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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린 헌트 지음, 조한욱 옮김 / 새물결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대표적인 문화사가 린 헌트의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을 이끈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권력을 세우기 위해 기존의 국가=가족 관념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가족로망스를 구현했는지 추적한다. 절대주의에서 국왕 통치는 가부장적 가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즉, 국왕은 아버지였고, 따라서 루이 16세의 처형은 공개적인 아버지 살해였다. 아버지를 죽인 혁명파는 이제 새로운 가족 로망스를 창조한다. 즉, 혁명기 가족로망스들은 정치세계를 새롭게 상상하고 가부장적 권위에서 벗어난 정체를 상상하기 위한 창조적 노력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족로망스의 핵심은 '형제애'였다. 형제애는 가부장적 권위와의 단절을 뜻했고, 죽은 아버지 대신 새 아버지를 찾은 다른 혁명-일테면 미국혁명, 한국사에서 보여진 미완의 혁명들-과의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가족로망스가 발전하면서 여성의 지위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형제애의 가족로망스가 확립되면서 여성은 배제되고, 이제 여성의 위치는 철저히 사적 영역으로 축소된다. 린 헌트는 사드를 이런 가족로망스가 마주치거나 해결해야 할 극한을 제시한 인물로 소개한다. 그러나 사드의 비유와 상징들은 형제애라는 로망스의 한계를 보여주거나 비틀기를 시도한 점에서 유의미할지 모르나 그 이상은 없다. 그에게도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가부장과 형제애라는 남성 담론의 조롱, 공격으로서 사드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여성 담론을 시도하거나 상상한 적은 없다. 이런 점에서 사드는 부친 살해의 정점이며, 새로운 부친 탄생을 막기 위해 모친 살해를 감행한 극단아였다. 문제는 여성을 포함한 새로운 비전, 상상, 이미지를 프랑스 혁명파도 사드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여성의 무의식이 반영된 가족로망스는 아직도 실현된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짧은 시기를 대상으로 했음에도, 이 책은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섬세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참신하면서도 섣부른 비약이 없다. 또한 한국 사회의 지독한 가부장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실마리도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