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이 겨울의 송곳니를 하루하루 시(詩)에 기대어 견디고 있다. 시 삼천 편이면 견딜 수 있을까? 시의 감옥에 드는 사치를 과연 삶이 내게 베풀어줄까? 삶은 비루하고 시는 슬프고 참으로 거룩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