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6
토마스 만 지음, 김인순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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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는 여러면에서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했거나 내면의 갈등, 작가로서의 고뇌와 매 순간 선택해야만 하는 대립된 요소들을 마치 옷감을 짜듯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들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독일 뤼베크의 유서 깊고 부유한 사업가 집안 출신 아버지는 유능하고 근면, 건실한 성품을 지녔고, 어머니는 브라질계 출신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적인 분이었다. 이렇게 상반된 기질의 부모님에게서 성실한 시민정신(아버지)과 예술적인 감성(어머니)을 물려받은 토마스 만은 두 작품의 주인공인 아셴바흐(베네치아에서의 죽음)와 토니오 크뢰거에게 그대로 적용하며, 작품 속에서 중요한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두 작품의 주인공들의 이러한 성향의 최종 도착점은 같지 않아서 더 매력이 있다.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것에 나도 찬성일세.




   아셴바흐는 "50세 생일 이래 공식적으로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라 불리는"  즉 귀족의 칭호를 얻은 명성 높은 산문 작가이자 시인, 소설가, 논문 작자이다. 슐레지엔 지방의 군청 소재지에서 고위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상 대대로 법관, 장교, 행정관료로서 왕과 국가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어머니는 보헤미아 지방의 악단 지휘자의 딸인데 성급하고 감각적이며 열정적인 기질을 지녔다. 성실하고 냉철하며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그의 성향은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자신을 포장하고 관리하여 명성을 얻는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만든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을 꽃 피우고 최고의 예술가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극도로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인내하고 업적을 쌓고 다시 인내하면서 명성을 위해 나아가는 삶이었으며, 극도로 정신적인 소모를 필요로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품위를 잃지 않아야만 하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의 평생동안 즐거움이라곤 누려보지 못하였고 학자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하여 딸을 낳고 잠시 행복하였으나 지금은 아내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딸을 결혼하여 홀로 살고 있는, 초로의 작가인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는 계기로 여행 욕구에 사로 잡힌 아셴바흐는 잔신의 인생에서 조금은 즐거움과 행복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남쪽의 베네치아를 최종 기착지로 하는 여행을 떠난다. 베네치아 리도섬의 호텔, 그곳에서 열네 살 가량의 그리스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소년 타지우를 보게 된다. 그의 삶에 찾아온 최상의 예술적 아름다움!


  "아셴바흐는 완벽하게 잘생긴 소년의 모습에 감탄했다. 우아하게 내성적이고 창백한 얼굴이 벌꿀빛의 머리카락에 에워싸여 있었다.  오뚝한 코, 사랑스러운 입, 기품 있으면서도 더없이 아름답고 진지한 표정은 가장 고귀한 시대의 그리스 조각상을 연상시켰다. 한 없이 순수하게 완벽한 모습은 유일무이하게 개성적인 매력을 발산해 자연에서도, 조각 예술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셩공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49)


  한 평생을 바쳐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위로 위로 명성을 쫓아온 아셴바흐에게 천생적으로 완벽한 타지우의 모습은 불가항력의 마력을 발휘하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아셴바흐는 곧 이 소년에게 한없이 빠져든다. 눈으로는 소년의 모습을 쫓고, 소년의 가족이 베네치아로 외출을 하면 그 뒤를 쫗아다니며 그의 모습을 단 한순간도 보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지경의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평생을 자신을 채찍질하며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예술적 성공만을 바란 이 초로의 작가는 자신의 안에 있는 정열을 어쩌지 못하고, 고통스런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혼자만의 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리도에 머무른 지 사 주째,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는 주변에서 몇 가지 심상치 않은 사실을 인지헸다. 첫째는 성수기인데도 호텔의 손님 수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어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독일어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더니 아예 자취를 감추고, 종내는 식사할 때나 해변에서 낯선 언어만이 귀에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셴바흐는 자주 찾아가는 이발사와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당혹스러운 말을 듣게 되었다. 이발사는 잠시 머물다가 방금 떠난 독일인 가족 이야기를 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아부하듯 덧붙였다. "손님은 여기 머무르시는 걸 보니 질병이 두렵지 않으신가보죠."  아쎈바흐는 이발사를 쳐다보았다. "질병이라니요?" 그러고는 되물었다. 수다를 떨던 이발사는 입을 다물고 일에 몰두하며 아셴바흐의 질문을 못 들은 체했다."(99)


  그렇다. 베네치아에 몰아닥친 전염병, 콜레라가 상선을 타고 시리아로부터 베네치아에 들어온 것이다. 당국은 그것을 감추고 있지만 이미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바로 베네치아를 떠날 수 있었지만 아셴바흐는 소년의 가족에게도 전하지 않았고, 자신도 결국 소년의 가까이에 남기로 결정한다.


  작가가 설정한 두 상반된 성격은 여기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일까. 냉철하고 근면 성실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던 아버지의 근성은 어디로 가고 열정에 휩싸인 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결함과도 같은 어머니의 성격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인가.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셴바흐의 인생은 그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미 다 이루지 않았는가. 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기쁨보다는 고통을 그리고 남은 육체를 모두 소진하는 여정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는 이미 그것이 너무 힘든 지경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단 한번 최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 황홀한 이 순간을 그만 단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아셴바흐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을 던져 획득한 황홀한 그 사랑에 함몰될지라도 다시 돌아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알았다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영사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회의 검은색 상호가 큼직하게 찍힌 곡물 자루들이 마차에 실려 거리를 지나는 걸 매일 볼 수 있"을 정도로 부잣집이다. "훤칠한 키에 눈빛이 푸르고 신중한 토니오의 아버지"와 "아버지가 예전에 지도상의 아주 아래 쪽에서 데려왔기 때문에 시내의 다른 여자들과는 젼혀 다르게 생긴"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어머니라는 설정은 상반된 두 부모님이라는 토마스 만의 배경을 투영한 자전적 성향을 지닌 주인공이다. 토니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고, 공책에 자신이 쓴 시를 감춰다니는데 이러한 예술을 지향하는 자세는 사실 아버지의 고향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반적이지 않은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니오는 예술성에 대립되는 일반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고 동경한다. 그가 한스 한젠과 잉게보르크 홀름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일반 시민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스는 선원들이 입는 짧은 재킷 차림이었는데, 세일러복 상의의 넓은 푸른색 옷깃이 어깨와 등의 재킷 위로 나와 있었다. 토니오는 허리띠가 달린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한스는 검은색의 짧은 띠가 달린 덴마트 선원 모자를 쓰고 있었고, 밝은 금발이 모자 아래로 빠져나왔다. 한스는 무척 잘생긴 데다가 체격이 근사했다.  어깨가 넓게 벌어졌고 허리는 늘씬했으며, 양미간이 넓고 강철색 눈은 예리한 빛을 발했다.  그런데 토니오의 둥그런 털모자 아래 얼굴은 갈색이었으며, 남쪽 나라 사람들처럼 윤곽이 아주 뚜렸했다. 눈꺼풀이 두툼하고 부드럽게 그늘진 검은 눈은 몽환적이면서도 소심해 보였다..... 입과 턱 모양이 유난히 부드러웠다."(145)  


 <토니오 크뢰거>에서는 토니오가 바라는 시민적인 삶의 모습은 금발과 푸른 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토니오에게는 미지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스 한젠, 잉게보르크 홀름과의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토니오는 어머니의 피가 이끄는 대로 남쪽의 나라들과 대도시를 방황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모색하였고, "끈질기게 버티며 명예를 추구하는 보기 드문 근면성이 자신의 경험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끝까지 파헤치는 기질"로서 등단을 이루어냈을 때 문단에서는 찬사와 환호를 보낸다. 그럼에도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과 꿈에 목마름을 느낀 채로 북쪽의 덴마크로 여행을 떠난다.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난 아셴바흐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아셴바흐는 어머니의 고향인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고 토니오는 남쪽 나라에서 북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하지 않는가.

  덴마크의 섬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토니오 앞에 불현듯 한스와 잉게보르크가 손을 잡고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토니오는 그 둘을 보고 다시 그가 한없이 고민의 나날의 보냈던 문제에 직면한다. 그 두 사람은 여전히 토니오가 추구하는 시민적인 삶의 모습이었으며 그 둘의 이름을 가만히 속삭여보면서 그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에게는 그 순수하고 북방적인 몇 마디 음절이 원래의 참된 사랑과 고뇌와 행복, 삶, 단순하고 내밀한 감정, 고향을 표현했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그동안 겪은 관능과 신경과 사유의 황량한 모험을 회상했다. 반어와 정신에 갉아 먹히고, 인식에 의해 황폐해져서 무감각해지고, 창작의 열기와 냉기로 반쯤 소진된 자신을 보았다.  대립되는 양극 사이에서, 신성과 욕정 사이에서 양심의 갈등에 시달리며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지고, 차갑게 인위적으로 조성된 과도한 흥분 상태로 인해 정교해지고 빈한해지고 녹초가 되어서 방황하고 삭막해지고 병들어 번민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회한과 향수에 젖어 흐느꼈다."(245)


  하지만 토니오는 결국 이런 시민적인 소소한 행복, 살아있는 것, 평범한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시민적인 삶을 결코 체험할 수 없지만 작가로서 지극히 시민적인 것, 평범한 것, 살아있는 것을 누구보다 절묘한 필치로 살려내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랑하기에 이르는 과정은 읽고 있는 나로 하여금 환희에 젖어 들게 만든다. 


  "하지만 나의 가장 절절하고 은밀한 사랑은 금발과 푸른 눈의 사람들, 활기에 넘치는 밝은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을 향합니다. 

리자베타, 나의 이 사랑을 나무라지 말아요. 이건 유익하고 풍요로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 속에는 갈망과 우울한 질투심, 약간의 경멸과 오롯이 순수한 환희가 담겨 있습니다."(249)


  이것이 토마스 만이 우리에게 들려 주고 싶은 자신의 세계관이 아닐까 싶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힌 갈망, 소박하고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 지성과 감성, 이성과 감각의 대립을 멋진 두 작품으로 승화한 토마스 만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경험할 수 있어서  짧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P.S. : 두 작품의 배치에 있어서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 작가의 삶, 초로의 작가의 삶이라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주는 두 작품이니 젊은 작가의 삶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아셴바흐의 삶과 죽음의 여정이 워낙 강렬해서 <토니오 크뢰거>는 기대하지 않고 읽은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읽고 나선 오히려 토니오 크뢰거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셴바흐의 아름답지만? 닫힌 결말, 토니오 크뢰거의 희망적인 열린 결말.... 어느 쪽으로 마음이 갈 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닐런지...  좋은 건 마지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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