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읽은 우엘벡의 문제작 『소립자』의 충격이 재 가시기도 전에 곧바로 그의 가장 최근작이자 콩쿠르상 수상작인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서구 사회의 성적 자유주의에 숨겨져 있는 일그러진 단면을 마치 역겹고 폭력적인 스너프 필름을 틀듯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역으로 전통적 가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던 작가가 성 이외에 인간 사회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는 어떤 시선을 던질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작에서 작가는 공상적 사회주의 모델이건 히피족들의 생태주의적 공동체건 유전학을 동원한 인간 개조든 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논쟁적 관점들을 곧바로 자신의 소설 속으로 끌어들였었다. 그러나 사유가 치밀하고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 보다는 여러 관점들을 다소 피상적으로 나열해 놓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진전될지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이번 작품은 독자로서 작가의 사유의 핵심에 보다 명료하게 다가갈 수 있어서 한결 편안했지만, 사유가 더욱 깊이 있어졌다거나 설득력이 높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작이 도발적이라면 이 작품은 자신은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마치 유럽의 보수주의 안내서 같다. 그러나 진보주의를 자처하거나 추구한다면 우엘벡의 도전을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작가 우엘벡의 우려처럼, 인류 역사상 유래 없이 발달한 현대 서유럽 문명사회의 풍경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안락해졌으며 개인의 자유도 확장되었지만, 가족이란 테두리를 벗어난 개개인은 점점 더 고립되고 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이젠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노스텔지어(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라는 말이 유독 내 눈길을 끈다. 등장 인물들간의 대화(우엘벨, 제드)에 의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탓이다. 어쩌면 이 단어가 이 책 전반에 깔려 있는 기본 정서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변화된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바람직한 미래를 상상할 때 과거에서 좋았던 부분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다만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최대한 냉정하게 평가하는지 여부가 관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평가해 본다면, 우엘벡의 관점은 다소 ()편향적이다. 누구도 불행한 현실과 반대되는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감성 앞에서 냉철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가족주의의 일그러진 측면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개인들을 무시한다는 건 지나치게 공정함을 잃은 처사가 아닐까?

 

공정하지 않은 건 그 뿐이 아니다. 전작에서 작가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라는 피해의식에 젖어 어머니를 갈갈이 찢는 방식으로 복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희안하게도 이 작품에서 주인공 제드와의 관계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런 분노와 복수심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제드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제스추어와 따듯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자신을 버린 건 어머니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버지에게는 자식에게 무심할 권리가 그냥 주어지는 건가? 아내가 자살한 이유도 모르고 아들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던 아버지가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고 상업적 건축가로 성공하는데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 제드는 그토록 연민을 가질 수 있었던 반면, <소립자>의 브뤼노는 어째서 그토록 어머니를 증오하고 경멸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추측컨데, 이 소설에서 건축가로 나오는 아버지는 주인공이자 예술가인 제드, 작가 우엘벡(이 책의 작가와 이름도 직업도 같다), 그리고 베테랑 형사 자슬렝과 더불어 작가의 분신으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독하게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정확히 제드 자신의 현재와 아주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다. 자신의 일에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따듯한 사랑과 헌신이 전적으로 결핍된 공허한 삶.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제드의 연인 올가는 제드를 홀로 남겨두고 러시아로 떠나버린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아내가 젊은 날에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아들 제드는 유일하게 사랑이라 확신했던 상대를 붙잡지도, 찾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관계에 대한 무기력과 무능으로 점철된 삶. 이것은 우엘벡과 자슬렝에게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저자는 이 모든 불능의 원인에 이기적이고 냉정한 어머니가 있다고 믿는 걸까? 현대 심리학에 따른다면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페미니즘은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어머니 역할의 책임과 의무를 벗어 던지는 게 대안이 될 수 없다면 결국 남자와 여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이라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는(희생을 감수하는) 가족제도 속으로 안착하는 것 이외의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정녕 가족제도는 인간 사회의 필요악(?)과도 같은 것인가...?    

 

이 외에도 우엘벡은 제드가 세 인물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산업사회와 생태주의, 자유와 책임, 죄와 처벌, 인간과 자연, 안락사, 예술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섹스와 돈에 대한 자신의 보수적인 견해를 조금도 우회하는 법 없이 드러낸다. 요컨대 그는 양육의 책임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자유지상주의의 허구성 외에도,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생태주의(자연으로 돌아가자!)의 유행에 대한 지겨움, 범죄에 대한 처벌의 온당함,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명백한 우위에 대한 주장을 펼치며, 안락사 논쟁 아래에 가려져 있는 고통과 죽음의 상업화와, 투기 시장이 되어버린 예술계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물론 이 모든 타락의 뒤에는 섹스와 돈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고 지적한다.

 

손만 뻗으면 손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성욕과 소비욕구의 노예가 되어 마비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은 무려 80여 년 전의 한 예언가가 풍자적으로 그렸던 유토피아와 정확히 일치한다.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말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는 개인들의 삶, 격정적인 사랑도 없고 따라서 미움도 고통도 없는 삶, 만인은 만인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이므로 누구와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섹스할 수 있고,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만족하도록 길들여져서 누구도 불만을 갖거나 투쟁의지를 갖지 않으므로 좌절도 절망도 없으며, 우울하거나 불쾌한 느낌이 들 때는 소마라는 일종의 마약을 자유롭게 복용하도록 권장해서 모두가 살아가는 내내 평화롭고 유쾌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완전무결하게 행복하고 안정된 삶….

 

헉슬리가 묘사한 미래사회가 거의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 서유럽사회가 우엘벡에게 우울한 디스토피아로 그려진다는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런데 결과물과 철저하게 분리되거나 의미가 결여된 노동을 하며 돈을 벌고, 프리섹스와 쇼핑이라는 소마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 가운데 의미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예술가들과 지성인들 뿐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개인주의적 전체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의 뒷부분에 살짝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장인정신을 추구하는 수공업과 일부일처제적 가족 중심의 전통 사회를 복원하여 이를 현대적 과학기술의 발달과 접목시키는 수밖에 없는걸까...? 확실한 건 우리에게 더욱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미래과학소설도 좀 많이 읽어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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