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는 -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지음, 강경이.박지홍 엮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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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결국 눈으로만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낱말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구절들에 마음을 모으면 시간은 느려지고 근심은 잊힌다. 아주 가끔 만나는 기쁨, 글을 배워서 참 다행이구나 싶은 순간이다. 지난 세기 영미 작가들의 산문 32편을 모은 <천천히, 스미는>은 그런 드문 기쁨을 주는 책이다.

산목숨은 위태롭고 죽은 목숨은 모욕당하는 시대에 한가롭게 책 읽는 기쁨을 운운하느냐, 누군가는 힐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후의 폐허, 냉전의 한가운데서 짝짓는 두꺼비에게 눈길 주었던 조지 오웰이라면 이 한가한 기쁨을 탓하지 않으리라.

 

자연을 즐기는 걸 감상적이라 비판하는 이들에게 그는 “모든 즐거움을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냐고 반문한다. “공장에는 원자폭탄이 쌓이고 거리에는 경찰들이 어슬렁대고 확성기에서는 거짓말이 쏟아져 나와도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돌고 “자연은 무허가로 존재”하고 있으니 “독재자도 관료도 이런 변화를 막지 못한다”면서. 그가 말했듯, “가장 누추한 거리에도 봄은 온다.” 제 잇속을 차리고 세상을 속이느라 누추해진 언어에도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아름다움에 마음의 밑줄을 긋는다.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병에도 운율이 있다.”

“한 사람은 내게 다정한 우리 엄마, 한 사람은 내게 다정한 우리 아빠. 어쩌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 모두 이 지상에. 모두 이 지상에 있는 이 슬픔을.”(제임스 에이지)

원망과 분노로 들끓던 마음이 고즈넉해진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준 이들에게 이 문장을 전하고 싶다.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이 지상에 있는 슬픔을 겪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도록. 누군가는 위로 받을 것이고 누군가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밀물과 썰물로 다가오는 생의 운율이 어느 날엔가는 필경 이 진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밀물의 삶에 익숙해져서, 혹은 모처럼 찾아온 밀물의 삶을 놓치기 싫어 썰물의 허허로운 풍경을 등지고 있다면, 아무 일없이 무사한 생을 꿈꿨던 내 가슴에 도끼처럼 내리꽂힌 문장을 읽어주련다.

“기쁨은 우리에게 오는 길에 이미 우리를 떠난다. 우리의 삶도 차고 질 것이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삶의 리듬에 따라 깨고 쉴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법칙에 우리도 지배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앨리스 메이넬)

 

잘 꾸민 언어에 무뎌졌던 마음이 투명하고 정직한 언어에 흔들린다. 과연, 정직은 최상의 방책이다. 내 언어가 당신 마음에 전해지지 못했다면, 당신의 언어가 우리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면, 그것은 기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읽지 못한 어둔 시선 때문이고 허튼 말로 마음을 얻으려 한 얄팍한 욕심 때문이다.

그 밑바닥에는 산처럼 생각하는 법을 모르는(알도 레오폴드)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다. 늑대를 죽이는 것은 사슴마저 죽이는 것이며, 한 그루 나무를 베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라 그 나무가 이고 있던 하늘까지 베어내는 것(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임을 모르는 무지가 있다. 영영 모르면 좋겠지만, 이 지상의 운율은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그러니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고, 사무치게 아름다운 문장이 우리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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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는 학생이 그림이나 노래, 시 낭독 같은 것에 소질을 보이면 선생님이 진심으로 감동하며, 때론 수업중인데도 교실을 뛰쳐나가 교무실에 가서 모든 선생님을 불러오기도 했어요.

마찬가지로 주위 아이들도 함께 기뻐하는 거예요. 재능을 가진 사람과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순수하게 기뻐하고 그 사실을 축복하는 거죠. 그렇기에 그 사람의 재능과 자신의 재능을 비교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열등감이 전혀 없죠. 열네 살 때 일본에 돌아왔을 때 ‘열등감’이란 말이 여기저기서 쓰이는 걸 보고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 학교에선) 어느 교과목이든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차이가 무척 컸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못하는 아이도 못한다는 사실 자체를 개성으로 인정해준다는 점이에요. 시험도 구술시험이나 리포트라서 못하더라도 반드시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죠. 잘하는 경우에도 어떻게 잘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어 모두 같지는 않아요. 일본 학교에서는 0X와 사지선다형 시험으로 평가를 하니까 로봇이 대답해도 똑같은 답안이 되고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의 구별이 명확해지죠. 당연히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죠. 게다가 학교도 부모도 같은 잣대로 보니까 열등감을 가진 아이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요. 눈금이 다른 잣대가 없으니까요. 러시아 학교에서는 잘하든 못하든 그 자체가 개성으로,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느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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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 최고의 과학자 13인이 들려주는 나의 삶과 존재 그리고 우주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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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 슈테판 클라인이 유명 과학자 13인을 인터뷰한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를 한 달 새 두 번 읽었다. 처음엔 제목 때문에, 두 번째는 내용 때문에.

 

전에도 그랬지만 얼마 전부터 부쩍 내 자신이 먼지처럼 느껴졌다. 나만이 아니라 세상 전부가 티끌처럼, 아니 티끌만도 못하게 여겨지며 도대체 사람이 뭔지, 왜 이렇게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라는 책을 만났다. 제목을 읽는 순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 별이 남긴 먼지라면 내가 먼지 같다고 느낀 것도 당연하구나 싶었다.

 

사람이 곤궁해지면 사소한 것에서도 위로를 얻는 법. 사소한 위로에 힘입어 책장을 넘겼다. 서문에 적힌 대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300여 쪽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답을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얼마쯤은 그렇다.

 

무엇보다 우리 인간은 우주학자 마틴 리스가 말했듯 “별이 남긴 원자쓰레기”이고, “별의 내부에서 수소와 헬륨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 결과”로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나도 그대도 별에서 왔다는 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라니 사뭇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그 별이란 것이, 지구별도 마찬가지지만,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란 걸 알면 마냥 멋진 것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별의 탄생에도 별이 낳은 우리의 탄생에도 아무 목적이나 의미가 없으니까.

 

현대 우주과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스티븐 와인버그의 말을 빌리면, “자연법칙 속에는 우주에서 우리의 자리를 특별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다른 자연물에 비해 특별히 의미 있는 존재도 아니고, 신의 각별한 피조물도 아니다. 그저 별이 남긴 우연한 먼지일 뿐.

 

우연한 먼지라니, 쓸쓸하다. 더구나 우리 존재가 우연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면 굳이 애쓰며 살 필요가 있나 싶다. 한데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깨달은 와인버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왜 그럴까? 와인버그 왈, 객관적으로는 의미가 없어도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고” 그 노력이 삶을 의미 있게 하기 때문이란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는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궁극의 이론’을 찾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면서도, 인간은 자연법칙이 왜 지금 이대로인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며, 과학은 세계를 움직이는 한 축인 우연을 설명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다른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마틴 리스는 물리학이 혁명적으로 발전했지만 우리가 우주물질에 대해 아는 것은 4%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신경과학자 한나 모니어는 과학이 뇌의 모든 세부를 이해해도 뇌 전체를 이해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듯 세계를 전부 다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데, 그럼에도 앎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티끌 같은 지식이 모이면 태산도 오를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반세기 전, 혁명이 실패하고 날로 초라해지는 세상에서 시인은 탄식했다.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중에서). 정말이지 이 크고 단단한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고 허약한 존재인지!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작고 하찮은 인간들의 탄식과 열망이 쌓여 적지 않은 성취를 이루었음을. 그리고 때론 먼지도 힘이 된다는 것을. 더구나 이 먼지는 보통 먼지가 아닌 별에서 온 먼지, 우리는 모두 별에서 온 존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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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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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를 보았다. 영화의 소재는 회사의 부당해고에 맞서 정규직 비정규직이 하나가 되어 싸웠던 2007년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영화를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억울한 일을 겪고 그토록 힘든 싸움을 하는 동안 나는 뭘 했나 싶어 가슴이 먹먹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꼭 그래서 운 건 아니었다. 나를 더 울컥하게 만든 건 고통을 나누며 서로를 보듬는 그들의 뜨거운 우정이었다. 그 우정이 부럽고, 한때 내 것이기도 했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연대의 삶이 그리워서 오래 울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자본에 의해 아웃소싱당한 노동자들을 부러워할 만큼 내 삶으로부터 아웃소싱되어 있다는 것을. 일 년 전에 나온 책을 그제야 펴들었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나를 빌려드립니다>. ‘아웃소싱된 자신(The Outsourced Self)’이라는 원제 그대로, 지금 내 모습이 거기 있었다.

 

대표작 <감정노동>(1983)에서 항공기 여승무원들을 대상으로 감정이 상품화되는 현실을 폭로했던 혹실드는 이 책에서 불과 30년 만에 여성의 감정노동은 물론 남녀노소 모두의 희로애락을 상품으로 만든 자본주의의 가공할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 현장은 미국에서 인도까지 전 세계를 아우르며, 출생부터 죽음까지 삶의 전 과정을 포괄한다.

 

거기서 사람들은 데이트를 주선하고 연애기술을 가르쳐주는 러브 코치의 도움으로 만나고, 웨딩 플래너를 고용해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 치료사의 상담을 받으며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멀리 인도의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고, 베이비 플래너와 파티 플래너, 필리핀 유모를 고용해 아이를 키우고, 고민이 있거나 외로울 때는 ‘임대 친구’를 부르고, 노인 돌보미와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노년을 지낸 뒤, 죽으면 상조회사의 장례서비스를 받는다. 그렇게 생로병사의 모든 과정을 시장에 의뢰하고, 사랑과 우정, 슬픔과 추억까지도 타인에게 외주를 주면서 살다가 죽는다.

 

자본의 전략으로 시작된 아웃소싱이 삶을 지배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내 삶이 갈수록 적막해지는 이유를 알았다. 돈으로 임대 친구를 사지만 않았을 뿐, 나 역시 혹실드가 만난 사람들처럼 가족이나 친구에게 고민을 토로하기보다는 자주 들르는 찻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담사를 찾아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묻고 따지거나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고, 버거우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관계가 편했다. 그 관계의 부질없음에 쓸쓸해하면서도 행여 돈이 없어서 그런 관계를 살 ‘자유’조차 잃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지금의 나였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알았다. 너무 오랫동안 사람을 살 자유를 잃고 자신을 팔 자유만을 갖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왔음을, 타인들에게 내 몸과 마음을 맡기면서도 그들 전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정작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잊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런 내게 혹실드는 말한다. 원톨로지스트(wantologist)를 찾아가 네가 뭘 원하는지 묻거나 아니면 잃어버린 연대를 회복하라고. 시장이냐 사람이냐, 결국 그것이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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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청문회 1 - 독립운동가 김구의 정직한 이력서
김상구 지음 / 매직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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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사학자 김상구가 쓴 <김구 청문회> 때문에 잠을 설치고 악몽을 꾸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추앙하는 독립운동가 김구를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라 칭한 부제를 보고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크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백범일지>에 감춰진 진실이다. 김구가 지금처럼 헌신적인 독립투사요 정치인으로 존경받게 된 데는 <백범일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려한 문장으로 쉽고 재미있게 씌어진 <백범일지>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전 세대의 추천도서로 꼽히며, 특히 부록으로 실린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라는 절절한 고백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백범일지>를 대중적 필독서로 만드는 데 기여한 유려한 문장과 가슴을 울린 ‘나의 소원’이 대표적인 친일파 이광수의 솜씨라면 어떨까? 또한 열일곱 살에 이미 수천 명의 연비[포교한 신도]를 거느린 동학의 애기접주로 명성을 떨쳤으며,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고 김구가 자랑스럽게 전한 이야기들이 모두 거짓이라면 어떨까?

그뿐인가. 임정의 문지기를 자처했다는 겸손한 고백과 달리 실제론 반대파를 밀정으로 몰아 죽이고 환갑이 넘은 박은식을 구타하는 등 임정의 경무국장으로서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다면? 그래도 우리가 ‘못난 사람’ 백범(白凡)의 ‘숨은 뜻’(逸志)에 감동하고 그를 존경할 수 있을까?

 

<김구 청문회>는 수많은 1,2차 자료를 동원해 백범의 기록에 의혹을 제기한다. 예컨대 김구가 동학농민전쟁에서 애기접주로 불리며 대활약을 했다는 것은 동학 관련 자료에는 전혀 없고 오직 <백범일지>에만 나오는 얘기이며, 복수하려고 죽였다는 일본인은 군인이 아니라 상인이고 사형 직전 고종이 전화를 걸어 살아났다는 얘기는 전화 자체가 개통되지도 않았으니 완전히 소설이라는 것이다.

놀랍지만 이 정도는 자서전에 비일비재한 ‘뻥’이라 치자. 하지만 진짜 친일 경찰은 살려주고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은 사형시킨 것, 자기 세력을 키우려고 다른 임정 인사는 배제한 채 윤봉길 사건의 주모자를 자처한 것, 독립보다 반공을 우선시해 독립단체들의 통일을 거부한 것,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늘 그가 배후로 지목된 것 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근 이인호 KBS이사장이 김구는 건국 공로자가 아니라고 해서 물의를 빚었으나 이 책에 따르면 뭣도 모르는 소리다. 왜냐하면 김구는 반탁을 내세워 미소공동위원회를 무력화시키고 이승만을 도와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지지했으며, 그가 관여한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들은 좌우합작 세력에 테러를 가하여 단정이 수립되는 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독립운동을 했고 말년에 통일정부를 위해 나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공이 과를 덮을 수는 없다. 더구나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사이,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정치가로 꼽힌 여운형 같은 중도파의 역사가 지워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김구 청문회>가 김구의 민낯을 파헤친 것도 그 때문이니, 이제라도 은폐와 왜곡으로 뒤덮인 현대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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