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은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들 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그렇게 영화화된 작품들은 일세를 풍미한 명작으로 통하니 원작자로선 행운이다.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는 어린 시절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악령 같은 작품들. 특히 헨리 폰다 주연의 [분노의 포도]는 그 흑백 화면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이 소설을 당시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명작 시리즈로 읽었는데, 2단 조판으로 4백쪽이 넘는 대작이었다. 요즘같으면 2권도 모자라 3권으로 분권했을 작품인데, 중학 겨울방학 때 이 소설을 그야말로 어금니 아끼듯 야금야금 읽었다. 당신 인생의 책이 뭐요? 라고 물으면 두말 않고 이 책을 떠올리겠지만, 아마 내놓고 말하기엔 주저할텐데, 그 소설을 온몸으로 읽었던 그 시절의 열정이 지금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선 오히려 [생쥐와 인간]이 더 마음에 다가온다.

 극장에서 개봉한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브 마이스앤 맨] 비디오를 보고 새삼 존 스타인벡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그리고 어느새 비루해진 삶을 돌아봤다. 연극배우 출신의 게리 시니즈가 주연과 감독을 맡은 이 영화에는 귀기어린 배우 존 말코비치가 단순해서 비극적인 영혼의 레니 역으로 예의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원작의 깊이야 말할 것 없지만 그저 이 둘의 앙상블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여료가 아깝지 않다. 팝콘이나 새우깡을 먹으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영화이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일은 없지만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하염없이 방바닥에 앉아 있게 되는 대책없는 영화다. 중학생 이상이면 소설도 영화도 볼 수 있으니 아이들 교육 차원에서 '소설 읽고 영화 보기'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만하다.  

생쥐와 인간의 소중한 계획은 / 너무 자주 뒤틀려버리곤 한다 / 그리하여 약속된 기쁨 대신 / 슬픔과 고통에 찬 덧없음만을 남겨주네.  소설의 모티프가 된 로버트 번즈의 시구처럼, 아무리 영악하게 굴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허방은 있는 법. 어쩌면 그 때문에 이 지긋지긋한 '사람'과 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