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지난 겨울에 내린 눈
잊지 말라는 당부 같은

춘삼월에 내린 폭설도

또다시 눈 녹듯 사라진 삼월 십이 일 저녁

신문에 난 ‘한국의 책 100권’의 목록을 들여다보다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공자(孔子)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주(周)나라의 눈 덮인 겨울을 생각합니다

 

막소주 한 되를 사러

질척이는 거믄절 고갯길을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뒤따라 나선 아이가 자꾸

집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립니다

나무가

나무가 없다고

까치집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그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그늘을 지운다고

오늘 아침나절에

옆집 늙은이가 덜컥 베어버린

집 뒤에 늘 서 있던

그 커다란 굴참나무가 보이지 않는다고

향음주례(鄕飮酒禮)하고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다

이창기의 시집을 읽다. 표제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도 좋고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도 좋다. 예전 [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 보다 더 좋은 것같다. 요즘 나이 좀 들고 시도 좀 오래 쓴 시인들이 툭하면 인생에 대한 잠언 같은 걸 시라고 쓰는 폐단이 있는데, 이창기는 그걸 슬쩍 비껴가는 듯하여 반갑다. 김수영의 시제에서 따온 윗 시는 오래 읽고 음미할 수록 행간의 뜻이 새록하여 재미있다. 다만, 시집 뒤에 실린 이남호의 해설은 사족 중에도 사족이요, 시집의 안내글로서도 영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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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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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쑤퉁은 요즘 잘 나가는 중국 작가다. 5년 전쯤 중국 현대미술 전시회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확실한 기본기에 강한 자신감과 문제의식이 담긴 힘 있는 작품들이, 중국 경제의 약진만큼이나 예술도 약진하겠구나 라는 부러움 섞인 전망을 가능케 했다. 그때부터 중국 문학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졌는데, 몇 년 전부터 중국 소설, 중국 에세이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두루 읽기가 바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읽고난 소감은 대개 찜찜하다. 중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쑤퉁의 이 작품 역시 읽기 전의 기대에 비해 읽고난 뒤는 실망이 크다. 뭣보다 중국적 소재, 오리엔탈적인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작품의 내적 요구라기보다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포석 혹은 포즈 같은 혐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소재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오르한 파묵이 [내 이름은 빨강]에서 이슬람 미술을 소재로 사용하여 주제를 부각시킨 것만 보아도 무엇이 재료냐가 이런 혐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쑤퉁은 '섭국의 어린 제왕'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중국 왕실의 분위기를 나른하게 묘사한다. 늙은 황후에 의해 점지된 어린 제왕은 왕실에 깃든 타락을 그대로 따르면서 잔학을 행하고, 모든 부패한 왕들이 저지르는 실정을 자신의 이름으로 허락한다. 그에겐 아무 권력이 없으나 잔학을 행할 만한 권력은 있으며, 사랑을 선택할 힘이 없으나 사랑을 버릴 힘은 있다. 그리고 마침내 권좌에서 쫓겨난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줄타기 광대다. 줄타기 광대로서 그는 비로소 제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줄타기 광대 왕이 되어 스승이 남긴 '논어'를 읽는다.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럴 듯함, 이것이 이 소설의 함정이자 패착이다. '논어'의 등장은 뜬금없고, 시종일관 되풀이되는 '마지막이 멀지 않다'는 예언은 소설의 진행 속에서 점차 힘을 잃어간다. 쑤퉁은 인생도 역사도 허무할 뿐이며, 그 허무를 택함으로써 줄 위에서 자유로이 놀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너무 낯익고 익숙해서, 현란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한다. 혹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에 가슴 설레는 서구 독자에겐 약효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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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2007-08-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독하신듯.. ^^* 논어의 등장이 뜬금없는게 아님. 올바른 삶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음. 또 처음부터 논어 얘기는 있었음. 또한 이 소설이 인생과 역사의 허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야기임. 그리고 반복되는 예언 구절은 소설의 의미와 방향을 환기하는 요소로, 코엘료 소설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음. 쉽게 쓰여진 듯 하지만 문장과 구성이 모두 탄탄함. 잘 읽어보면 감동도 있음. 자기 지식과 관점에만 함몰되어 작품의 의미를 깊게 짚어내지 못하고 단조롭게 이해해서는 곤란함

스머프 2007-08-2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소설을 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지 잘 못 읽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논어는 처음부터 등장하지만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 별 역할을 못 한다는 점에서 뜬금없다고 표현한 거고요, 예언은 어떤 상징성을 갖기엔 너무 단순하다 싶슴다. 각자 보는 눈이 있는 거니까요^^
 

베아트릭스 포터는 '피터 래빗'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그림책 작가다. 피터 래빗 시리즈는 앙증맞은 토끼 그림이 마치 팬시상품 같은 그런 예쁜 그림책이다. 섬세한 수채화 그림에 와, 참 예쁘다고 감탄한 적은 많았지만 특별히 이 책이나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미스 포터]라는 영화를 보고 생각이 좀 달라졌다.

 르네 젤위거와 이언 맥그리거라는 잘 나가는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는데, 사실 배우들이 돋보이는 영화는 아니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미스 포터라는 인물을 정말 잘 이해한 감독의 주문이었을지 몰라도- 모든 배우들이 다 제 몫을 하고 절대 오버하지 않으면서 서로가 어울리는 분위기를 전하는 데 열심인 까닭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튀는 것은 미스 포터의 친구들, 그녀가 평생을 두고 그려낸 캐릭터들이다.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피터 래빗과 제미마 퍼들덕 같은 미스 포터의 사랑스런 친구들은 발군의 매력을 과시한다. 종이 위에 얌전히 있다가 미스 포터의 한마디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장난을 치거나 삐치기도 하는, 이 소박한 애니메이션이 사람을 정말 즐겁게 만든다.

허나 무엇보다 마음을 끄는 것은 미스 포터가 가진 진정성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서, 이야기 해주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을 즐겁게 하고 위로하고 늘 함께하는 그 친구들을 표현하는 단순소박한 열망에서 그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런 진정성은 그녀가 레이크 지방의 농장들을 사들여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에 동참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어떤 이념이나 이론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맑고 정직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고스란히 실천하는 그녀의 삶이 참 아름답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 그녀의 책을 백 년이 넘어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하는 비결인 듯싶다. 좋은 작가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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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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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눈이 먼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된다면, 위안이 될까 악몽이 될까. 아마 처음엔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되리라. 하지만 내 손을 잡고 안내해줄 아무도 없다는 데 이윽고 지독히 절망하리라. 사마라구의 환상은 어느날 눈이 먼다면, 이라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상상에서 시작하여 이 지독한 절망의 현실을 그려낸다. 환상의 현실이지만 그것은 칼비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는 궤를 달리한다. 사마라구의 환상의 리얼리즘은 한 틈의 환상도 허용하지 않는 지독한 리얼리즘이다. 그의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뿐,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적 사용에서 말하는 환상과는 조금도 같지 않다.

오직 한 여자만이 볼 수 있다.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그녀의 인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위안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여자에겐 저주이고 악몽이다. 그녀가 볼 수 있고 보게 되는 것, 봐야 하는 것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현실이다. 더구나 오직 그녀만이 볼 수 있기에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다. 

"...이 성당에 있는 모든 성상들은 눈을 가리고 있어요.  ...혹시 이 동네 사제가 한 일일지도 몰라요, 눈 먼 사람들이 성상들을 볼 수 없다면, 성상들도 눈먼 사람들을 볼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죠. 원래 성상들은 못 보잖아. 그렇지 않아요, 성상들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봐요, 다만 이제 실명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되는 바람에 성상들은 못 보게 된 거죠. ..사제가 성상들의 눈을 가린 거라면 좋겠군. ..난 눈먼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이 안으로 들어온 그 사제를 상상하고 있어, 그는 결국 그 세계로 돌아가야겠지, 그 자신도 눈이 멀기 위해서 말이야, ...제단에 올라가 붕대를 두르고, 그림들이 맞이한 백색의 밤이 더 짙어지도록 하얀 물감을 두 번 칠하는 모습이 보여, 그 사제는 모든 시대와 모든 종교에서 최악의 신성모독을 저지른 사람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그 신성모독은 가장 공명정대하고 또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것이기도 해, 그 사람은 궁극적으로 신은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러 여기에 온 거야."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여자는 눈먼 자들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신은 볼 자격이 없다고 선언한다, 모두 다 눈을 뜰 때 눈을 잃음으로써. 소설의 끝은 예상했듯이 모두가 다시 보게 되는 해피엔딩이지만 누구도 기뻐할 수는 없는 해피엔딩, 도무지 내가 장님인지 아닌지 이 세상을 보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지 장담할 수 없는 어둑한 결말이다.

소설에서 사마라구는 쉽고 간결한 알레고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겸손한 작가의 미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의 문체는 정확하고 정직하고 신랄하여 조금치의 허영도 용납하지 않으며, 모두의 눈을 덮은 하얀 적막처럼 끈덕지게 독자를 물고 늘어진다. 문체와 주제는 호응하고 환상은 리얼리즘을 만나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며 알레고리는 딱 그만큼의 효용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이 아직도 제 몫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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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0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죠. 강렬한 인상을 받은.(눈뜬자들의 도시는 읽다 잠시 중단했긴 하지만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ㅁ'

스머프 2007-08-0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뜬 자들의 도시를 시작하려고 해요. 이만큼 좋았으면 싶은데...어떤지 모르겠네요^^;;
 
여성 철학자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철학의 역사
마르트 룰만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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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두께에 망설이다가 그만큼 내용이 충실하려니 믿고 선택했다. 책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여성 철학자가 소개되어 있다. 모두 서구 인물들이니 만약 여기에 동양의 여성 철학자까지 보탠다면 그 양은 정말 엄청나리라. 하긴 그 오랜 역사에서 여성 철학자들을 뽑았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읽다보면 좀 지루해지고 실망스럽다. 여성 철학자도 남성 철학자만큼 많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의미있긴 하겠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건 남성 철학자들과 다른 철학을 한 여성 철학자들의 존재일 것이다. 물론 '여성이 감히 철학을 한다고?'라고 생각하는 무식한 남성이 워낙 많으니 이런 무식한 두께의 책도 나온 거지만, 이제는 여성 철학자들의 인명사전이 아니라 여성 철학의 비전과 깊이를 보여주는 철학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남성들의 철학이 위기에 봉착한 지금, 여성 철학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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