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겨울이었다. 우연이었다. 대학로 지하 극장에서, 끝도 없이 이어질 듯 아래로 아래로 향한 계단을 내려가 하데스 같은 그 지하 극장에서 처음 헤드윅을 봤다. 강렬한 록 음악이 극장을 울리고 심장을 뛰게 하고 온몸을 감전시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헤드윅이 속삭이듯 노래했다. 그(녀)의 등 뒤로 단순한 선의 애니메이션이 함께 흘렀다. ...지구가 아직 평평한 대지였을 때, 산들이 하늘까지 높이 솟아 있었을 때,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때 사랑은 아직 생겨나기 전, the origin of love! ...눈물이 흘렀다. 그 노랫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나는 이성애에 갇혔던 내 사랑의 관념에서 떠날 수 있었다. 나중에야 그 노랫말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걸 알았다. 철학이 소름끼치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헤드윅은 그렇게 보여주었다.

플라톤의 [향연]은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헤드윅과 어울리는 건 조안 스파르의 낙서가 담긴 판본이 아닐까. 철학을 공부했고 플라톤을 가장 좋아한다는 조안 스파르는, 진지한 고전에 장난기 가득한 만화와 낙서를 써넣음으로써 정전(canon)의 관에서 플라톤을 살려낸다. [향연]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설법(?)이 전개되기 전에 사랑의 기원에 관한 자신만의 해석을 피력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간은 본디 두 몸의 결합체였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합쳐진 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신을 위협하자 제우스는 그들을 둘로 가른다. 그리하여 영원히 그들은 갈라진 반쪽을 갈구한다. 결핍과 부재에 대한 갈망, 합일에의 욕구, 그것이 사랑이다. 헤드윅에서 이 이야기는 트렌스젠더와 게이, 동성애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신화로 노래된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사랑은 잃어버린 존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고 결핍의 자각이다. 그러나 사랑은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쪼개어진 우리는 하나가 되길 기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랑은 더욱 갈망된다. 헤드윅은 자신을 배신한 사랑을 통해 쪼개어진 자신을 직시할 용기를 얻는다. 헤어짐으로써 헤드윅과 연인 토니는 서로가 애초에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닮은꼴의 둘이 서로를 바라보고, 토니는 헤드윅에게 용서와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사악한 거리로 나가서 싸우라고, 당신은 아름답고 이길 수 있다고. 사랑은 그렇게, 결핍과 부재를 긍정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   

사족; 존 카메론 미첼의 매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헤드윅'에는 한국인 아줌마 밴드가 나온다. 분단 독일 출신의 헤드윅이 분단국 출신의 아줌마 밴드에 맞춰 노래하는 장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코끝이 찡해진다. 미첼은 한국 콘서트에서도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설사 계산된 서비스였다 해도 노래하는 미첼은 그걸 배려로 보고 싶게 만들 만큼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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