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제가 오늘 영화평을 하려는 영화가 “쉰들러리스트”와 “너는 내운명” 등 2편이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영화들은 전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과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는 점, 그리고 내용 중 일부가 복음적으로 은혜롭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쉰들러리스트”는 1994년경(?) 개봉하였을 때 한 번 보고, 오늘 유선으로 한 번 더 보았고, “너는 내운명”은 작년에 개봉하였을 때 본 영화입니다.


먼저 “쉰들러리스트”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키거나 죽이는데, 독일군은 이 유대인들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고,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을 하고, 실제로 그런 법률도 통과를 시킵니다. 그곳의 소장인 괴트는 전쟁중 대략 1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합니다.(혼자 죽인 인원인지, 그 수용소 안의 독일군들이 죽인 인원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습니다.) 수용소 안이 내다보이는 자신의 높은 저택의 테라스에서 총으로 단지 앉아있던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유대인(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고 있음)들을 사냥하듯이, 아니면 사격연습 하듯이 죽입니다. 죽이는 데 이유가 없습니다. 괴트에게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며, 어떻게든 처리하여야 할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 유대인들을 고용하여 사업을 하고 있는 나치당원인 ‘쉰들러’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쉰들러가 운영하는 그릇공장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유대인에게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작업장에서 일하다가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죽거나, 아니면 일하다가 독일군에게 사소한 실수로 총 맞아 죽거나, 정기검진에서 건강이 좋지 않으면 죽어야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은 죽어야하거나 하는 현실에서 그 공장은 목숨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독일군은 그 수용소를 폐쇄하고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 가스실에서 한 번에 대량살상을 하려고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쉰들러는 자기 공장의 유대인들을 살릴 묘안을 찾다가 소장인 괴트에게 제안을 합니다. 유대인 1인당 얼마씩 돈으로 계산하여 지불을 하고, 이들을 자신의 고향인 체코로 데려가서 독일군을 위한 탄피공장을 운영하여 독일군을 위해 일할 것이고, 또한 소장은 어짜피 죽을 유대인들 중 몇 백명을 빼낸다고 하여 크게 탈 날 일도 없으며 본인은 엄청난 돈을 벌거라고 말입니다. 괴트는 이를 승낙하고, 그날 저녁 쉰들러는 공장직원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주면 공장관리인(회계사)은 이를 타이프를 칩니다. 이 명단이 바로 ‘쉰들러리스트’이고, 이 명단에 든 사람은 전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성한 명단에는 총 1천 1백명이 있었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최대한 공장의 인부들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하는데, 쉰들러의 대사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이 명부는 생명부입니다.” 다른 사업을 하는 사업가에게 이 일에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만(힘을 합치면 4천명 정도의 유대인을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사업가는 거절을 합니다. 이 수용소가 폐쇄되기 직전 유대인들이 기차에 올라타는데, 이 장면도 아주 극적입니다. “쉰들러리스트”에 포함된 유대인(이를 영화에서는 ‘쉰들러의 유대인’이라고 표현하더군요.)들은 구원의 기차(죽음의 수용소에서 살 소망이 있는 쉰들러의 고향인 체코로 향하는 기차이기 때문에.)에 올라타고,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유대인들은 죽음의 기차(‘사망에서 사망으로’가 연상되는군요.)에 올라탑니다. 출발은 같지만 방향만 틀립니다.


잘 마무리 될 것 같았으나, 위기는 옵니다. 쉰들러의 유대인 중 남자들이 탄 기차는 무사히 체코의 수용소에 도착을 하지만, 여자들이 탄 기차는 착오로 아우슈비츠로 가게 되고, 이들은 머리가 깍이고, 알몸으로 가스가 나오는 목욕탕으로 들어가고 문은 잠깁니다. 이들의 절망감과 공포감을 생각해보셨나요? 분명히 몸값을 치렀기 때문에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죽음이라뇨? 소문으로만 듣던 그 가스실의 천장에 매달린 스프링쿨러만 쳐다보며 공포에 떨고 있는데, 그 스프링쿨러가 서서히 돌아가더니, 단비와 같은, 아니 생명수와 같은 물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쉰들러가 극적으로 구한 것입니다. 십년감수하였지요. 아니 죽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체코의 수용소는 그야말로 천국입니다. 쉰들러가 체코 수용소의 독일군에게 이들은 자신의 노동자이기 때문에 간섭을 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수용된 유대인 중 랍비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까지 합니다. 드디어 독일군이 연합군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포로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체코의 독일군들에게 조용히 떠나라고 하고, 유대인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졌으니 각자 고향으로 떠나라고 하는데, 자신도 나치당원이기 때문에 도망을 가야할 처지입니다. 헤어질 때 ‘쉰들러의 유대인들’이 서명한 문서(쉰들러가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여주었다는 내용)와 반지를 주는데, 이 반지에는 ‘한 생명을 구한 것이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문구가 써있습니다. 그때 쉰들러는 울부짖습니다. 자신이 타고갈 자동차를 가리키면서 이것으로도 유대인 열 명은 구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가슴에 단 나치당원 뺏지를 빼면서 이것으로도 유대인 목숨 두 명, 아니 한 명은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쉰들러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쉰들러는 1천 1백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나레이터는 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유대인과 그 자손이 현재 4천명이고,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과 그 자손이 6천명이라고 말합니다. 한 국가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 보다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위 영화의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 스필버그인데, 그도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 영화의 비장미가 더한 것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처리하였다는 것이고, 곳곳에서(유대인들이 죽을 때) 음악(그 음악이 바흐인지, 바그너인지, 모차르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습니다. 왜 울 수밖에 없었을까요? 유대인들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울었고, 계몽주의(17-18세기) 이래 이성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허구 및 역사의 비극에 울었고, 나는 한 생명도 구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울었고, 더구나 제가 바로 유대인처럼 그렇게 죽으면 죽어야 할,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아직 안 보셨다구요? 그럼 빨리 보세요.) 쉰들러의 인류애적인 구원이 감동적이지 않던가요? 쉰들러는 돈으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목숨값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어야할 자기 백성들을 돈이 아닌,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목숨을 사셨습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대속하였다고요? 예, 자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리스트”에 기록되어야만 삽니다. 영화에서처럼 위기가 닥쳐옵니다. 그러나 한 명도 빠짐없이 이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쉰들러처럼요. 그러나 쉰들러에게는 한계가 있었죠. 그 많은 유대인들을 전부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은 원하였으나 못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백성은 빠짐없이 구하였습니다. 어디에서요? 사망 중에서, 아니 요한계시록에 보면 심판 중에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다시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왜요? 그 사랑과 은혜가 고맙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 울었냐구요? 아닙니다. 아직 울 일이 남았습니다. “너는 내운명”이 있거든요.



“너는 내운명”은 황정민이 작년에 시상식장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소감을 이야기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너(전도연)를 만난 것은 나에게 기적이였어!” 이 영화는 시골 동네에서 시골노총각인 황정민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다방에 레지로 일하는 전도연이 오토바이를 타고 차배달을 가는 것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첫눈에 반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는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벚꽃이 허드러지게 핀 밤에 평상에 둘이 누워 전도연에게 약속을 하죠. “너만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꺼야!”


그러나, 전도연은 과거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전에 살던 남편이 하도 폭력을 행사하여서 시골로 도망와서 살았는데, 이 남자가 전도연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위기가 오는데, 이 남자는 황정민에게 돈 300만원(여기서 영화를 같이 본 준성엄마는 1천만원이라고 하는군요.)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자기가 가장 아끼는, 남의 소농장에서 일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소유인, 새 끼때부터 자식같이 키운 소를 팔아서 이 돈을 남자에게 주면서 다시는 전도연과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안 전도연은 황정민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나는데, 돈을 벌면 꼭 돈을 갚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전도연은 창녀촌으로 들어가고, 미리 받은 선 불금을 황정민에게 부치고, 황정민은 이 주소지를 가지고 전도연을 찾으러 창녀촌으로 가지만 전도연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기다립니다. 백방으로 알아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기다리면서 술로 한 세월을 보내면서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그러면, 전도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거와 아픈 상처와 아련한 사랑이 있는 이 여자에게 천형과도 같은 에이즈가 찾아옵니다.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왜죠? 에이즈는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연이 더욱더 절망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기피와 냉대입니다. 병도 병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기피와 냉대는 전도연을 더욱더 비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왜 전도연을 기피하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병이 전염병이고, 성병이기 때문이고, 언론에도 이슈가 된 것은 전도연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서 손님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동네 보건소에서 마을 주민들 전체에게 에이즈검사를 하는데, 얼마나 인간이 이기적입니까? 하기야 그렇게 사랑한다던 황정민도 에이즈검사를 받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


전도연은 교도소로 가게 되고, 황정민은 그래도 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홀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문희(홀어머니)는 그러면 너와의 인연을 끊자고 하면서 위협용으로 탄 양젯물을 황정민은 마시고, 병원으로 실려가 위세척을 하지만 목이 상하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매번 교도소에 면회를 가지만 전도연은 면회를 거절하다가,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황정민에게 미련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신을 떠나게 하려고, 만나면서 자신은 황정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가는데, 황정민이 쉰 목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전도연이 면회창에 다가와서는 왜 목이 상하였냐고 울부짖고, 황정민도 울부짖습니다. 손을 서로 잡으려고 하여도 면회창이 서로를 갈라놓으니 황정민은 면회소 위 창문에 설치된 스피커를 떼어내고 전도연의 손을 잡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면회소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아마 영화를 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울었을 것입니다. 제가 영화볼 때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주위에 났었고, 저는 아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제가 왜 울었을까요? 울음이 헤퍼서? 그 말도 사실이지만 여러분은 감동적이지 않던가요? 단지 심파극이라고요? 맞습니다. 심파극이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그런 영화나 창극 등을 보면서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고, 배신에 분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황정민 같은 사랑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요즘 세상에 살고있는 여러분들은 말입니다. 과거가 있는 여자, 다방 출신인 여자는 경상도 말로 버겁죠. 결혼하기가 힘들단 말입니다. 더구나 죽을 병인 에이즈에 걸렸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암이라도 걸렸으면 그래도 병수발을 들 용기가 있을 분들도 있겠지만, 그 병이 에이즈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솔직히 인정합시다. 우리는 이 실화의 주인공인 남자보다도 더 사람을 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감동적이라서 울고, 그 사랑이 없음에 울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울고...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요? 예, 저는 고멜이 생각나던군요. 바람난 여자, 창녀 출신인 이 고멜은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이 창녀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는 수없이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자식 낳고 살다가 딴 남자가 좋다며 바람나서 가출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호세아에게, 고멜을 찾아서 돈을 치른 후 다시 데려와서 살아라고 합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바람난 창녀처럼 이방신들을 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우리 처지가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바로 주를 멀리 떠난 이스라엘이고, 탕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고멜이고, 전도연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면 남편 다섯을 갈아치운 현남편도 본남편이 아닌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데,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요한복음에선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끝까지입니다. 세상 끝까지. 또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것이라.” 이런 주님 앞에서 창녀 같은, 죽을 병에 걸린 우리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목사님의 오후 말씀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엡4:8) 것입니다. 선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이 사랑, 이 은혜 받았으니, 감사의 눈물 외에 달리 우리는 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질고의 눈물 뿐만 아니라 감사의 눈물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오직 기쁨의 찬양만 있을 것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 제목을 이어보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운명입니다.


실화는 늘 감동적이죠. 감동적이지 않으면 영화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실화가 있습니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물가물하지만 2,000년전에 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영원한 창조주시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원자로서 말입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인데, 이 구원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야나, 세상을 심판할 묵시적 심판자(인자)나, 모세 율법이 고대하던 그 선지자(고난의 개념이 없음)로서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분명 이사야 등에 ‘고난받는 종’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에 믿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습니다. 고난받는 종으로서, 고난받는 인자로서, 고난받는 메시야(왕)으로서, 고난받는 선지자로서,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입니다.


어떻게 고난받는 메시야, 고난받는 인자,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신성모독자로. 그러나 자기 백성은 믿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자기 백성을,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전부 남김없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운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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