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저편에

현산면 백포리, 여기까지 왔다 윤두서 고택 용마루에 기러기 한 마리 오래 앉아 있다 기러기는 움직이지 않는 기러기다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저 방식이 불편하다

망부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이곳 바다 내음이 인다 오갈피나무 검은 열매를 혓바닥에 물이 들도록 따 먹었다 모래가 살결보다 고운 송평에서, 꽃이 지나간 자리 같은 작은 새 발자국 따라 멀리 가본다 막다른 길에 바다가 서 있다

당두리 갈대숲이나 연구리의 살구나무 한 그루 노하리의 가지 부러진 노송이 새겨져 있는 내 몸은 티베트 사자의 서처럼 단번에 읽을 수는 없는 책과 같아서 다만 어란, 가학리, 금쇄동 하고 낮게 불러보는 지명들 다 끌어안고 다니며 길을 앓는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또 나를 앓고 있는 길 위, 몸에 미열이 인다 어불도 앞 책바위에 와 나는 내 안의 길을 다 쏟아놓는다 풍경들은 나를 잘 읽지 못한다

-40만이 나라 밖으로 떠났다는데, 그래도 길이란 길은 꼭꼭 막혀 몸살을 앓는다. 길 위엔 선 저 많은 사람들이 그리움 때문에 길을 떠났을까. 여행조차 타성이 된 시대, 작은 새 발자국을 따라 걷는 시인은 하나의 풍경조차 오래 앓는구나. 그 마음이 아프다.

 

단 한 번의 풍경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최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보아버리고/ 알아버린 생이/ 다시 올까 두렵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을 멀게 했다

끔찍하다/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여행을 가려는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디카도 사지 않기로 했다. 눈앞의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남기면 무엇하나! 나는 이 첨단의 유목민들을 거슬러 혼자 이곳에 남기로 했다. '단 한 번의 풍경'으로도 삶을 감당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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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아요

곧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그에게 전해줘요

한평생 나는 그의 적일 것이라고

등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해주세요

뒤에서 쏘아버릴지 모르니

술을 마시고 타협을 하고 그의 그 무슨

대의명분이라고 하는 것까지

삭을 대로 삭아버린다면

총알 한 개로 숨을 끊어주겠어요

철학을 기만한 죄

나는 잘 모르는 사상을 기만한 죄를

톡톡히 갚지 않으면 안 될 거요

여자를 기만한 죄는

묻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하므로

남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아요

여자들은 그들을 타락시킬 뿐

사실은

보다 인간적이 되는 일 축하해요

양애경의 이 시를 아침신문에서 읽는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많은 남자들이 숱한 명분으로 숱한 여자들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온 것이 남성의 역사라면, 많은 여자들이 숱한 명분에 기꺼이 속아주고 그걸 사랑이라 이름해온 것이 여성의 역사. 그리고 둘의 거짓이 어우러져 만든 게 인간의 역사이리라. 경쾌한 이 시를 읽고 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오래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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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하이페리온 - Egon Schiele
에곤 쉴레 지음, 신희원.정석복 옮김 / 미디어아르떼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쉴레에 대한 책은 이번이 세번째.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전작보다 텍스트가 좀 아쉽다. 쉴레에 대한 해설서라기엔 내용이 소략하고 쉴레의 육성을 듣기에도 좀 미흡하다. 하지만 질 좋은 도판과 현지까지 찾아간 취재력, 그리고 쉴레의 구금경험에 대한 일기는 쉴레의 에로티시즘에 대해 여전한 궁금증을 갖고 있던 내게 좋은 자료가 되었다. 자신을 예수, 혹은 박해받는 구도자처럼 묘사한 자화상들이 구금 생활을 계기로 나타난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일기의 서술을 보면 쉴레는 에로티시즘을 쾌락이되 위험하고 두려운 쾌락, 타나토스를 동반한 에로스로 인식한 듯하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이 마치 해부도를 보듯, 이물감과 거리감 같은 느낌을 주는 것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쉴레 3부작을 기획하고 있다는 출판사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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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돼지 그리고 나
야나 셰러 지음, 박규호 옮김 / 들녘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돼재를 좋아해서 고른 책, 표지의 돼지에 매료되어서. 하지만 소설 속에서 돼지는 하나의 에피소드에만 나온다. 근데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 의문이 이 짧고 유쾌한 소설을 읽고 내가 가진 유일한 문제의식이다. 아주 재밌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고 하고 싶은데 자꾸 제목의 '돼지'가 걸린다. 가족들 사이에 끼어앉은 돼지, 돼지를 질투하는 딸, 거기서 무슨 쓸쓸함을 느껴야 할까? 하지만 아닐 것 같다. 그러기에 이 소설, 정말 엉뚱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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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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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만 있는 줄 알았다. 근데 과학책이란다. 것도 나같은 문외한도 이름은 들어본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 아주 재미있게 쓴 진화론 비판서라고 해서 과감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푹 빠졌다. 세상에 내가 과학책에!

굴드는 다윈의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을 낳아 진보를 향해 움직여왔다는 '진화론'을 부정할 뿐이다. 그의 주장은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인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짧은 명제로 요약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평균값'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파헤치고,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분석한다. 그렇게 해서 밝힌 것은 진화는 사다리 를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 진화가 복잡성과 전문화를 향해 나아간다는 통념과 달리 생물학적 증거들은 오히려 단순한 것들이 생존에 유리하며, 진화엔 어떤 경향성도 없다는 것이다. 생명 진화의 역사는, 인간이 진화의 승자가 아니며 진정한 지배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박테리아임을 보여준다. 가장 단순하되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며 끝까지 살아남는 존재!

굴드는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생물학적 진보론으로 이해되는 과정이 이미 다윈 생전부터 -다윈 자신의 애매모호함을 등에 엎고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다윈이 자신의 자연선택을 진화=진보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은 이유? 굴드는 그것을 다윈의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찾는다. 다윈의 보수적 '물질'은 진보적 '의식'을 규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다윈은 자신의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 진보적 의식을 구성했고, [종의 기원]에서 그것을 최대한 표현한다.

굴드의 이 책은 종교 없는 내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다윈주의가 이미 하나의 종교로 변해버린 시대에 -진화론이 사회생물학을 통해 우생학, 식민주의 따위로 나아갔듯이- 진화는 다양성을 말한다는 굴드의 주장은 피라미드 세계관에 갇힌 내 시야를 확 트이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과론적 설명이 얼마나 완강하게 내 발목을 잡고 있는지, 또 자못 과학적인 듯한 인과론이 사실은 우리 안팎에 속속들이 숨어 있는 우연의 힘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도 새삼 깨달았다. 굴드의 주장을 깊게, 넓게 뒷받침해주는 많은 연구와 저술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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