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늘 느끼는 거지만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그것도 앞자리와의 간격이 넓고 의자의 높이가 적당하여 앞에 누가 앉든 전혀 상관없는 쾌적한 극장에서. 씨네큐브에서 '준벅'을 보게 된 데는, 첫째 일러스트 같은 그림이 친근감을 준 영화포스터 둘째 씨네큐브라는 극장에 대한 호감도, 그리고 셋째 '준벅'이란 정체불명의 제목이 뭔가 하는 궁금증이 작용했다.

영화는 미술관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이 큐레이터니까. -아,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바로 그 큐레이터!- 큐레이터 아내는 관심이 있는 화가를 찾기로 하는데 마침 그곳이 시댁 근처다. 그래서 결혼 6개월만에 남편과 함께 시댁을 찾는다. 근데 이 시댁이 만만찮다. 대단하단 뜻이 아니라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이란 면에서 그렇단 얘기다. 끊임없이 담배를 피는 거구의 어머니, 말없이 창고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그러나 완성된 작품은 별로 보이지 않는- 아버지, 계속 다리를 떨며 신문을 뒤적이다가 신경질을 내고 소리를 지르는 남동생, 눈치없는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내는 만삭의 동생 부인. 이들 사이엔 대화가 거의 없는데 이들 속에 끼어든 부부 역시 이 집에 들어간 순간부터 급속히 대화가 사라진다. 다행히 몸의 대화는 밤마다 이어져서 동생 부부를 심란하게 하지만.

영화는 이 이상한 식구들의 어긋나는 소통법을 옆집에서 구경하듯 은근히 보여준다. 관객은 킬킬대며 그들의 불화를 구경한다. 특히 웃음소리가 커지는 대목은 큐레이터가 찾아간 아웃사이더 화가의 그림을 클로즈업할 때다. 남북전쟁의 기억 속에서 사는, 화가인 것도 같고 환자인 것도 같은 그의 그림은 과장된 성기와 어린아이 같은 터치, 자유로운 구성과 상상력으로 관객들의 즐거운 탄성을 자아낸다.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전시회를 가진 적도 없는 이 아웃사이더 화가와 계약하려고 큐레이터 아내는 기를 쓰는데, 남북전쟁의 환상에 사로잡힌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쉽지가 않다. 결국 이 식구들은 화해를 하는지, 큐레이터는 이 전도유망한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지, 그건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말하지 않겠다.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에 나오는 화가의 그림은 앤 우드라는 젊은 화가가 아웃사이더 아트의 흐름을 고려하여 새로 그린 것이란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화가들의 그림을 가리키는 아웃사이더 아트는, 아이 같은 표현과 신선한 상상력으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책은 이들에 대한 좋은 안내서다. 그림을 그리는 데도 그림을 보는 데도 학력이 문제가 되고, 심지어 그림이 주식 같은 투자종목이 되었으니 이런 땅에서 '아웃사이더 아트'란 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 말대로, 마음이 빵부스러기처럼 푸슬푸슬 날리는 이즈음이다. 조바심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 이틀에 한 권꼴로 책을 읽는데,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다 오늘 중국인 허삼관이 피 파는 이야기를 읽었다. 몇 번은 눈길을 책장에서 피하면서, 어쩐지 내가 아는 사람이 피를 파는 걸 빤히 지켜보는 듯한 그런 기분으로 단숨에 읽었다. 해피엔딩이라면 해피엔딩인데 가슴이 답답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처음 피를 판 허삼관은 이제야 피땀 흘려 산다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육십 해 삶은 말 그대로 피땀 흘려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수중에 돈이 넉넉해지고서도 돼지고기볶음과 황주를 먹고 싶단 생각에 피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만큼.

소설은 희극적 스타일로 비극적 삶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국 비극적 삶을 희극으로 바꾸는 건 스타일이 아니라 허삼관의 긍정인지도 모른다. 아들이 어머니를 비판하는 문화대혁명의 형식조차 허삼관의 허영 없는 자기비판 앞에선 그 진정성을 획득한다. 삶이란 말도 비평도 스타일도 아닌 그저 피땀을 흘리는 것임을, [허삼관 매혈기]는 웃으면서 가르쳐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은 자주성이 있을 때만 진정한 영혼이 될 수 있어요. 영혼은 커튼과 디저트를 선택할 때만 진짜예요... 당신은 하나의 거울 같은 것을 원했어요. 사람들은 자기들 주변에 거울들만 있기를 바라요. 그들 자신을 비추고 또 그 비친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 마치 좁은 통로 양쪽에 두 개의 거울을 마주보게 해놓고 당신 자신을 비췄을 때 볼 수 있는 그 무의미한 무한대처럼 비추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런 것들은 보통 하류 호텔에 있어요. 반사를 반사하고 반향을 반향하는 식이에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중심도 없고 목적도 없어요.  -도미니크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죄악을 하나 들라면 나는 자신의 제일차적인 관심을 남에게 두는 것이라고 하겠어요.  -로크

아인 랜드의 [마천루]를 이제야 읽다. 이기의 철학, 자아의 독립이 역사를 비로소 만든다는 그녀의 철학은 마천루처럼 정점을 향해 착실하게 나아간다. 오랫만에 어릴 적으로 돌아가 소설 속에 빠지다. 그리고 생각하다. 강하다는 건 견디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나는 견디는 것이야말로 힘이 있는 거라고, 그것이야말로 강함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를 노예의 철학에 젖게 한 건 타성이었을까, 허영이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작은 사람의 총탄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인도의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작년 겨울이었다. 우연이었다. 대학로 지하 극장에서, 끝도 없이 이어질 듯 아래로 아래로 향한 계단을 내려가 하데스 같은 그 지하 극장에서 처음 헤드윅을 봤다. 강렬한 록 음악이 극장을 울리고 심장을 뛰게 하고 온몸을 감전시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헤드윅이 속삭이듯 노래했다. 그(녀)의 등 뒤로 단순한 선의 애니메이션이 함께 흘렀다. ...지구가 아직 평평한 대지였을 때, 산들이 하늘까지 높이 솟아 있었을 때,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때 사랑은 아직 생겨나기 전, the origin of love! ...눈물이 흘렀다. 그 노랫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나는 이성애에 갇혔던 내 사랑의 관념에서 떠날 수 있었다. 나중에야 그 노랫말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걸 알았다. 철학이 소름끼치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헤드윅은 그렇게 보여주었다.

플라톤의 [향연]은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헤드윅과 어울리는 건 조안 스파르의 낙서가 담긴 판본이 아닐까. 철학을 공부했고 플라톤을 가장 좋아한다는 조안 스파르는, 진지한 고전에 장난기 가득한 만화와 낙서를 써넣음으로써 정전(canon)의 관에서 플라톤을 살려낸다. [향연]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설법(?)이 전개되기 전에 사랑의 기원에 관한 자신만의 해석을 피력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간은 본디 두 몸의 결합체였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합쳐진 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신을 위협하자 제우스는 그들을 둘로 가른다. 그리하여 영원히 그들은 갈라진 반쪽을 갈구한다. 결핍과 부재에 대한 갈망, 합일에의 욕구, 그것이 사랑이다. 헤드윅에서 이 이야기는 트렌스젠더와 게이, 동성애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신화로 노래된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사랑은 잃어버린 존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고 결핍의 자각이다. 그러나 사랑은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쪼개어진 우리는 하나가 되길 기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랑은 더욱 갈망된다. 헤드윅은 자신을 배신한 사랑을 통해 쪼개어진 자신을 직시할 용기를 얻는다. 헤어짐으로써 헤드윅과 연인 토니는 서로가 애초에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닮은꼴의 둘이 서로를 바라보고, 토니는 헤드윅에게 용서와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사악한 거리로 나가서 싸우라고, 당신은 아름답고 이길 수 있다고. 사랑은 그렇게, 결핍과 부재를 긍정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   

사족; 존 카메론 미첼의 매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헤드윅'에는 한국인 아줌마 밴드가 나온다. 분단 독일 출신의 헤드윅이 분단국 출신의 아줌마 밴드에 맞춰 노래하는 장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코끝이 찡해진다. 미첼은 한국 콘서트에서도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설사 계산된 서비스였다 해도 노래하는 미첼은 그걸 배려로 보고 싶게 만들 만큼 사랑스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