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스본행 야간열차 1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57세의 고전문헌학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어느날 아침 한 포루투갈 여자와 마주치고 삶이 흔들린다. 그리고 우연히 손에 넣은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포루투갈 의사의 책. 그레고리우스는 무작정 리스본으로 떠난다.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내부의 열망,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그를 길 위에 서게 한 것이다. 리스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글과 행적을 따라가며, 살아남은 친구와 가족, 동지와 선생, 연인들의 회고를 통해 그를 형상화한다. 이 과정은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며, 또한 똑같이 불면증으로 고통받은 프라두에게 자신을 동일시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처 플로렌스에 대한 뒤늦은 이해와 연민, 베른에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독시아데스와의 거리두기는 지금까지의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표현이다. 그러나 프라두의 삶을 내면화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이 시도는 결코 평탄하지 않다. 원인모를 현기증에 시달리면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마지막 여행 -피니스테레(세상 끝)으로의 여행을 따라가고 거기서 프라두에게 최후의 충격을 주었던 여인 에스테파니아를 만난다. 이 여행으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와의 일체감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균열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를 강타하는 현기증은 나를 잊을지 모른다는 불안, 나를 구성하던 기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며, 프라두를 죽음으로 몰고간 뇌질환의 내면화이자 동시에 프라두와의 동일시에 불안을 느끼는 심리를 드러낸다. 그가 '오디세이아'의 한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 쓰는 건 고향으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려는 안간힘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단어를 기억해낸 그는 고향 베른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서 그는 불편함과 이질감을 느끼고, 낯설기만 한 고향에 사진기를 들이댄다. 이방인의 눈으로 그 도시를 보고 해석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상된 사진은 "낯설기만" 하다.
그가 마침내 귀향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있던 장소를 찾고 익숙한 공간에서 과거를 떠올리면서였따. "영화는 지루했지만 옛날과 같은 냄새가 나서 끝까지 앉아 있었다."는 구절은, 그가 지루한 일상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그 삶을 인정했음을 뜻한다.
소설은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와 나란히, 화려한 수사와 현학적인 경구들로 가득한 프라두의 문장들을 배치한다. 그러나 이 문장들을 통해 프라두의 실체나, 그를 생과 불화하게 만든 근원적 고민을 알 수는 없다. 이 점은 작가 메르시어의 실패로도, 혹은 완벽한 소설적 장치로도 읽힌다. 프라두에 대한 사람들의 회고와 묘사는 너무나 극적이어서 마치 신화를 읽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으며, 그의 밑모를 탐구는 기원과 지향 모두 애매하다. 프라두의 문장은 읽은 이를 매혹시키지만 그의 삶은 안개 속의 부표처럼 희미하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생함과는 이상하리만큼 대조적으로.
어쩌면 '포르투게스'라는 낯선 단어의 울림이 그레고리우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을 때 그것은 의미가 아니라 무의미, 무의미에 대한 동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미의 과잉으로 보이는 프라두는 그를 매혹시키지만 사실상 프라두가 분명하게 전하는 의미는 없다. 오히려 프라두는 언어로 삶을 구성하려 한 지식인의 실패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뜻 프라두에 대한 메르시어의 헌신 혹은 집착은 삶을 언어로 구성하고픈 작가의 욕망으로도 읽힌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라면 이 욕망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라는 프라두의 경구는 긴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며, 결국 삶이란 그런 문장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한편으론 일상의 속도를 거스르는 아름다운 '완행열차'로, 다른 한편으로 쓸데없이 돌아가는 완행열차로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도 볼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