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레이얼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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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에는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에 갑자기 위기가 닥치고, 주인공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그 밑바닥에서 새로운 영감 혹은 기회를 얻어 인생을 재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감정이입이 되면 주인공이 제발 예정된 불행의 길로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며 읽게 된다. 그러나 책의 내용 중 어느 목사와의 대화에서 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고" 한다. 그렇기에 어떤 분위기나 정황을 감지한 책 밖의 독자가 책 안의 주인공에게 바라는 기대는 쉽사리 무너지고, 독자는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고난과 역경을 경험하고 이겨낸다.


<비트레이얼>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과 경제적 무능함을 어린 시절 경험했던 주인공(로빈)은, 화가로서의 재능이 매우 뛰어고 매력적이지만 자신의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보헤미안(폴)을 만나 결혼하는 '모순'에 빠진다. 그리고 밝혀지는 폴의 숨겨진 과거와 현재에 대해 로빈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작정 뛰어든다. 그 길에는 알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예상하면서도. 어찌보면 그가 스스로 자초한 불행의 원인이 모든 것에 똑뿌러지는 결말을 원하는 그의 방식일지, 자신의 결혼을 불행하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일지, 폴 (또는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연민일지, 그에게 심하게 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일지,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매순간 '이번 일만 처리하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다짐 이면에는 살면서 맞게 되는 선택 앞에서 현실적인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끌고 가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도 같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상대방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며 성공의 길로 들어서는 주인공을 그린 케네디의 기존 소설들에 비해 이 책은 폴이나 그를 곤경에 빠뜨린 벤 핫산에 대한 완벽한 복수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게 되고, 여전히 폴에 대한 연민을 간직한 채 현실에 적응하는 로빈을 그리고 있다. 폴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고, 죄책감은 연민이 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배신과 거짓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일까. 비록 폴은 사라졌지만 그의 자리를 메워줄 아이를 통해 로빈의 모순과 불행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채색될 수 있는 것일까.

 

눈을 떼기 힘든 빠른 전개와 실제로 보는 듯한 다양한 묘사는 여전하지만, 작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불분명하고 부족한 것 같다.

폴이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발코니 의자에 앉아 먼동이 트는 하늘을 지켜보았다.
"이맘때를 뭐라고 표현하는지 알아?"
"새벽?"
"새벽이나 동틀 무렵 말고, 다른 말이 있어."
"시적인 말이야?"
"제법 시적이지. 이 무렵을 `블루 아워`라고 해."
"블루 아워."
나는 잠시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입으로도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어때, 제법 시적인 말이지?"
"너무 어둡지도 가볍지도 않은 말이야."
"모든 사물이 평소와 다르게 보이고, 우리가 상상과 지작 사이에 갇혀 있는 때라 할 수 있지."
"선명하면서도 모호한 때?"
"투명과 반투명 사이." - 72쪽

나에게 행복이란 늘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도하는 모든 일의 밑바탕에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깔려 있다. 우리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벗어던지는 순간 행복을 느끼게 된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을 경우 상대의 두려움과 불안감도 자신의 몫이 된다. 부부가 짊어지고 있던 짐들을 모두 내려놓을 때 비로소 배우자 덕분에 생의 축복이 내렸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매우 고귀하고 드문 순간이다. - 92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보려고 하지 않죠. 상대에 대한 연민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받게 될 상처가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럼에도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지요." - 294쪽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존재인지, 우리의 운명을 모두 결정짓는 존재인지에 대해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몽테뉴가 한 말이 저의 생각을 대신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말이죠." - 295쪽

꿈은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행복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439쪽

누구에게나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기 자신이다. - 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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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그리울 때 보라 - 책을 부르는 책 책과 책임 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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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찾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보나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부터 책 소개를 통하여 독서의 길안내를 받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이 사람처럼 나도 서평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때문에 서평이 주는 느낌도 다르기 마련이다. 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목적에 충실한 글이 있는가 하면,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저자의 느낌만을 열거해 놓은 글, 책 너머의 깊이 있는 배경이나 지식까지 연결해주는 글, 책의 내용과 현실의 문제점을 기막히게 엮어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글까지.


그러나 이렇게 서평을 찾는 다양한 이유와 서평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서평이라면 모름지기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나는 그것을 '소개하는 책을 독자가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서평의 근본적 목적은 그것이 다른 글의 평가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서평을 통하여 본래의 책(원본)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평은 나를 그 너머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인쇄술이 발전하기 이전에 이야기는 대개는 구전(口傳)되었으며, 글을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본을 필사(筆寫)하는 것뿐이었다. "아비 그리울 때 보라"며 멀리 시집간 딸에게 소설을 필사하여 선물로 주는 아버지처럼 저자는 우리에게 (필사는 아니지만) 생각의 전달이라는 방식으로 원본의 감동을 전달하려는 것 같다. 기교가 아닌 진심을 강조하는 저자의 서평을 덮으며, 이제 나는 그와의 공감을 넓히기 위해서, 또한 우리가 서로 공명할 수 있도록 여기에서 소개한 책들을 펼쳐보려 한다.

눈물은 눈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가. 조선 후기 문장가 심노숭(1762-1837)이 아내를 잃고 지은 <누원(淚原)>의 첫머리에 던진 질문이다. 눈에 있다면 물이 웅덩이에 고인 듯 모인 것인지, 마음에 있다면 피가 맥을 타고 돌듯 하는 것인지 고쳐 따졌다. - 33쪽
심노숭은 눈물이 마음에서도 나오고 눈에서도 나온다고 했다. 구름을 눈, 땅을 마음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비와 같다는 것이다. 비는 구름과 땅을 통하는 기(氣)의 감응에 의해 내리되, 구름에도 속하지 않고 땅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심노숭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느꺼움이다. 상(喪)을 당해 참담한 지금 이 순간은 물론이고 여러 해를 지나 흥겨운 악기들이 들어찬 자리에 머물 때, 업무를 보느라 서류가 책상에 가득할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릴 때, 잡기를 여유롭게 즐길 때, 그러니까 눈물과 전혀 무관한 그때에도 마음이 갑자기 북받친다는 것이다. 그 느꺼움의 순간, 심노숭은 죽은 아내가 곁에 왔음을 느낀다고 적었다. - 34쪽

밥벌이와 상식이란 이름으로 당연하게 여긴 변화들을 어린 왕자는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묻고 되돌린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낙오될까 두려워 제 발밑만 살피고 고개 들어 뭇별들을 보지 못할 때 두려움이 아름다움을 누르고, 어린 왕자가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마저도 잊힐 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아직,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40쪽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은 두 가지 다른 빛깔을 띤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하느냐는 분노의 표출이 첫번째다. 가해자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국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혹은 사사로운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고 피해자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분노는 폭발한다. 또다른 빛깔은 날카롭고 뜨겁진 않으나 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질문을 던진 이에게 끈질기게 되돌아온다. 당장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 썩어빠진 세상을 외면하진 않았던가. 끔찍한 불행이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일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였으니,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 43쪽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틈이다. 가령 고려 말 승려 신돈에 관한 소설을 짓는다면 공화국의 국민인 나와 왕조의 백성인 그, 21세기의 나와 14세기의 그, 서울에 사는 나와 개성에 사는 그의 틈은 깊이도 넓이도 제각각이다.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모두 `사이 간(間)`이 들어가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틈은 어쩌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내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틈을 최대한 메우기 위해 읽고 걷고 따져 듣는다. 그러나 결코 나는 신돈이 아니며 신돈 또한 내가 될 수 없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틈 앞에서 스스로 묻곤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부질없는 글 장난이 아닐까. - 46쪽

움직임은 그 상황을 경험한 이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추락은 불안이요 공포다. 떨어질 것을 알기에 선뜻 두 발을 지상에서 떠지 못한다. 그렇지만 또한 비상은 파괴요 설렘이다. 일상에 갇히지 않고, 단 한 번 짧은 순간만이라도 저 야구공처럼 저 날치처럼 중력을 거스르고 싶은 뜨거운 갈망이다. - 59쪽

삐딱함을 아낀다. 상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의외로 공이 많이 든다. 인생을 왜 그리 어렵게 사느냐고, 세상을 너무 어둡게만 보지 말라는 충고도 뒤따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삐딱함이 없이는 작가도 없다. - 61쪽

나는 줄곧 글을 쓰는 테크닉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독자들로부터 `태도`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수많은 풍경 중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옮기고자 분투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물론 양귀자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 - 67, 68쪽

인간은 별을 우러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별을 가슴에 품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땅을 열망하며 두 발을 떼는 무모한 짐승이란 뜻이다. 바람이 분다. 날아야겠다. - 100쪽

나 역시 등단 직후엔 그랬다. 내가 쓰는 장편 소설의 성패에 예민했으며, 결과가 나온 후엔 그다음 장편소설로 곧장 달려가서 또 어떤 승부를 보려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에 몰두할 때, 어느 영화인으로부터 짧은 충고를 들었다. "소비되지 마시길!" - 102쪽

소설 <야간비행>(소담출판사, 2000)에서 항공우편국 책임자 리비에르는 강조했다. "법칙을 이끌어내는 건 경험입니다. 법칙을 아는 것이 결코 경험을 능가할 수 없지요." - 111쪽

인생이란 내면의 소리를 만드는 나날이 아닐까. 세상의 소리는 많지만 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리는 지극히 적다. 어떤 소리는 매일 찾아와도 스치듯 사라지고 어떤 소리는 일생에 단 한 번 닿더라도 심신을 온통 울려댄 후 내 안에 머무른다. 그렇게 바뀐 내면의 소리는 또 언젠가 바깥으로 흘러나가 타인의 영혼을 울리고 그 내면에 둥지를 튼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이 신비로운 안과 밖의 공명(空鳴)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 115쪽

세상의 모든 여행기는 <열하일기>(돌베개, 2009)와 <왕오천축국전> 사이에 놓인다. 순간순간 닥쳐오는 새로움들을 다채로운 형식과 문체로 오롯이 담아낸 것이 <열하일기>라면, 그 모든 다양함에서 핵심만 뽑아내어 간명한 단 하나의 형식과 문체로 정리한 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또한 혜초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과 여행중에 전해 들은 정보들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적었다. 체험과 견문이 뒤섞여 실제 여정을 파악하기 힘든 몇몇 여행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직함이다. - 122쪽

같은 병을 앓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가슴 절절한 말이 있을까. 같이 `죽는` 일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같이 `앓는` 일은 서로를 품고 이해하는 제법 긴 `동안`이다. 그의 병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에 감내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리. 흔히 사랑 이야기에 질병이 동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병이 결핵이든 암이든, 사랑 이야기에는 궁극적으로 함께 아파하고픈 갈망과 더이상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절망이 교차한다. 마음과 마음을 잇기 위해 몸과 몸을 같은 상태로 만드는 식이다. - 177쪽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에게 이로운 상황이란 영원히 찾아들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전부 바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기의 시간을 글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다." - 186쪽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때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낯선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계기가 무엇이든, 길 위에 올라선 다음에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길 위에서 배우고 길 위에서 가르치며 길 위에서 자고 먹고 마시며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삶의 이치를 `길 도(道)`로 압축하여 표현해온 것이 예사롭지 않다. -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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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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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시점에 이와 같은 울림을 주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습관적이며 자발적인 복종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우리가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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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읽을 것인가 - '모든 읽기'에 최고의 지침서
고영성 지음 / 스마트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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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적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상태가 유지될 때까지는 독서법에 대한 고민은 끊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책을 읽긴 읽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지금 내 방식이 적절한가, 이것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는가.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책을 선택하고, 읽고, 책장을 덮는 내내 이런 생각들은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처음엔 책만 많이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리지 않고 이 책 저 책을 사고, 읽고, 모았다. 그러다가 내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방치해놓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내 방식을 바꾸었다. 책을 선별해서 사는 것이었다. 철학, 미술, 생태와 환경 중심의 책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했다. 책을 읽기는 읽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책의 제목과 저자는 기억이 나는데, 내가 그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책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적어도 한 권 당 한 문장은 남기자는 마음으로. 그러다가 어느덧 욕심이 생겨 바로 그 순간 공감했던 문장, 읽을 수록 멋진 문장, 새로운 깨달음을 준 문장, 언젠가 써먹을 것 같은 문장 등에 밑줄을 긋다보니 이 또한 길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밑줄 그은 문장이 많을 수록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는 여지도 많아져 기억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제대로 요약하거나 정리한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을 남기지 않는 것에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독서법에 대한 방법들을 뇌과학, 인지심리학, 행동경제학 등의 이론을 통하여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내가 앞서 고민했거나 시행했던 독서법들이 거의 다 담겨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내 독서법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지에 방향도 제시해준다.

'독아(獨我)'에서는 뇌의 가소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장형 사고방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독서임을 주장한다. '다독(多讀)'에서는 독서라는 어려운 행동이 뇌에 적합하지 않은 힘든 일이어서 독서에 실패하는 일이 많다는 점과 초보자는 우선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 자신을 묶어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또한 다독을 위해서는 특정 분야의 책들을 묶어 읽는 계독(系讀)을 제안한다. '남독(濫讀)'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독서를 통하여 낯선 생각을 접하고 이를 기존의 생각과 연결하여 생각의 외연을 확장할 것을 권한다. 제노비스 사건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석이 낯선 시각에 의하여 어떻게 수정되고 재정리 되는지를 보여준다. '만독(慢讀)'에서는 아이들의 독서는 많은 양을 다그치는 것보다 느리게 시작하여 자세히 읽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려주며, '관독(觀讀)'에서는 관점을 취하는 독서를 제시한다. 이를테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려면 책의 내용도 정리되지 않고 글도 잘 안써지는데,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읽으면 각 챕터와 내용에 집중하게 되고 자신의 관점을 지키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재독(再讀)'을 통한 기억의 환원, '필독(筆讀)'을 통한 글쓰기의 준비, '낭독(朗讀)'을 통한 퇴고, '난독(難讀)'의 극복 및 '엄독(奄讀)'을 통한 읽는 행위의 초월과 독서의 자기화를 설명한다.

독서법으로 무슨 책 한권이 나올까라는 생각에 읽을 때는 쉬웠지만, 열거해보니 이 정도로 다양한 독서방법과 단계가 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독서법을 제시하는 다른 책들에 비하여 '나는 이렇게 읽었다'라는 류의 자랑이나 '이렇게 읽어라' 따위의 강권이 없어서 (물론 최상의 경지로 '엄독'을 염두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의 상황에 맞는 독서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의 뇌는 가소성이 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뇌가 그 방향대로 해부학적으로 변한다. 뇌의 가소성은 우리 모두 자신을 성장형 자아로 인식할 수 있는 생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정체성은 바닥에 검게 굳어 딱 달라붙은 껌딱지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삶은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정체성이라는 불변하는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정체성이 바로 본질이다. 인식이 변하면 본질도 바뀐다. - 44쪽

독서라는 과정은 또한 단순히 문자를 시각적으로 읽는 것만이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가장 복잡다단한 활동 중 하나이다(E. B. 휴이). 1980년대에 멀린 위트록 박사는 독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낸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 글로 씌어진 문장, 절과 단락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나감으로써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독서는 뇌의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과 청각, 언어와 개념 영역을 기억과 감정의 부분들과 연결하고 통합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통합을 위해서는 뇌의 각 영역들이 최소한의 성숙도를 확보해야 한다. - 52쪽

남독은 우리에게 세 가지 변화를 준다. 남독을 하게 되면 당신은 까칠해지고(비판적 사고), 엉뚱해지며(창의적 인간), 겸손해질(세계의 확장) 것이다. - 94쪽

"오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들추어 보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 날에 대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며,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거처와 연못의 그림자가 그 책장 위에 비치는 것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우리가 예전에 들추어 보았던 책을 다시 일게 되는 이유는 지나간 내 과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176쪽

낭독은 글을 제대로 검열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눈으로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결점들이 소리를 내어 읽었을 때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휘는 적절한지, 문맥은 매끄러운지, 논리는 잘 맞는지, 낭독을 통해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유시민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글이고 못나고 흉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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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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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두가 더 이상 노예가 되길 거부하는 순간, 이 굴욕적인 세상은 사라진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아무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결코 그 어떤 권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가 지닌 모든 권력은 바로 자발적 복종을 바친 자들이 건네준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을 멈춰라. 그 순간 당신은 자유인이다. - 30쪽. 역자서문

독재자의 권력이란 그 권력에 종속된 다른 모든 이들이 그에게 건네준 힘일 뿐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독재자를 참고 견디는 한, 그의 권력이 부리는 횡포는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지 않더라도, 단지 견뎌내기를 멈추기만 해도, 독재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떤 해악도 끼칠 수 없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대단한 힘을 가진 척하는 한 인간의 명성에 홀리거나 마법에 사로잡힌 듯 목이 눌린 채 비천하게 복종한다는 사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 분명하나 흔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마음 아프고 놀라울 뿐이다. 독재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혼자이고, 사랑받을 만한 어떤 장점도 지니지 않았다. 그는 민중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혹할 뿐이다. - 36, 37쪽

다시 독재자에게로 말머리를 돌려보자. 그와 싸울 필요는 없다. 그를 패배시킬 필요도 없다. 독재자는 스스로 굴복한다.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필요도 없다. 단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된다. 나라가 그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짓만 안 하면 된다.
우리는 민중 스스로가 자신을 방치하고 비탄의 수렁에 빠지도록 놔두는 것을 종종 본다. 굴종을 멈추면 그것으로 일단락된다. 민중은 흔히 자발적으로 굴종을 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노예가 될지 자유인이 될지를 선택하는 것은 민중 자신이다. 자유를 버리고 멍에를 짊어지며 잘 정비된 법률하에 권력의 보호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동시에 근심과 압제, 불의 그리고 오직 독재자 한 사람만의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46, 47쪽

천부(天賦)의 권한인 자유를 되찾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것은 짐승에서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잇겠다. 만일 누군가가 자유를 되찾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는 그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누군가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큰 용맹심을 발휘할 것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그가 들어온 `자유로운 삶`이라는 의심스러운 희망을 실현하는 것보다 차라리 미천한 현재의 삶을 안전하게 누리면서 사는 편을 선호한다면, 나는 이 또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된다. 단지 그것을 원한다는 의지만이 필요하다는데, 이 단순한 희망만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인데, 그것을 너무 비싼 대가라고 부를 사람이 있을까? - 47, 48쪽

그대들 자신이 그대들 위에서 군림할 특권을 그에게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 많은 눈을 그는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 자신이 바로 그의 눈 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을 가격하는 그 많은 팔을 그는 어디서 얻었겠는가. 그대들 자신이 그의 팔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의 마을을 짓밟는 발을 그는 어디서 구했겠는가. 그대들 자신이 그의 발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 스스로가 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무슨 힘으로 그대들을 지배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이 그를 용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감히 그대들에게 달려들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 52, 53쪽

나는 그대들이 독재자를 밀어내고 흔들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그때 그대들은 디딤돌을 뽑아낸 거대한 동상처럼 자신의 무게로 무너져 내려 산산조각 나는 독재자의 꼴을 보게 될 것이다. - 54쪽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 81쪽

반듯한 오성과 맑은 정신을 지닌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발치 앞만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들은 사안의 전후를 살피는 데 주의를 기울이며,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통찰하기 위해 과거를 떠올린다. 정돈된 두뇌의 소유자는 탐구와 지식으로 사고의 힘을 더욱 연마한다. 자유가 완전히 사라져 세상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때조차 이들은 자유를 상상하고 정신 속에서 자유를 느끼며 자유의 맛을 음미할 수 있어 아무리 잘 포장해서 들이대도 굴종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 83쪽

프랑스의 질서가 두려움 때문에 신중하고, 재산 모으기에만 정신이 팔려 타인에 대해 무심한 사람들의 질서라면, 그것은 최악의 무질서다. 무관심은 모든 불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균형과 화합, 즉 평등과 우애가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사회적 질서란 통치 세력과 피통치 세력(시민) 사이에 균형관계가 성립되어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균형관계의 성립은 보다 고차원의 원칙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이 원칙이 바로 정의다. 정의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민중의 이상적 질서는 정부와 시민 사이에 갈등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사회다.
질서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현실의 권력층은 항상 그들 세력의 욕구를 강요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질서를 주장한다. 문제의 앞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통치하기 위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미 있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통치력을 동원해야 한다. 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1944년 10월 12일 자 논설 - 148,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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