이 세계를 지킬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저 무기가 없어서, 아니면 가라테를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이 세계 속에는 진정한 애착은 커녕 일체감도 없고, 더구나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111-112)

 

사실 빅토르가 줄곧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의도적인 무지를 방편 삼아 적극적으로 악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악의 일부가 되면 당장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비록 괴로운 순간도 있고, 이제는 좀 덜하지만 어떤 어두운 일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쉽고 무사태평한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암흑의 세상에서 그 암흑이란 것이 무엇일까? 단지 알지 못하는 악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바로 옆에, 그리고 주위에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작은 세계를 건드리지 못한다. 더구나 자신도 모르게 암흑과 공범이 됐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세계에 대한 불가침, 그리고 평안의 보증수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274)

 

자신의 삶을 둘러싼 악의 구조에 대한 의도적 무지, 이를 발판으로 한 악에의 가담과 그에 대한 익숙해짐은 자기기만적인 환상을 매개로 한 긍정적 확신에서 삼종세트로 완결된다.

 

그녀 역시 가족 놀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사랑의 감정은 없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손에 쉽게 넣을 수 있는 것아닌가? 시골로 이사해서 모든 시설이 갖춰진 넓은 이층집을 사기만 하면 사랑은 곧 촛불처럼 활활 타오르지 않을까? (271-272)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상상이 그의 확신을 더해주었다.

멋지고 햇빛 찬란한 인생이 될 거야.’

그는 이 기대가 실현될 것을 믿어 마지않았다.

하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십자가를 쓰는 일도 여전히 계속됐다. 미샤가 참석해야 할 장례식도 날씨에 아랑곳없이 횟수를 더해갔다. (274)

 

빅토르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에 의해 금전적인 문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받는 데 대해 잠깐 동안 불안을 느끼지만, 이내 유쾌하지 못한 발견들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쉬운 방식이라는 자신만의 인생 노하우를 들먹이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삶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오직 앞으로 전진해야 도달할 수 있는 긴 여로가 바로 인생이라는 결론 끝에 아슬아슬한 평안을 되찾는다. 게다가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없이 무조건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거기에 몰입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거라며 타인을 칭찬하면서 사실상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펭귄 미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려는 계획을 통해 긍지마저 느끼면서도 정작 자기자신의 삶을 바꾸어보려는 생각에는 절래절래 고개를 내젓는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 긍지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 그는 미소 지으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문득 자신의 운명보다 다른 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자신을 바꾸려고 매순간 시도할 때마다 여전히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오히려 더 부담스러워져 버리곤 했다. 그래서 모든 변화는 본질과 상관없이 나쁜 일만 초래했다. (314)

 

이런 생각에 한 번이라도 빠져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처음에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이해할 수 없었던 빅토르의 태도에 대해 갈수록 안타까운 공감이 더해갔다. 그의 생각들이 종종 나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섬뜩한 경험을 하면서.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핑계로, 혹은 신중함 따위의 온갖 그럴듯한 이유들을 대면서, 사실은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 치뤄야 하는 가혹한 댓가를 회피하고 실패의 가능성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길 용기가 없는 비겁하고 패배주의적인 마음을 감춘 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 자체에 골몰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과연 미샤는 마침내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찾게 될까?  미샤에 대한 빅토르의 작은 희망은 빅토르 스스로의 구원을 향한 단초가 되어줄 수 있을까? 벼랑 끝에 서게 될때까지 결코 돌아보기를 거부하고 버티던 그가 본질에서부터 변화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견고한 시스템이 강제하는 생활양식에 익숙해진 채 어쩌면 빅토르 보다 더욱 위태롭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우리 자신은...


다행히 후속작으로  『펭귄의 실종』(2008)이 나와 있다. 일단 다음 책에 기대를 가져본다.

 

2012. 0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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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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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장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는 뿌듯하고 감격적인 순간을 맞아, 그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혹은 이미 많은 부분을 잊어버린 복잡한 이야기들을 더 망각하기 전에 이번 독서가 내게 남긴 것을 기록해 본다. 살만 루슈디가 언어와 피클을 이용하여 내 기억을 영원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 명성을 말로만 듣던 한밤의 아이들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는 솔직히 이 책의 주된 특징인 마술적 사실주의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긴장감보다는 서술 내용과 방식의 독특함 때문에 낯설고 신기한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천일야화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사소하고 비현실적인 에피소드들의 연속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 책만 펼쳐 들면 펼쳐지는 아련한 환상의 세계가 꿈으로, 그러니까 잠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나날들(근 일주일! 왠만한 소설들은 길어도 이삼일이면 끝내곤 한 것에 비하면 저조하기 짝이 없는 속도다…. L)을 보내었지만 감히 내던져버릴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부커상을 세 번이나 수상하고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열렬한 칭송을 받은 권위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 탓만은 결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주인공 살림 시나이를 비롯한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 개성이 풍부하고 매력적이고, 그를 둘러싼 가족사 이야기도 무척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며, 주인공의 일생을 통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지적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독립, 연이은 파키스탄의 독립, 인도와 중국,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 동파키스탄을 도운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 공산주의 운동, 인디라 간디와 아들 산자이 간디가 이끌었던 국민전선의 독주와 부패, 그리고 비상사태 선포, 그 기간에 일어난 지식인 탄압, 강제 도시미화사업과 강제 불임시술이 모든 분열과 배반과 저항의 역사가 어쩌면 우리 역사와 이토록 오버랩 되는지! 대체 누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 어찌하여 역사는 이토록 시간적, 공간적으로 반복되게 되어 있는 것인지슬프고 아프게 읽어나가면서 마치 나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의 맨 얼굴을 엿본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강점은 슬픔과 아픔이 유쾌한 방식으로 전달되는 데 있다. 코찔찔이, 얼룩상판, 중대가리, 코훌쩍이, 붓다, 달덩어리, 오이코라는 다양한 별명을 가진 주인공 살림 시나이가 바라보고 이해한 세계가 환상적이고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속한 세계 자체가 눈물겹다 못해 코미디처럼 웃기고 아이러니한 부조리에 가득 찬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접한 역사라는 단어는 언제나 비장함이라는 감성만이 허용된 대상이었다. 그러나 너무 말이 안 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일단 하고 웃는 수밖에 없는 노릇인 것처럼, 사실상 수많은 제3세계의 역사가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들이야말로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웃기는 짜장면 같은 코미디의 연속 아니었던가. 그런 슬픈 코미디를 동시대인들과 후대인들에게 상세하게 들려줌으로써 역사를 잊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역사의 의미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이 책은 그런 문학의 역할을 백이십 프로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인도의 역사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이 책에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숨어있다. 따라서 인도의 역사적 지식에 해박한 고급독자(?)들이라면 아마도 이 책을 나보다도 몇 배는 더 즐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살림의 운명 자체가 인도 민중 전체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면, 살림이 사랑했던 누이 놋쇠 잔나비의 어린시절의 반항적인 태도와 어른이 된 뒤에 종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은 인도 내의 서자같았던 이슬람 집단이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어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살림의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일 역시 종교와 분리된 세속적인 국가 수립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싶다. 다른 많은 등장 인물들의 특징 역시 이런 식으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리라 추즉하지만 지식의 짧음만 아쉬워하면서 훗날의 재독을 기약해 본다.

 

2013.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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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읽은 우엘벡의 문제작 『소립자』의 충격이 재 가시기도 전에 곧바로 그의 가장 최근작이자 콩쿠르상 수상작인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서구 사회의 성적 자유주의에 숨겨져 있는 일그러진 단면을 마치 역겹고 폭력적인 스너프 필름을 틀듯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역으로 전통적 가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던 작가가 성 이외에 인간 사회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는 어떤 시선을 던질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작에서 작가는 공상적 사회주의 모델이건 히피족들의 생태주의적 공동체건 유전학을 동원한 인간 개조든 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논쟁적 관점들을 곧바로 자신의 소설 속으로 끌어들였었다. 그러나 사유가 치밀하고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 보다는 여러 관점들을 다소 피상적으로 나열해 놓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진전될지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이번 작품은 독자로서 작가의 사유의 핵심에 보다 명료하게 다가갈 수 있어서 한결 편안했지만, 사유가 더욱 깊이 있어졌다거나 설득력이 높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작이 도발적이라면 이 작품은 자신은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마치 유럽의 보수주의 안내서 같다. 그러나 진보주의를 자처하거나 추구한다면 우엘벡의 도전을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작가 우엘벡의 우려처럼, 인류 역사상 유래 없이 발달한 현대 서유럽 문명사회의 풍경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안락해졌으며 개인의 자유도 확장되었지만, 가족이란 테두리를 벗어난 개개인은 점점 더 고립되고 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이젠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노스텔지어(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라는 말이 유독 내 눈길을 끈다. 등장 인물들간의 대화(우엘벨, 제드)에 의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탓이다. 어쩌면 이 단어가 이 책 전반에 깔려 있는 기본 정서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변화된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바람직한 미래를 상상할 때 과거에서 좋았던 부분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다만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최대한 냉정하게 평가하는지 여부가 관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평가해 본다면, 우엘벡의 관점은 다소 ()편향적이다. 누구도 불행한 현실과 반대되는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감성 앞에서 냉철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가족주의의 일그러진 측면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을 무시한다는 건 지나치게 공정함을 잃은 처사가 아닐까?

 

공정하지 않은 건 그 뿐이 아니다. 전작에서 작가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라는 피해의식에 젖어 어머니를 갈갈이 찢는 방식으로 복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희안하게도 이 작품에서 주인공 제드와의 관계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런 분노와 복수심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제드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제스추어와 따듯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자신을 버린 건 어머니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버지에게는 자식에게 무심할 권리가 그냥 주어지는 건가? 아내가 자살한 이유도 모르고 아들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던 아버지가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상업적 건축가로 성공하는데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 제드는 그토록 연민을 가질 수 있었던 반면, <소립자>의 브뤼노는 어째서 그토록 어머니를 증오하고 경멸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추측컨데, 이 소설에서 건축가로 나오는 아버지는 주인공이자 예술가인 제드, 작가 우엘벡(이 책의 작가와 이름도 직업도 같다), 그리고 베테랑 형사 자슬렝과 더불어 작가의 분신으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독하게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정확히 제드 자신의 현재와 아주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다. 자신의 일에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따듯한 사랑과 헌신이 전적으로 결핍된 공허한 삶.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제드의 연인 올가는 제드를 홀로 남겨두고 러시아로 떠나버린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아내가 젊은 날에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아들 제드는 유일하게 사랑이라 확신했던 상대를 붙잡지도, 찾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관계에 대한 무기력과 무능으로 점철된 삶. 이것은 우엘벡과 자슬렝에게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저자는 이 모든 불능의 원인에 이기적이고 냉정한 어머니가 있다고 믿는 걸까? 현대 심리학에 따른다면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페미니즘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어머니 역할의 책임과 의무를 벗어 던지는 게 대안이 될 수 없다면 결국 남자와 여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이라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는(희생을 감수하는) 가족제도 속으로 안착하는 것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정녕 가족제도는 인간 사회의 필요악(?)과도 같은 것인가...?    

 

이 외에도 우엘벡은 제드가 세 인물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산업사회와 생태주의, 자유와 책임, 죄와 처벌, 인간과 자연, 안락사, 예술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섹스와 돈에 대한 자신의 보수적인 견해를 조금도 우회하는 법 없이 드러낸다. 요컨대 그는 양육의 책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자유지상주의의 허구성 외에도,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생태주의(자연으로 돌아가자!)의 유행에 대한 지겨움, 범죄에 대한 처벌의 온당함,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명백한 우위에 대한 주장을 펼치며, 안락사 논쟁 아래에 가려져 있는 고통과 죽음의 상업화와, 투기 시장이 되어버린 예술계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물론 이 모든 타락의 뒤에는 섹스와 돈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고 지적한다.

 

손만 뻗으면 손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성욕과 소비욕구의 노예가 되어 마비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은 무려 80여 년 전의 한 예언가가 풍자적으로 그렸던 유토피아와 정확히 일치한다.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말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는 개인들의 삶, 격정적인 사랑도 없고 따라서 미움도 고통도 없는 삶, 만인은 만인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이므로 누구와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섹스할 수 있고,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만족하도록 길들여져서 누구도 불만을 갖거나 투쟁의지를 갖지 않으므로 좌절도 절망도 없으며, 우울하거나 불쾌한 느낌이 들 때는 소마라는 일종의 마약을 자유롭게 복용하도록 권장해서 모두가 살아가는 내내 평화롭고 유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완전무결하게 행복하고 안정된 삶….

 

헉슬리가 묘사한 미래사회가 거의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 서유럽사회가 우엘벡에게 우울한 디스토피아로 그려진다는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데 결과물과 철저하게 분리되거나 의미가 결여된 노동을 하며 돈을 벌고, 프리섹스와 쇼핑이라는 소마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 가운데 의미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예술가들과 지성인들 뿐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개인주의적 전체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의 뒷부분에 살짝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장인정신을 추구하는 수공업과 일부일처제적 가족 중심의 전통 사회를 복원하여 이를 현대적 과학기술의 발달과 접목시키는 수밖에 없는걸까...? 확실한 건 우리에게 더욱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미래과학소설도 좀 많이 읽어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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