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열심
박영선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본 서평을 작성하기가 조금은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진작에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과 “성령론”에 대해서 서평을 작성하면서, 박 목사님의 성화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본 책의 구도도 “성화”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박 목사님의 한국교회에 대한 분노와 애틋한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성경의 말씀을 오해한 부분도 없지 않아, 다시 이 부분을 지적하려고 하니 주저하게 되는군요. 마치 감정이 있는 사람처럼. 일단 이 서평의 취지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적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보겠습니다.


본 책은 1999년경에 초판이 나왔는데, 5년 동안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했던 내용을 모은 것입니다. 이 책은 총 4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설교를 위한 신학의 준비, 2부는 설교의 10가지 중심기둥, 3부는 설교자론, 4부는 설교촌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의 1장은 ‘계시의 인격성’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고, 박 목사님의 계시의 개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단 계시는 우리가 이해하여야 계시이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면 계시가 성립할 수가 없고, 이해하려면 이성에 호소하여야 한다고 박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전인적인 항복을 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하셔서 우리가 설복하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로 우리를 대하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한에서 ‘계시의 인격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계시가 인격(예수 그리스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의 의미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아무튼 박 목사님의 그 다음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는 원인이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나의 결단이나 열심이 구원의 원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원인이 없는 결과에 대해서 사고를 전개시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박 목사님은, 계시는 우리가 이해하여야 계시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이해할 수 없는 인과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 같은데...


1부의 2장은 ‘성화를 큰 앵글로 잡아라’인데, 즉 목사가 설교를 할 때 항상 신자의 성화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권면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을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하시다가, 끝에 가면 항상 성화되어야 된다고 하면서 마무리를 하십니다. 박 목사님은 ‘성화’에 목숨을 거는 것 같은데, 마치 이근호 목사님이 ‘언약’에 목숨을 걸듯이. 사실 책에서도 박 목사님은, ‘칭의’ 위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신은 ‘성화’ 위주로 설교를 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성화’ 위주의 설교를 하고, ‘칭의’ 위주의 설교를 하는 목사님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박 목사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1부의 3장은 ‘성경 보는 안목을 계발하라’인데, 안목을 키우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박 목사님은 주로 벤자민 워필드, 존 머레이,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덜보스, 헤르만 바빙크 등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 부분에서 ‘성화설교’를 언급하면서 삼손의 예를 장황하게 들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는데, 훈련(여자문제?)이 되지 않아서 망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받아 실패하더라도, 다시 훈련하여 기어이 이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삼손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하나님은 부족한 삼손을 통해서라도 자기 할 일을 하신다는 것이 핵심 아닙니까? 하나님은 삼손이 죽는 것에 개이치 않고, 아니 오히려 삼손이 망함(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을 죽이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삼손이 살아있을 때 죽인 대적보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대적이 더 많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짜 삼손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한 분은 이근호 목사님이라는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2부는 ‘설교의 10가지 중심 기동’인데, 중요한 것만 대략적으로 살피면서 넘어가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대등한 인격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항복시킨다고 합니다. 앞에서 박 목사님이 말씀하셨죠. 그리고 ‘죄’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경, 적개심이라고 합니다. 아주 좋은 말씀이죠?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죄다! 수긍이 가지 않는가요? 또한 죄는 형태가 아니라 경향이라고 합니다. 죄의 경향성! 그리고 목사가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구조화된 죄’와 결부되도록 이끌어야 된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아주 공감하는 부분인데, 저는 세상에서 죄가 구조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죄 아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박 목사님은 강해설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역시 박 목사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분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하고 섬세합니다. 이 본문을 로마서 4장 18절, 히브리서 11장 17절, 야고보서 2장 15절과 연결하면서,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네 후사가 이삭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 풍성한 뜻을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이삭을 번제로 바쳐도 어쨌든 이 약속이 끊어질 수 없기에 하나님의 다른 어떤 방법이 동원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p134)


야고보서 2장 21절 말씀엔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친 것은 결국은 말씀의 성취라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박 목사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입증이 되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말씀이 응하여져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역동성! 박 목사님하고는 의미가 틀리지요?


박 목사님은 ‘인격의 항복’이라는 단락에서, 자유의지를 설명하면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내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격은 내가 바뀌지 않는 한 바뀌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내가 거룩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거룩해져야지요. 그런데 내가 거룩해질 것이냐 말 것이냐는 나에게 일어난다는 차원에서 내 권리입니다. 나를 배제하고는 거룩이고 속되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몫과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p141)


이 대목에서 박 목사님의 ‘성화’개념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성화는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 되고 안되고는 ‘나’의 ‘자유’이고 ‘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성화는 자신이 평생을 두고 이루어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는 성화에서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아무리 박 목사님을 좋게 보더라도 이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성화라는 단어가 없고, 거룩이라고 하는데, 거룩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속죄가-레위 지파에 의해서-매번 드려짐으로써 그때마다 거룩이 주어졌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받은 것입니다.(히10;10) 거룩은 받는 것입니다.


4부는 ‘설교촌평’인데, 구약(12편)과 신약(32편)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게 촌평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문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읽어보니, 짧긴 짧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는데, 히브리서의 해석 문제는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박 목사님은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직분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야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레위 지파로 오시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냐하면, 레위 지파는 예수님의 하신 일 전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속죄의 사역도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므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이지요.(롬8;34)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이 이렇게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딴 데 있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구원에는 신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구원, 다시 말해서 속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얻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심으로써 이루어지게 해야 할 성화, 거룩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직도 제사장이십니다.”(p272)


한마디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인 이유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지금도 하늘에서 제사장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 반차를 좇는 예수님을 가지고 성화로 연결하는 것이 가히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사역은 제사장이 죽음으로 중단이 되고, 그래서 다른 제사장이 다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멜기세덱처럼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레위 계통으로 제사가 온전하였으면 예수님이 아론의 반차를 따라 오시지 별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실 필요가 있느냐고 성경은 말합니다.(히7:11)


예수님은 레위 지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는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자이고, 레위 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복빎을 받았다고 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큰 자가 낮은 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 지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율법으로 제사장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체와 연관된 계명의 법을 따르는 레위 지파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나셨다고 합니다.


3부는 ‘설교자론’인데, 이 부분에서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하라는 것이지요. 절박함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을 알고 제발 좀 신앙 좀 성숙해지라는 것이고, 설교자는 그러한 자세로 설교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박 목사님의 그동안 설교사역을 통하여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성화를 강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박 목사님의 노력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하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목사나 신자나 매한가지로 성경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 대한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이-물론 저의 모습이기도 하지만-분노가 치밀다가 못해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교계 분위기에서 박 목사님의 사역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고, 실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박 목사님의 성경해석에 문제점이 있으면 이것을 넘어서야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의 핵심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열심처럼, 설교자도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는 이렇게 책을 읽었습니다. (앗! 그런데 이 책이 품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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