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예배시간에 학개서 1-2장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하던 중 사마리아 백성들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되고, 자신들의 집만 새로 지어서 살고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板璧)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학1:4) (* 판벽한 집은 지붕과 벽에 조각한 판을 붙인 화려한 집을 말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열심을 불러일으키다, 깨우치다) 그들이 15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을 재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옛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 영광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이고, 나중 영광은 장차 새성전으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예언하는 말씀이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자신이 참 성전임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성전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병을 치유하거나 불결한 자를 정결케 하는 등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수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부패하였던 성전을 공격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성전청결’ 사건입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許)치 아니 하시고”(막11:15-16)

이 사건은 단순한 ‘성전청결’을 넘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목에 대한 기소와 죽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상징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 행위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미리 계산된 행위였습니다. 위 구절의 앞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막11:11) 마치 성전 행위를 하기 전에 미리 조사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성전 제사를 적극적으로 방해까지 하였습니다.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 하시고”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사 기구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방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의 성전 제사는 타락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성전이 되어서, 자신의 죽음을 통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라는 것과 자신이 새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공격에 대해서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이들 세 집단은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멤버들임)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모의를 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막11:18) 이런 사실들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성전 행위는 사실상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고 ‘새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시키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행위에 대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심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막11:27)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면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막11:30) 이 말씀에는 중요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면 예수님 자신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성전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1:11)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이들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심문’ 다음에 바로 나오는 예수님의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가 때가 되어 농부들에게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들은 공경하겠지 하면서 아들을 보내지만 농부들은 아들마저 죽이면서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습니까?(막12:1-9)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아들은 농부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포도원 주인(하나님)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할 것이라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암시적인 말씀들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모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체포되어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막14:55) 증인 2명이 증언을 하여야 처벌을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예수님을 죽일 증거가 없자 그들은 ‘거짓 증거’를 찾아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거짓’ 증인들은 예수님이 직접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하였지만 대답이 없자 자신이 다시 질문합니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 여기서 ‘찬송받을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둘러서 표현합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이런 질문(네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단의 신탁’에 의해 종말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야 사상이 있음)을 하게 된 배경을 지금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연결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성전 행위-옛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성전을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


대제사장의 이 질문은 사무엘하 7장 12절의 예언의 말씀이 배경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 새성전(집)을 지을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막14:62)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14:63-64)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참람죄’로 정죄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참람죄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해당되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 것이라고 위협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는 ‘참람죄’에 해당한다고 본 것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고, 이 집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이 거하는 처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신12:11)


이렇게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참람죄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오히려 새성전을 짓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고, 예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다시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예수님을 향해 예배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그 말씀이 예수님이 친히 새성전되심으로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네요. 이번 성탄절은 새성전되시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김세윤 교수의 논문모음집인 “예수와 바울” 중 ‘예수와 성전’ 논문 및 오늘 오후에 공부한 학개서 말씀을 토대로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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