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1970년 학생들의 요구로 ‘여성과 법‘ 과목을 개설한 그는 여성이 토지와 같은 재산으로 취급되던 판례집을 보면서 말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여겼다. 그래서 곧장 다른 여성 교수들과 힘을 모아 부당한 급여 체계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간 끝에 승소했다 - P56
그는 자신의 싸움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70년 미국 최초의 여성 인권법 전문 저널인 《여성 인권법리포터>를 창간한 그는 제자와 동료 변호사 들의 연구와 도움에 힘입어 젠더 차별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197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에서 종신재직권을 받은 첫 여성 교수가 된 그는 같은 해 미국시민자유연맹 여성권익증진단을 창립했다. 1970 년대초부터는 변호사로서 중요한 젠더 차별 사건 대부분을 맡게 된다. 페미니즘 제2물결을 일으킨 페미니스트들과 교유했고, 흑인여성 변호사이자 여성 시민권 운동가인 폴리 머리 등 자신에게영감을 불어넣어준 여성들을 긴즈버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소수 의견을 제출할 때도 그는 다른 여성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훗날 자신은 먼저 길을 간여성들의 뒤를 따랐던 것이며 마침내 세상이 자기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 P56
긴즈버그는 직장 내 괴롭힘,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가족 및의료휴가법, 정부가 선거철 기업의 지출을 얼마나 규제할 것인가를 두고 다툰 사건 등에서 진보적이고도 강력한 소수 의견을냈다. 2015년 4월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동성결혼 허용 결정심의에서 결혼이란 수천 년의 유구한 전통이므로 동성 간 결합 - P57
을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긴즈버그는 "결혼제도는 변했고 동성 결합은 지난날의 협소한 결혼 개념을 뛰어넘는 형태"라고 반박했고 승리했다. - P58
그는 종종 욕심 많은 여성 판사로 여겨지곤 했다. 그에게 사람들이 "미국 연방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 있어야 충분하다고 보십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긴즈버그는 "아홉 명입니다"라고 답했다. "오랫동안 대법관 아홉 명이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여성 대법관이 아홉 명이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 P58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가장 유명한 그의 명언 중 하나다. 긴즈버그는 판사가 플라톤처럼 판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다고 여겼다. 스스로가 중립적이라는 착각과 오만을내려놓고, 자신조차 의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P58
그가 물러나지 않는 것에 ‘노욕‘이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보수적 대법관의 최고 어른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20년 9월 18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앞둔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
긴즈버그의 후임 대법관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성향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여성의 임신중단을 강력하게 반대해온 후임자는 판사 시절 관련 판결에서 모두 낙태를 제한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1993년 대법관 인준청문회에서 긴즈버그가 임신중단권의 현실적인 필요성을 밝히며 "정부가 여성의 자율적 결정을 통제한다면, 여성은 자기 선택을 책임지는 온전한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 것과 대비된다." ‘악명 높은‘ 긴즈버그의 빈자리가 과연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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