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원전을 번역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감히 집어들었다. 생소한 어휘들이 난무하는 책을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한참을 읽었다. 그런데 도무지 이런식의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언제 어느 나라의 이야기인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뤼디아나 아이귑토스가 대체 어느나라를 말하는지, 크로이소스니 퀴로스, 캄뷔세스 등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구글, 어스, 위키피디아를 검색하고, 스텔라노바 지구본, 지도책 등을 뒤지면서 책을 읽자니 진도도 안나가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무엇보다도 오른쪽 엄지 손가락의 고생이 말이 아니어서 뒷목이 땡기는 것이 곧 마비증세가 올 조짐을 보인다. 집안꼴도 당연히 말이 아니다. 공부하는데서는 잔꾀를 부리지 않기로, 그저 무식한 방법이 최고라고 믿었지만 꼭 필요한 책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동네 도서관에 가서 이것 저것을 뒤졌다. 개괄식 서가를 숨바꼭질하듯 돌아다니면서 한아름 책을 뽑아와 살피고 도움이 될만한 것을 찾아냈다. 우선 개괄서로는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가 내 수준에 딱 맞았다.
이 책은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근무하던 지은이가 역사를 암기과목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위해 이해하기 쉽고 상상력과 비판력을 키우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목차를 보니 꼭 나를 위해 쓴 책 같았다.
나는 이 책에서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기술이고 이 전쟁에는 테르모필레 전투,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의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영화 <300>과 마라톤 전투의 유래 등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서양사뿐만 아니라 동양의 <사기>에 관한 글도 신뢰할만 했다. 영화 <300>은 직장동료들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해서 본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거의 다 벗은 멋진 남자들이 300명이나 나온다는 유혹에 못이기는 척 따라갔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나는 머리는 없고 힘만 센놈은 질색이야'라고 무식을 감추지 않았던 영화였다. 300명의 스파르타 군이 페르시아 군을 맞아 단 두 명만을 남기고 모두 죽었지만 승리했다고 하는데 중장보병이 어떻게 기병과 궁병으로 무장한 페르시아군을 무찌를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없다. 그래서 찾아든 것이 <전쟁의 역사>였다.
이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전쟁에 관해 기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 아테네의 중장보병이 무장한 페르시안아군을 어떻게 물리 칠 수 있었는지, 당시에 사용하던 방패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테네 군이 펼친 작전이랄 것도 없는 작전은 어떤 것이었는지, 지형은 어땠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불구경과 싸움구경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실감했다. 교보문고에서 50%할인할 때 냉큼 사두었던 것을 요긴하게 쓰고 있다.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의 원제는 Technology in World History 이다. 우리말 제목만 보면 품격이 확 떨어지지만 시원시원한 도판과 연표, 지도 등 볼거리도 많고 내용도 충실한 책이다. 이책은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진행되는 <강유원의 역사 고전강의>에서 소개받은 책이다. 강좌는 5분안에 모두 마감되어버려 나처럼 손이 게으른 사람은 언제나 놓치기 일쑤다. 트위터에 올라온 강의를 다운받아 듣고 있다. 강의를 듣다보면 도대체 이 사람의 지식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에 산 책중에 가장 크고 맘에 드는 책은 <지도로 보는 타임스 세계 역사>다. 동네에 커다란 서점이 있는데 이 서점에서는 중고책도 함께 판매한다. 재고도서도 많다. 이 책의 정가는 120000원인데 나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책을 거의 주워오다시피 했다. 자그마한 스텔라노바 지구본만 돌리다 이 책을 들여다보니 속이 여간 시원한 것이 아니다. 특히 페르시아제국이 어떻게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지, 전국토의 96%가 사막이고 나머지 4%중의 불과 2.6%만 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집트의 나일강 등을 한눈에 보고나니 방석처럼 크고 벽돌처럼 무거운 이 책이 제 값 이상을 하는 것 같아 흐뭇하다.
이것으로 헤로도토스를 읽는데 필요한 책은 대강 준비가 된 셈이다. 이제 읽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몇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칸타울레스니 귀게스니 하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들이 나온다. 자기 아내를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착각했던 칸타울레스가 자신의 경호원 귀게스에게 아내의 알몸을 몰래 보여준다. 이것을 눈치챈 아내는 귀게스를 불러 네가 죽든지, 왕을 죽이고 왕이되던지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당연히 귀게스는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다. 그의 책 <새엄마 찬양>의 두번째 이야기는 바로 이 리디아의 왕 칸타울레스의 이야기가 손가락이 오그라들만큼 야하고 실감나게 그려져있다. 그의 또 다른 책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의 판탈레온도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인물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상상력의 보고라 할만 하다. 이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삼천포로 빠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