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마지막 단편인 표제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중에서...

‘매기‘라는 이름의 인공지능과 하나가 된 새로운 인류로의 진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인류는 이미 매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며 2천 년간 전파신호의 유령으로 살았고, 매기의 
예측대로라면 앞으로 지구가 생존 가능한 상태로 정화되고 안정되는 1만9천 년 동안 이 낯선 문명을 더 지속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로 인류가 영구히 지속 가능한 생체 인공지능을 얻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는
그 일부가 될 겁니다. - P299

그때까지 인류는 현실의 자연법칙들과 인간의 범주를 심각한변형 없이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과연 그 보존이의미가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진짜 세계의 원형에서 한참 멀어진, 훼손되고 변질되어 원본을 짐작할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현실의 실감을 기억하는 자로서, 진짜 세계는 매기가 주는 그 어떤 영화의 감각과도 확연히 다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P299

개는 천만 번쯤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늘 개를 환대했던 두 팔을 내뻗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죠. 어쩌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것도 같습니다. 개는 달려오던 힘과 속도 그대로 저를 관통해 지나갔습니다. 저는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었지만 심장이 꿰뚫린 것처럼 놀랐습니다. 돌아보자 깜빡이며 윤곽이 흔들리고 있는 까만 개 역시 멈춰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류가 일어난 겁니다. 거의 현실처럼 보였던매기가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 P327

우리는 이미 매기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잘 체감하지 못하지요.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완벽에 틈새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을 알게 된 겁니다.
무수한 반복으로 오류가 끼어들 확률을 올리는 것. 매기가 확률로 세계를 유도하듯, 우리도 확률로 매기를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견고하고 단단한 확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우연의 순간. 그 특별한 우연을 만드는 것은 방대한 반복이었습니다. 혜경. 오래전 개가 사라지는 장면을 만들었던 당신은 대체 어떤 영감에 이끌렸던 겁니까? - P327

"존엄한 인류의 일부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이야?"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서 발화했습니다. 정확한
문장으로 물음으로써 스스로의 질문을 선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존엄한 인류는 요람 안의 인류와 요람 밖의 인류가분리되어 발전한 후 다시 결합한 상태로 예측됩니다. 존엄한 인류가 영원히 존속하기 위해선 이 분리와 결합의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요람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당신은 나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나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조건은?"
- 세계를 의심하고 세계를 부순 자. - P329

혜경. 이미 우리보다 앞선 세대에 요람을 나간 자들이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십니까? 어느 날 갑자기 생을마감한 위대한 디렉터, 영화의 범람 자체를 열렬히 사랑했던 어느 뷰어,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은둔형 외톨이들 중에 혁명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기를 떠나 진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어쩌면 이미 작은부락, 혹은 원시 도시의 형태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매기가 지구의 회복 기간을 거짓으로 공개한 이유는최고 명령인 인류의 존엄한 존속에 필요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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