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

詩/김민서


해사한 소국들의
얼굴 위로 햇살이
투스탭으로 건너가더니
금천교 너머 조선의
땅에 비 내립니다

인정전 빈 뜰에서
시간의 주름은
쥘부채처럼 펼쳐지고
화계 위 굴뚝에 갇힌 꽃사슴의 눈길
만질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당신의 체온처럼 따사롭습니다

몇 백 년 전이던가요
고단한 시간의 다리 위에서 그대가
젖은 지우산 아래 곁을 내주던 것이
당신의 궁에는 여전히 비 내리고 나는
우산도 없이 내의원 담장을 끌며
부용지에 이르렀습니다

인적이 드문 궁 뜰 너머 서울의 하늘은
먼 나라 하늘처럼 푸르고
나는 부용정 그늘에 젖어 하릴없이
담장을 넘는 호랑나비 한 마리를 봅니다
나비는 언제나 바람을 몰고 와서
바람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나비의 오는 곳과
가는 곳을 나는 모릅니다

나비와도 같고
바람과도 같은 당신
온몸으로 출렁이는 그대의 바람 속에 서서
나는 뜨거워진 체온을 식히며
한때 나의 꿈이었던 그대와
나의 불가해한 인연을
마음껏 서러워하겠습니다  

 

어제 저녁 거리에서 돌풍과 천둥번개를 만났다. 예술의 전당 근처에서였다.  갑자기 하늘이 검은 보자기를 펼쳐놓은듯 캄캄해지더니 자동차 지붕을 뚫을듯이 비가 쏟아졌다. 차를 멈추고 한참 거리를 내다봤다. 소나기 채찍을 맞은 단풍잎들은  바람에 등 떠밀려 알지 못할 곳으로 마구 흩어졌다.  겨울은 저렇게 급하게 잎을 보내야할 이유가 있는 걸까? 기다리지 않아도 와야할 것은 오고 보내지 않아도 가야할 것은 다 간다. 남겨진 자는 '마음껏 서러워'하는 노래를 부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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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11-12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블로그에서 '파란여우'님을 보내드렸는데, '반딧불이'님도 송가를 불러 주시네요. 어쩌면 '파란여우'님에 대한 노래인지도 모르겠어요.
근래 영영 이별을 자꾸 하며 저도 송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 신부님이 수단의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줬더군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눈물이 울컥 나는 노래였습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송가를 들려주서셔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11-12 19:26   좋아요 0 | URL
겸사겸사 '송가'가 생각났습니다. '파란여우'님은 더 넓은 곳에서 새로운 둥지를 트시겠지요. 아쉬움과 미련이 교차하는 날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11-1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낮엔 또 봄날 같더라구요.

그래도 아직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은 고운 잎이 남아 있으니까요.
문장의 배치를 살짝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서러워 마음껏 부르는 노래로요~^^

반딧불이 2010-11-12 23:23   좋아요 0 | URL
겁이나서 저는 아직 현관문도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페이퍼 제목을 말씀이신가요?

blanca 2010-11-12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주름은 쥘부채처럼 펼쳐지고...
나의 불가해한 인연을 마음껏 서러워하겠습니다.

이런 좋은 시를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옮겨 적어 놓을게요. 눈물나는 송가입니다.....

반딧불이 2010-11-12 23:25   좋아요 0 | URL
시인의 마음이 블랑카님께 전이가 된 모양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비로그인 2010-11-1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을 그냥 보내드리기가 못내 아쉬웠는데 반딧불이님의 '송가'가 제 아쉬움을 대신 달래주네요. 전 그저 댓글 할 줄 얹겠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요...

반딧불이 2010-11-12 23:27   좋아요 0 | URL
제가 영광입죠. 얼마든지 언제까지나 환영합니다.

cyrus 2010-11-14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서재글 경향은 시군요. 방금 나무꾼님의 서재에서 정호승 시인의 시랑
플러스 나무꾼님이 쓰신 시를 감상했는데,,^^ 저도 이제 시집을 읽어봐야겠네요. 올해 읽은 시집이라면 보들레르의 <악의 꽃> 밖에 없네요. 암울하고 음침한 시로 악명높죠. -_-;;

반딧불이 2010-11-14 01:33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1학년때 겉멋들어 처음 읽었던 시죠. 오늘도 서너권 시집을 봤지만 보들레르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시 읽어봐야할텐데 그 때가 언제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