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이 겨울의 송곳니를 하루하루 시(詩)에 기대어 견디고 있다. 시 삼천 편이면 견딜 수 있을까? 시의 감옥에 드는 사치를 과연 삶이 내게 베풀어줄까? 삶은 비루하고 시는 슬프고 참으로 거룩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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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2-24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 듣는 시인의 시인데 한번 읽고 넘어가게 되지 않는군요.
반딧불이님, 한고비 또 넘는 일, 너무 힘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반딧불이 2012-02-25 00:0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나인님. 저도 한번 읽고 넘어가지지 않았어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어도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이 있지요. 좋은 시를 쓰지만 알려지지 않은 시인도 많구요.

쉽싸리 2012-02-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만 하더라도 훈훈하더군요. 날이 차차 따뜻해져 가는것 같아요. 봄이 오긴 오는가 봄니다.

맨 마지막 연의 절연은 絶緣인가요?
병산서원이 가까운데에 있는데 한번 가보질 못하네요...

반딧불이 2012-02-25 00:07   좋아요 0 | URL
제게도 곧 봄이 와야할텐데 말이에요.

한자로 나와 있지 않았지만 의미상 맞는것 같지요?

알케 2012-02-25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메..시구 하나하나가ㄷㄷㄷ. 기억해둘 시인이군요.

반딧불이 2012-02-25 00:11   좋아요 0 | URL
헉..실시간이군요. 알케님.

소개한 저도 기억해주세요~


알케 2012-02-2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들락거리는데 인사가 늦었네요. 반딧불님ㅎ

반딧불이 2012-02-25 00:45   좋아요 0 | URL
네. 알케님. 늦은 인사가 더 반갑지요. ^.~ 저역시 마찬가지인걸요.뭐.

감은빛 2012-02-2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 맨 아래 반딧불이님의 네 문장이 더 인상적인데요.
특히 맨 마지막 문장에 무척 공감합니다!

반딧불이 2012-02-26 12: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감은빛님 그런데 이런 문장은 공감하지 않는 편이 나을듯 싶은걸요.

blanca 2012-02-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란 이런 것이군요. 저도 마음이 참 스산한데 반딧불이님의 이러한 페이퍼가 공감도 되고 위로도 됩니다.

반딧불이 2012-02-26 12:18   좋아요 0 | URL
스산하다는 단어와는 친해지지 마셔요. 그런것들은 가는 겨울에게 던져 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